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역 질서 종료” 선언, 베트남은 20%로 ‘극적 타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68개국을 상대로 한 전방위 관세 폭탄을 터뜨리면서 제2차 대전 이후 미국 주도로 구축된 자유무역 질서가 사실상 막을 내렸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특히 베트남은 초기 위협된 46% 관세에서 20%로 낮춰지며 ‘관세 외교’의 성공 사례로 주목받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것이 새로운 무역전쟁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경고한다.
베트남, ‘관세 협상’ 첫 성공 사례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새 행정명령에 따르면 베트남 수출품에는 20% 관세가, 제3국을 경유한 우회 수출품에는 40%의 징벌적 관세가 부과된다. 이는 올해 7월 초 트럼프가 위협했던 46% 관세에서 크게 낮아진 수치다.
베트남은 영국, 중국에 이어 미국과 관세 협정을 체결한 세 번째 국가가 됐다. 응우옌 푸 쫑(Tô Lâm) 베트남 당서기장과 트럼프 대통령 간의 직통 전화 협상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블룸버그는 “베트남 지도부가 트럼프 대통령의 20% 관세 발표에 당황했으며, 여전히 관세율을 더 낮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통화 직후 베트남 당서기장이 협상팀에 관세율을 더 낮추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베트남 외교부는 “미국이 베트남을 시장경제국으로 조속히 인정하고 첨단기술 제품 수출 제한을 해제하기로 했다”며 성과를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베트남이 미국에 시장을 개방하고 SUV 등 미국 제품을 무관세로 수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드래곤캐피털 “베트남, 아시아 공급망 재편의 수혜자”
투자은행 드래곤캐피털은 “베트남의 20% 관세는 인도네시아(19%), 필리핀(19%)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중국의 55%보다 훨씬 낮아 지역 경쟁력을 유지했다”고 분석했다.
베트남의 올해 1분기 대미 수출액은 313억9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품목별로는 ▲컴퓨터·전자제품(24%) ▲기계·장비(17%) ▲섬유·의류(12%) ▲휴대폰·부품(9%) 순이었다.
베트남은 2023년 GDP의 거의 90%를 상품과 서비스 수출에서 창출하는 세계에서 가장 수출 의존적인 경제 중 하나다. 미국은 베트남의 최대 수출 시장으로, 작년 대미 수출만으로도 GDP의 30%를 차지했다.
전문가들은 베트남이 ▲중국과의 지리적 인접성으로 인한 원자재 조달 용이성 ▲정부 주도의 인프라 개발 ▲20개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의 강점을 바탕으로 ‘차이나 플러스 원(China+1)’ 전략의 최대 수혜국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發 보복 우려…”GDP 2% 타격 가능성”
하지만 우려도 만만치 않다. OCBC 은행에 따르면 새로운 관세로 인해 베트남의 올해 총 상품 수출이 최대 40%까지 급감할 수 있다. 이는 베트남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1.2%포인트 끌어내려 5%로 떨어뜨릴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정부 목표치인 “최소 8%”와 큰 차이다.
블룸버그는 “중국이 베트남을 경유한 우회 수출 단속에 보복할 경우 베트남이 대미 수출의 25%를 잃고 연간 GDP의 2% 이상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관세청은 중국산 제품이 베트남에서 최소한의 가공을 거쳐 재수출되는 ‘우회 수출’에 대해 40% 징벌 관세를 부과키로 했지만, 구체적인 판별 기준은 여전히 모호한 상태다. 무역 전문가들은 “중국산 부품이 1%만 포함돼도 우회 수출로 분류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딜레마’…베트남을 통한 중국 견제
베트남은 미중 무역 긴장을 경제적 기회로 잘 활용한 케이스다. 양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관세와 불안정을 피하려는 제조업체들의 선호 목적지가 됐다.
