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 Column – 나는 죄가 없는가?

최근 세간에 급격하게 떠도는 말이 하나 있다.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 지도자와 국민의 수준은 당연히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 말에는 비아냥과 냉소가 담겨있지만 그 냉소를 무시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 역시 포함되어 있다.

1930년대 독일은 히틀러를 선택했다.
그는 대중의 불안과 불만을 자극했고, 민족주의와 증오의 깃발 아래 선동된 수많은 군중이 그에게 열광했다.
그리고 역사상 최악의 전쟁과 학살이 벌어졌다. 600만명의 유대인이 그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스실에서 운명을 달리해야 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의 총칼아래 청춘을 묻었고, 아들과 남편을 잃은 어머니와 부인만 남은 가족을 양산했다.
하지만 역사는 히틀러만을 악인으로 규정했다.
“국민은 속았다, 피해자다”라는 프레임은 과연 진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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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자격

플라톤은 이상적인 국가를 위해 철인哲人이 다스려야 한다며 철인정치를 내세웠다. 그는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무지한 군중의 폭정으로 죽임을 당하자, 대중의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정치가 얼마나 위험한지 체감하고 이를 주장했다. 그는 정치의 목적은 정의이며 정의는 오직 참된 지혜를 가진 자만 실현할 수 있다는 주장했다.
윤리와 사유의 훈련이 없는 자는 권력을 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치가란 권력자가 아니라 ‘국가의 영혼을 치료하는 의사’여야 한다며, 무지하거나 욕망에 휘둘리는 자가 권력을 가지면, 국가는 병들 수밖에 없고, 이성적인 국민은 그에 귀속됨을 거부할 것이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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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정치는 없다. 이성적 윤리적 선택이 있을 뿐이다.

현대 정치학자 존 롤스는 “정의로운 절차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든다”고 했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주의는 위대한 정치 제도지만 정의롭다고 정의하기 힘들다.
현대의 정치는 이상이 아니라 직업이 되었고, 선거는 이성보다 감성을 자극하는 술수로 변질되었다. 대중은 때때로 진실보다 이미지를, 철학보다 감정을, 사실보다 선동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정당한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된다. 그렇게 휘두른 권력의 대가는 온전히 국민의 몫이 된다.
정치인이 나라를 팔아먹어도 지지를 얻고 있다면 나라를 팔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한국인의 정치인이 말했다. 즉 국민의 수준이 매국을 허용하는 것인데 하지 못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섬뜩한 정치인을 지지한 국민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정의에 대한 기대였을까, 아니면 분노의 대리인이 되어주길 바라는 욕망이었을까?
정치는 그 나라의 거울이고, 그 거울 속에는 단지 지도자의 얼굴만이 아닌 우리 자신의 초상이 비친다.

“선거란, 누구를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가에 대한 답이다”
그대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지금의 시대가 바로 그대가 의도한 사회다.
역사는 지도자의 과오를 기록하지만, 그를 만든 국민의 책임은 묻지 않는다.
지지한 자, 침묵한 자, 방관한 자, 혹은 선동에 박수친 자는 법정에도, 교과서에도 오르지 않는다. 자신의 선택으로 대가를 치룬 국민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면책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들은 피해자가 아니다. 그들은 그 비이성적 비윤리적 판단으로 불의한 사회를 만든 가해자인 것이다.
윤리가 없는 정치, 선동에 빠진 선거, 책임을 인지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또 다른 히틀러, 또 다른 독재자, 또 다른 선동자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하는 이유다.
정말, 나는 죄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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