
호찌민시 2군 타오디엔(Thao Dien) 한 켠. 한국 식당과 카페가 늘어선 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영국국제학교 호찌민
(British International School HCMC·BIS)의 Secondary 캠퍼스가 자리한다. 만 11세부터 18세까지, 영국식 중·고등 과정과 IB 디플로마(IBDP)를 가르치는 이 캠퍼스가 요즘 베트남 한인 사회에서 회자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 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STEM 레이싱(STEM Racing) 팀 ‘비엘록스 레이싱(Vielox Racing)’이 베트남 국가대표 자격으로 오는 싱가포르 세계 결승전(World Finals)에 출전하기 때문이다.
압축 공기로 달리는 손바닥만 한 미니어처 F1 경주차. 그 작은 차 한 대를 만들기 위해 10대 학생들이 1년 넘게 쏟아부은 시간은, 단순한 교외활동을 넘어 진로와 대학 입시까지 바꿔 놓았다. BIS가 2015년 베트남 최초로 ‘F1 인 스쿨 (F1 in Schools)’ 팀을 출전시킨 지 10년.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학생들과 직접 만나 들었다.
‘미니 자동차 만들기’라는 오해
STEM 레이싱(옛 F1 in Schools)은 학생들이 압축 공기로 구동되는 포뮬러 원(Formula 1) 스타일 미니어처 경주차를 직접 설계·제작·경주하는 국제 STEAM 대회다. 언뜻 작은 차를 만들어 빠르기를 겨루는 공학 경연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사람들은 STEM 레이싱을 그저 미니어처 자동차를 만들고 경주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비엘록스 팀원들은 입을 모은다. “하지만 이 대회는 트랙 너머로 훨씬 멀리 확장됩니다.” 차량 설계는 물론, 비즈니스, 마케팅, 스폰서십 유치, 프로젝트 관리(Project Management), 전문적 커뮤니케이션까지 모두 학생들의 몫이다. 공학 (Engineering)·엔터프라이즈(Enterprise)·프로젝트 관리에 걸친 전문성을 요구하는 다학제적 도전인 셈이다.
이 프로그램은 포뮬러 원과 그 글로벌 파트너들의 후원을 받으며, 다수의 상이 F1 팀과 업계 리더들에 의해 직접 후원된다. 최고 수준에 오른 학생들은 피트 개러지(Pit Garage)와 패덕(Paddock) 등 실제 F1 환경에 초대받기도 한다. 학교 안의 경연이 곧 세계 모터스포츠의 최전선과 연결되는 구조다.
“STEM과 거리가 멀다고 믿었던 우리”
비엘록스 레이싱은 6명으로 구성됐다. 프로젝트 매니저 마틴(Martin), 엔터프라이즈 매니저 리엔 푸엉(Lien Phuong), 그래픽 디자이너 수시(Sushi), 디자인 엔지니어 잉그리드(Ingrid), 제조 담당 지우(JiU), 그리고 연구개발(R&D) 총괄 동하(DongHa). 각자 다른 강점을 가진 학생들이 하나의 차를 만들기 위해 모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처음부터 STEM에 자신 있던 학생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머큐리 VN(Mercury VN)이나 아두아(Adua) 같은 선배 팀들의 독창성에 매료됐지만, 정작 우리가 대회에 나간다는 생각은 부담스러웠습니다.” 비엘록스의 회고다. “STEM에 능하다고 알려지지 않은 학생들로서, 우리가 참가하는 모습조차 그리기 어려웠죠.” 그러나 창의성과 자기 발전이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친구들을 차츰 모으면서 그 막연했던 목표는 현실이 됐다. “사전 경험과 무관하게 누구나 STEM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단순한 신념이 비엘록스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준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포트폴리오 작성을 위해 방과 후 수많은 시간을 쏟았고, 대회 직전까지 막판 차질이 끊이지 않았다. 차량이 규정에 완전히 부합하는지 확인하고, 발표를 반복 연습하던 불확실성의 순간들. 비엘록스는 그 시간을 통해 “실패를 마주하는 법뿐 아니라, 함께 실패를 마주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 ‘낮은’ 순간들이 있었기에 그랜드프리(BIS Grand Prix) 우승이라는 ‘높은’ 순간이 한층 의미 있었다는 설명이다.