2018년 무역전쟁 시작 이후 애플, 삼성, 인텔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베트남 사업을 대폭 확장했다. 미국의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는 베트남 수출품에 대한 수요를 동시에 끌어올렸는데, 이는 새로 비싸진 중국 제품의 직접적인 대체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2017년부터 2023년 사이 베트남 내 애플 공급업체 수가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 폭스콘, 고어텍, BYD 같은 중국 전자업체들이 베트남 북부의 한때 조용했던 지역에 거대한 공장을 설립했다.
하지만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미국 무역 협상가들이 베트남에 “중국 산업재 수입 의존도를 줄이고” 베트남의 중국과의 외교적 균형을 잠재적으로 해칠 수 있는 “강력한” 요구 사항 목록을 전달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베트남 소재 공장들이 중국산 원자재와 부품 사용을 줄이고 생산 및 공급망을 더 세심하게 통제하기를 원한다”고 요구했다. 트럼프의 매파 무역 고문인 피터 나바로는 폭스뉴스에서 베트남을 중국 상품의 “경유지”라고 비난했을 정도로 트럼프 행정부는 베트남에 세부적인 통제를 요구하고 있다.
복잡한 중국-베트남 관계…”줄타기 외교”
베트남은 중국의 최대 아세안 무역 파트너이자 전 세계 네 번째 무역 파트너다. 2025년 첫 3개월 동안 양국간 무역량은 512억5000만 달러로 17.46% 증가했다.
중국은 베트남의 농림수산물 수출 1위 목적지로 부상했으며, 수백만 베트남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중국의 대베트남 FDI는 312억6000만 달러로 베트남 6위 외국인 투자자가 됐다.
중국 시진핑 주석은 지난 4월 중순 베트남을 방문해 양국 관계를 재확인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에 대응해 미국의 소위 “일방적 괴롭힘”에 반대할 것을 베트남에 촉구했다. 방문 기간 중 양국은 공급망 통합, 인공지능, 합동 해양 순찰, 철도 인프라 개발 등을 포함한 45개 협정에 서명했다.
베트남의 대중국 무역 적자 확대와 베이징으로부터의 중간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관세 회피 의혹에 노출돼 미국의 보복을 촉발할 가능성이 우려되고 있다.
베트남의 딜레마…양자택일의 기로
알자지라는 “베트남에게는 미국 시장 접근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과 화해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중국과 베트남은 국경을 공유하고 있으며, 최근 몇 년간 양국 경제는 점점 더 밀접하게 얽혀있다.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가 중국이 관세를 회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베트남을 압박하고 있지만, 경제학자들은 수출 의존적인 베트남이 여전히 고통스러운 결정에 직면해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글로벌사우스 프로젝트의 르 홍 히엡은 “미국과 중국이 베트남 같은 국가들이 직면한 어려운 상황을 인식하고 부수적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급망 대전환…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 위기
CNBC 공급망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기업들이 제조업을 미국으로 되돌리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 높다고 응답했으며, 거의 절반이 리쇼어링으로 인해 비용이 두 배 이상 증가할 것이라고 답했다.
응답자의 대다수는 트럼프의 무역전쟁이 저관세 지역을 찾는 글로벌 탐색을 촉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63%가 트럼프의 관세 정책으로 인해 올해 미국 경제에 경기침체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플렉스포트의 라이언 피터슨 CEO는 “해운회사들이 이미 화물선을 재배치하기 시작했다”며 “중국 대신 베트남으로 가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유럽이나 미국으로 가는 새로운 무역 경로를 개척하고 있다”고 말했다.
1910년 이후 최고 관세율…”스무트-홀리법 재현”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글로벌 경제에 더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신용평가사 피치레이팅스의 올루 소놀라는 “미국 관세율이 작년 2.5%에서 22%로 급등해 1910년 이후 최고 수준에 달했다”며 경고했다.
이는 대공황을 악화시켰던 1930년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능가하는 수준이다. 다트머스대의 경제사학자 더글러스 어윈은 “스무트-홀리법 때보다 훨씬 더 큰 일이 될 것”이라며 “현재 미국의 수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30년대 초반보다 훨씬 크다”고 지적했다.
