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 인프라 개발의 패러다임 전환… “민간경제가 최우선 동력”
2026년 구정(뗏) 연휴 기간, 푸꾸옥(Phú Quốc) 국제공항은 연일 역대 최다 항공편·탑승객 기록을 갈아치웠다. 혼잡이 예상됐지만 공항은 끊김 없이 돌아갔다. 조용한 변화가 있었다. 2026년 초, 이 공항의 운영권은 국영 항공당국에서 민간기업 썬그룹(Sun Group)으로 넘어가 있었다.
공항을 사기업이 운영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과 10년 전이었다면 베트남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도로와 항만, 공항, 경전철은 국가가 짓고 국가가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 상식이 지금 무너지고 있다.
왜 지금인가 – 150억~200억 달러의 구멍
변화의 출발점은 숫자다. 베트남은 2030년까지 고속철도, 신공항, 해상풍력, 도로·지하철·항만·디지털망 등 인프라 투자에 1,500억~2,000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추산된다. 정부 예산과 해외 원조, 국내 저축을 모두 합쳐도 이 격차를 메울 수 없다.
격차를 누가 메울 것인가. 베트남 정부의 답은 지금까지와는 달랐다.2025년 5월 4일, 정치국은 ‘민간경제 발전에 관한 결의 68호(Resolution 68-NQ/TW)’를 공표했다. 또 람(Tô Lâm) 총서기가 직접 서명한 이 결의는 민간경제를 “국가경제의 가장 중요한 동력”으로 규정한다고 명시했다. 베트남 현대사에서 민간기업에 관한 가장 중요한 정책 선언 중 하나로 평가된다.
사회주의 노선을 유지해온 나라에서 “민간이 최우선”이라는 선언은 단순한 정책 변화가 아니었다. 이념적 전환이었다. 그리고 그 선언은 즉각 현실의 공사판으로 번역됐다.
전환의 구조 – 국가가 물러서고 민간이 들어온다
변화는 크게 세 층위에서 진행 중이다.
첫째는 건설 주체의 교체다. 과거 국영기업과 정부 예산이 담당하던 공항·도로·항만 건설을 민간 재벌이 직접 투자·시공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 2018년 반돈(Vân Đồn) 국제공항은 베트남 최초로 민간기업이 건설·운영한 국제공항이 됐고, 이는 민간 자본의 국가 항공 인프라 참여를 위한 역사적 선례로 자리 잡았다. 이후 이 모델은 확산됐다.
2026년 4월에는 썬그룹이 판티엣(Phan Thiết) 공항의 민간 항공 부분 착공에 들어갔다. 베트남 민간항공국에 따르면 2030년까지 공항 시스템 개발에 필요한 자본은 약 499조 동으로, 국내외 비 (非)국가 예산 조달을 전제로 한다.
둘째는 운영권의 이전이다. 짓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운영까지 민간에 맡기는 흐름이다. 푸꾸옥 공항 운영권 이전이 대표적이다. 민간이 운영을 맡자, 이전에는 혼잡으로 몸살을 앓던 연휴 성수기에도 공항이 안정적으로 운영됐다. 민간 섹터 관리의 효율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됐고, APEC 2027을 앞둔 베트남 정부에 민영화 모델에 대한 자신감을 실어줬다.
셋째는 규모와 속도의 압축이다. 2025년 12월 19일, 베트남 공산당 제14차 전국대표대회 개막에 맞춰 전국에서 234개 핵심 프로젝트 기공식이 동시에 열렸다. 이날 썬그룹 한 기업만 베트남 3개 권역에 걸쳐 5개 프로젝트를 동시 착공했다. 총 투자 규모는 약 57억 달러였다. 국가 행사에 민간 재벌이 사실상 공동 주역으로 무대에 오른 것이다.