베트남 유일의 대표, 그 영광과 책임
전국 챔피언(National Champions) 등극은 무대 뒤에서 흘린 모든 시간에 대한 보상이자, 집단적 노력의 확인이었다. 그러나 비엘록스는 우승의 기쁨보다 그 뒤에 따라온 책임을 먼저 이야기했다. “조국을 세계 무대에서 대표한다는 것은 특권이자 큰 책임입니다. 베트남의 유일한 대표로서, 회복력과 겸손, 그리고 깊은 국가적 자긍심으로 이 영예를 짊어지려 합니다.”
가장 자랑스러운 성취를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빠른 기록도, 화려한 디자인도 아닌 “역경이 우리를 규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은 것”이었다. 팀 사기가 무너지고, 감당하기 힘든 업무량이 쏟아지고, 우승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던 순간에도 좌절에 휩쓸리는 대신 함께 모여 접근법을 바꿨다는 것이다. “차량의 개인 최고 기록을 세우든, 타협을 통해 팀 내 갈등을 헤쳐 나가든, 우리는 도전을 성장의 기회로 바꿔낼 수 있었습니다.”
이시운 학생 사진
실증 사례 한 한국 학생의 진로를 바꾼 미니 F1
STEM 레이싱이 입시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BIS 13학년(Year 13) 한국인 학생 이시윤 양의 사례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베트남 국제학교로 전학해 줄곧 영어권 커리큘럼에서 공부해 온 그는, 2024년 동료의 팀에 테스트 엔지니어(Test Engineer)로 합류했다. 미니어처 F1 차량을 설계하며 속도와 공기역학을 최적화하는 역할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경험은 그가 공학자의 길을 접는 계기가 됐다. “이 활동을 통해 제가 공학자의 일에는 맞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고, 그것이 수학과로 전향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대학을 수학과로 지원했다. 그러나 STEM 레이싱 경험이 무의미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응용수학의 문제 해결 능력이 크게 늘었고, 길고 중요한 프로젝트를 하면서 배운 인간관계와 리더십을 대학 에세이에 녹여 썼습니다. 국제 대회였던 만큼 입학 사정관의 눈에 더 인상적으로 비쳤을 수도 있고요.”
성과는 화려하다. 한국에서 카이스트(KAIST)와 서울대(SNU), 그리고 홍콩대(HKU)에 합격했고, 영국에서는 에든버러(Edinburgh)·워릭(Warwick)·UCL·케임브리지(Cambridge)로부터 오퍼를 받았다. 케임브리지 진학을 위한 STEP 시험을 최근 치르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모든 지원 전공은 수학과. “싱가포르와 홍콩은 아시아 최상위권 대학이 있고 금융권이 발달해 수학과 취업에 유리하다고 봤습니다.”
“IB, 생각만큼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한국 학부모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IB 디플로마의 학습 부담에 대해, 시윤 학생의 진단은 담담했다. “IB가 힘든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친구를 사귀고, 취미 생활을 하고, 과외활동까지 병행할 여유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공부량을 핑계로 밴드 같은 취미를 일찌감치 포기했다가 뒤늦게 후회하는 친구들을 안타까워했다.
학습 부담이 정점에 이르는 시기로는 12학년 마지막 텀, 13학년 첫 텀, 그리고 실제 IB 시험 기간을 꼽았다. “그 외 기간의 부담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오히려 12학년 마지막 텀에 시험과 IA(내부 평가)를 동시에 치르며 시간 관리를 연습하게 되니, 13학년이 되면 다들 스트레스를 덜 느끼더군요.” 사교육에 대해서도 소신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과외에 의존하기보다, 혼자 공부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받는 것이 IB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식입니다.” 실제로 그는 경제 과목 성적이 부진하자 IB 시험 약 두 달 전부터 온라인 과외를 받아 실력을 끌어올렸다.
학교의 진학 카운슬링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매겼다. “선생님들이 에세이는 물론, 생각보다 까다롭고 양이 많은 지원 서류와 절차를 잘 챙겨주셔서 진학이 한결 수월했습니다.” 특히 잊지 못할 도움이 하나 있었다. 대통령 과학 장학금 면접일과 케임브리지 STEP 시험일이 겹쳐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학교가 한국에서 STEP 시험을 응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다.