에스와르 프라사드 코넬대 교수는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이 이제 모든 미국 무역 파트너를 포함하게 된 트럼프의 관세로 인해 심각하게 약화됐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침체 경고음…”게임 체인저”
TIME지에 따르면 경제학자들은 트럼프의 무역전쟁이 미국인들보다 다른 어떤 국가보다 미국에 더 큰 타격을 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뉴센추리 어드바이저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클라우디아 살은 “관세가 발표된 수준에서 유지된다면 미국이 경기침체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JP모건은 연말까지 글로벌 경기침체 확률을 40%에서 60%로 상향 조정했다. 글로벌 실질 GDP 성장률이 연초 2.1%에서 2025년 4분기 1.4%로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OECD는 트럼프의 무역전쟁이 글로벌 경제성장을 둔화시키고 인플레이션을 부채질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멕시코와 캐나다의 성장률 하향 조정폭이 가장 크며, 멕시코는 올해 GDP가 1.3% 위축되는 경기침체에 빠질 것으로 예상된다.
IMF는 트럼프의 관세율이 대공황 시기에 도달했던 60% 수준을 넘어섰다고 지적하며, 이 시기에는 1200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일자리를 잃었다고 경고했다.
달러 패권 흔들림…새 국제질서 서막
챗햄하우스는 “트럼프의 새로운 관세 체제가 금융시장을 패닉상태로 몰아넣고 복잡한 글로벌 공급망을 위협했다”며 무역전쟁의 파괴적 영향을 경고했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무차별 관세 정책이 기축통화로서 달러 지위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무역 상대국들이 달러 결제를 회피하고 자국 통화나 위안화 등 대안 결제 수단을 찾을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유럽 중앙은행 정책센터(CEPR)는 “관세 확대가 생산 패턴을 왜곡하고 글로벌 가치사슬의 급격한 재구성을 유도해 덜 효율적이고 더 불투명한 무역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문가 진단…”자유무역 시대의 종료”
에스와르 프라사드 코넬대 교수는 “미국 주도 자유무역 시대가 갑작스럽게 막을 내리고 있다”며 “트럼프가 국제무역 시스템 자체를 날려버리는 선택을 했다”고 평가했다.
데베어그룹의 나이절 그린은 “제2차 대전 후 미국과 세계를 번영하게 했던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며 “세계무역에 지진이 발생했다”고 진단했다.
모닝스타의 프레스턴 칼드웰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4월 2일 발표된 관세 인상이 유지된다면 미국에게 자초한 경제적 재앙을 의미한다”고 경고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다자주의와 규칙 기반 질서의 수혜를 받던 시대가 끝나고 닫히고 분열된 불확실한 상황과 싸워야 하는 ‘뒤집힌 세계’가 됐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베트남의 전략적 선택은?
베트남은 여러 진실을 동시에 유지하는 법을 배운 복잡한 파트너십에 낯설지 않다. 천 년간의 중국 식민지배를 견뎌냈고 최근에는 1979년 국경 전쟁에서 중국과 대치했지만, 현재 중국은 베트남의 최대 무역 파트너다.
베트남 전략가들은 한 번에 여러 진실을 유지하는 법을 배웠다. 이는 현재의 미중 갈등 상황에서도 베트남이 양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전략의 배경이 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정책이 단순한 협상 카드를 넘어 미국 우선주의를 관철하려는 구조적 변화”라며 “글로벌 무역 질서의 판도 변화는 불가피하다”고 진단했다.
특히 자유무역 기반 글로벌 분업체계가 무너지면서 상품 가격 상승과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부채가 급증한 상황에서 경제가 둔화하면 버티지 못하는 국가들이 속출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베트남의 사례는 새로운 무역질서에서 중간국가들이 직면한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경제적 실용주의와 지정학적 균형, 그리고 국가 생존 전략이 복잡하게 얽힌 21세기 무역전쟁의 현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