누가 이 역할을 맡는가 – 민간의 조건
모든 민간기업이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10년 사이 베트남에서는 실질적인 인프라 건설 능력과 강력한 정부 네트워크, 국제 자본 유치 경험을 갖춘 대형 민간 재벌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경제 주체가 부상했다. 빈그룹, T&T그룹, 쭝남그룹, 그리고 썬그룹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썬그룹은 가장 포괄적인 생태계를 구축한 사례로 꼽힌다. 관광지 개발을 출발점으로, 케이블카·호텔·테마파크·리조트를 거쳐 공항 건설, 공항 운영, 자체 항공사 창설까지 수직 계열화했다. 테마파크·리조트에서 공항·항공사까지 이어지는 완전한 밸류체인을 가진 투자자는 베트남 내에 썬그룹 외에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체 투자 공항을 자체 항공사로 채우는 이 구조는 ‘관광객 유입’을 기업이 직접 창출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2025년 기준 썬그룹은 51개 계열사, 7개 성·시 113개 프로젝트, 총 투자금 137조 동을 운용 중이다. 2024년 세후 순이익은 전년 대비 2.6배 증가했다.
그러나 이 성장의 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APEC 2027 – 데드라인이 만든 ‘민관 공생’
현재 민간 인프라 투자 가속의 가장 강력한 촉매는 2027년 APEC 정상회의다.
과거 APEC 개최지들은 숙박 부족 문제를 반복적으로 겪었다. 2025년 경주 APEC에서도 2만 명 이상의 대표단·수행 인력을 수용할 숙박이 부족해 분산 배치와 크루즈선 활용 같은 임시방편이 동원됐다. 베트남은 APEC 개최지로 푸꾸옥을 선정하면서 이 문제를 ‘호텔 도시’ 개념으로 근본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회의장과 숙박, 상업, 공공 공간이 한 블록 안에 통합되는 방식으로, 과거 APEC 개최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모델이다.
이 모델의 실질적 시공자는 썬그룹이다. 12,000실 규모 호텔·서비스 아파트 복합단지, 세계 최대급 무기둥 볼룸(가로 81미터)을 갖춘 컨벤션센터, 공항과 회의장을 직결하는 경전철까지 국가가 원하는 행사장 인프라를 민간기업이 단기간에 공급하는 구조다.
국가는 기한을 제시하고, 기업은 투자와 실행을 맡는다. 양쪽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지점에서 초속도 개발이 이루어진다. 썬그룹은 이를 위해 중국 건축설계 대기업 골드맨티스(Gold Mantis)와 23억 달러 규모의 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싱가포르 창이공항 운영사까지 끌어들였다. 국가 프로젝트가 사실상 글로벌 민간 컨소시엄의 프로젝트로 운영되는 모습이다.

더 넓은 그림 – 베트남만의 현상이 아니다
베트남의 이 변화는 고립된 사례가 아니다. 인프라 재원 부족이라는 압력은 개발도상국 대부분이 공유하는 현실이고, 민간 자본으로 국가 인프라를 건설하는 PPP(민관합동투자) 모델은 세계적 추세다.
다만 베트남의 경우는 그 속도와 규모, 그리고 이념적 전환의 폭이 독특하다. 사회주의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민간경제를 “가장 중요한 동력”으로 선언하고, 단 하루에 234개 프로젝트 기공식을 여는 방식으로 민간 투자를 국가 행사화했다. 효율성 추구와 정치적 가시성 연출이 동시에 작동하는 독특한 모델이다.
베트남 인프라 시장은 더 체계화되고 규칙 기반으로 변화하는 중이다. 2025년에는 투자·세제·토지·건설·전력·자본시장·은행 분야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법제 패키지가 발효됐다. 민간 투자자에게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정부가 직접 개발사를 지정하던 방식에서 경쟁 입찰 방식으로의 전환이다.
이는 곧, 지금까지의 민간 인프라 투자가 상당 부분 정부와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한 ‘지정형 개발’에 의존해왔다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규칙이 정비될수록 관계가 아닌 역량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누가 다음 공공재를 지킬 것인가
2025년 기준 베트남 전역의 초대형 도시개발 프로젝트 27개의 총 투자금이 1,15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그 절반 이상을 소수의 민간 재벌이 주도하고 있다.
도로가 생기고 공항이 열리고 관광객이 몰린다. 개발은 분명 이뤄진다. 그러나 민간이 국가 인프라를 짓는 구조에서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 있다. 그 도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공항은 지역 주민을 연결하는가, 아니면 리조트 투숙객을 실어 나르는가. 개발이 닿지 않는 자연과 생태는 누가 지키는가.
베트남 정부는 재원의 논리로 민간에 문을 열었다. 그 문을 통해 들어온 자본이 공공의 이익과 얼마나 정렬될 수 있는지는, 아직 진행 중인 실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