교실 밖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
이시윤 학생의 사례처럼, STEM 레이싱은 일반 교실에서는 좀처럼 얻기 어려운 실전 경험을 제공한다. 학생들은 실제 마감 기한을 관리하고, 성과 압박에 대응하며, 외부 심사위원에게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직접 전달해야 한다. 공학 설계와 마케팅, 브랜딩, 재무, 발표를 아우르는 학제 간 프로젝트를 장기간 끌고 가면서 리더십·회복력·시간 관리·주도성 같은 전이 가능한 역량이 길러진다.
이 점은 대학 입시에서 강력한 무기가 된다. STEM 레이싱은 응용 학습의 구체적 증거가 되며, 경쟁적인 STEM 환경에서의 지속적 참여, 팀 내 리더십, 압박 속 문제 해결 사례를 한눈에 보여줄 수 있다. 공학·경영·디자인·컴퓨터 과학처럼 경쟁이 치열한 전공일수록 이런 실질적·응용적 경험은 높이 평가받는다.
IB의 부담을 걱정하는 학부모에게도 시사점이 크다. 상당한 시간 투자가 필요하지만, STEM 레이싱은 IB 성공에 필요한 시간 관리·조직력·협업·압박 속 회복력을 길러주며 학업과 충돌하기보다 오히려 보완한다. 핵심은 명료하다. “가장 똑똑한 학생이 아니라, 한정된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학생이 성공합니다.”
베트남에 없던 생태계, 학교가 직접 만들다
베트남에는 아직 STEM 레이싱의 정형화된 국가 경쟁 체계가 없다. 학교가 스스로 경쟁·진급·인재 육성의 기회를 설계하고 제공해야 한다는 의미다. BIS는 이 공백을 자체적으로 메워왔다. 올해 처음 도입한 초등 STEM 레이싱 대회를 비롯해, 발전반(Development Class)과 전문반(Professional Class) 경연까지 약 100명의 학생이 참여하는 단계별 육성 체계를 구축했다. 입문 단계부터 고성능 경쟁까지 이어지는 명확한 성장 경로가, 사실상 하나의 국가 경쟁 시스템을 학교 안에 옮겨 놓은 셈이다.
머큐리 VN의 뒤를 비엘록스 레이싱이 잇고, 그 무대를 발판 삼아 이 군 같은 졸업생이 세계 명문대로 향하는 인재 파이프라인이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다.
“오케스트라·MUN 공식? 전혀 아니다”
세계 결승전을 앞둔 비엘록스가 가장 기대하는 것은 의외로 트로피가 아니었다. 전 세계에서 모인, 혁신과 공학과 팀워크에 같은 열정을 품은 또래들과의 만남이다. 경험을 나누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공학·디자인·혁신의 최전선에 선 전문가들로부터 통찰을 얻는 것. 그리고 비엘록스다운 솔직한 한마디. “물론 싱가포르의 훌륭한 음식을 즐기는 것도 빼놓을 수 없죠.” 세계 결승전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수상을 바라긴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개인으로서 성장하고, 오래갈 인연을 만들어 대회를 마치는 것이 우리의 진짜 목표입니다.”
같은 길을 고민하는 후배와 학부모에게 이시윤 양이 건넨 조언도 같은 결이었다. 한 학년에 학생이 많은 만큼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가 많아 동기 부여가 되고, STEM 레이싱 같은 교외활동에 대한 지원도 탄탄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한국 학부모들의 오랜 통념 하나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좋은 대학에 가려면 오케스트라를 하고 모의유엔(MUN)을 해야 한다는 공식이 있다고 믿는 분이 많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활동을 강요하기보다, 아이가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활동을 찾도록 돕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베트남에 모터스포츠도, STEM 경연의 토양도 척박하던 시절 첫발을 내디딘 BIS 호찌민. 10년 뒤, 그 학교의 평범했던 학생들이 베트남을 대표해 세계로 향하고, 또 다른 학생은 그 경험을 디딤돌 삼아 세계 명문대의 문을 두드린다. “사전 경험과 무관하게 누구나 STEM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다”던 비엘록스의 신념은, 이미 그 자체로 증명되고 있다.

BIS HO CHI MINH SECONDARY CAMP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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