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 20일부터 호찌민시 냐베(Nha Be) 일대 주민들의 수도꼭지에서 찻물 빛깔의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현지 매체들이 전했다. VOV 보도에 따르면 프억끼엔 지역의 한 주민은 물탱크 탓인 줄 알고 배관 전체를 세척했지만 누런 물은 며칠 뒤 다시 나왔다. 이 주민은 마시고 요리하는 물은 생수로 바꿨고, 수돗물은 씻고 빨래하는 데만 쓰고 있다고 했다. 사이공수도총공사(SAWACO)는 말단 수요처, 건기 수요 급증, 배관 세척과 기술 정비 등을 이유로 설명했고, 냐베수도주식회사는 탁수가 남은 가구에 인력을 보내 배수 작업을 돕고 다음 고지서에서 요금을 차감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장면이 반복되면서 베트남 교민 가정에서도 필터샤워기는 필수품에 가까워졌다. 설치 첫날 하얗던 필터가 누렇게 변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커뮤니티에 올리는 일도 흔하다. 빨리 변색될수록 잘 걸러내는 제품이라는 인식도 여기서 나왔다.
그러나 변색 속도는 성능의 척도가 아니다. 유입 오염물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현상일 뿐이고, 포화된 필터는 더 이상 걸러내지 못한 채 색만 남긴다. 정작 확인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잔류염소는 ‘오염’이 아니라 ‘규정’
먼저 짚어야 할 것은 베트남 수돗물의 기준선이다. 지난해 7월 1일부터 보건부의 새 국가기술기준 QCVN 01-1:2024/BYT가 기존 2018년 기준을 대체해 시행 중이다. 이 기준의 A그룹(필수 통제 항목)은 대장균군과 E.coli 100mL당 불검출, 탁도 2NTU 이하, 색도 15TCU 이하, pH 6.0~8.5를 규정한다.
주목할 항목은 잔류염소다. 새 기준은 현장 측정 기준으로 유리잔류염소를 0.2~1.0mg/L 범위로 유지하도록 한다. 상한만이 아니라 하한이 있다는 뜻이다. 즉 수돗물에서 염소 냄새가 난다는 것은 소독 공정이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이지, 그 자체로 기준 위반이 아니다. 녹농균과 황색포도상구균은 B그룹 보충 항목에 들어 있다.
SAWACO는 사이공강 꾸찌 호아푸 펌프장과 동나이강 비엔호아 호아안 펌프장에서 원수를 끌어와 떤히엡·투득 정수장에서 처리한 뒤 시 전역에 공급한다. 수질 책임은 구간으로 나뉜다. 수도사업자가 책임지는 범위는 아파트 총계량기까지이고, 그 이후 단지 내부 배관과 저수조는 아파트 관리주체의 몫이다.

문제는 계량기 다음 구간
그렇다면 누런 물은 어디서 생기나. 정수장이 아니라 계량기 이후, 즉 단지 내 저수조와 배관이다.
호찌민시질병통제센터(HCDC)는 침전물이 쌓이는 것을 막기 위해 아파트 저수조를 6개월마다 주기적으로 배수하도록 하는 지침을 두고 있다. SAWACO와 HCDC는 지난 8월 공동으로 저수조와 배관의 정기 세척을 권고하면서, 수질 자가점검은 6개월에 1회 이상 실시하도록 안내했다.
▲ 베트남에서 사용한 샤워기 필터의 변색 상태. 겉면만으로는 내부 오염 정도를 알기 어렵다.
구조적 취약점도 지적된다. 쩐 낌 타익 SAWACO 수질관리센터장은 호찌민시 아파트 상당수가 저수조 뚜껑이 바닥면에 거의 붙어 있는 형태로 설계돼 있어, 침수가 발생하면 외부 오염수가 저수조로 유입될 위험이 매우 크다고 밝혔다. 우기 침수가 잦은 지역일수록 유의해야 한다는 의미다.
같은 건물에 살아도 세대마다, 이웃 단지끼리 필터 오염 속도가 다른 이유가 여기 있다. 필터가 보여주는 것은 도시 수돗물의 품질이 아니라 그 집 배관과 저수조의 상태에 가깝다.

제거율 표시를 검증하는 제도는 없다
여기서 소비자가 맞닥뜨리는 것이 표시·광고 문제다.
한국소비자원은 2021년 11월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욕실용 필터샤워기 20개 제품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전 제품이 판매 페이지에서 잔류염소 제거 효과를 내세우고 있었다. 실사용 환경을 반영해 시험한 결과 7개 제품(35%)은 잔류염소 제거율이 80%에 미치지 못했다. 이 중 6개는 성능을 확인할 근거 자료 없이 판매되고 있었다. 조사는 정수기 정수성능검사 방법을 준용했으며, 이 검사는 제거율 80% 이상이어야 정수성능이 있는 것으로 판정한다. 판매 페이지에 적힌 제거율이 실제 사용 환경의 성능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더 근본적인 문제도 드러났다. 수돗물과 접촉하는 수도용 자재·제품은 위생안전기준에 따라 KC인증을 받아야 하지만, 욕실용 필터샤워기는 수도용 제품인데도 인증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위생안전기준에는 제품 자체의 유해물질 용출 기준만 있을 뿐 필터 제품의 성능 기준이 없다. 소비자원은 환경부에 필터샤워기의 KC인증 의무화와 성능 기준 신설을 요청하겠다고 밝혔지만, 2024년 소비자단체가 같은 문제를 다시 제기한 시점까지도 관련 기준은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국제 기준도 소비자 기대와는 거리가 있다. 샤워필터를 다루는 유일한 독립 제3자 표준인 NSF/ANSI 177은 유입수 잔류염소 2.0mg/L를 최소 50% 이상 저감하고 그 성능을 제품 정격 수명 전 구간에서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다만 이 표준이 인증하는 것은 염소 저감과 구조·재질 안전성뿐이다. 샤워수는 음용수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므로 중금속이나 세균 제거는 시험·인증 대상이 아니다. “NSF 기준에 따라 시험했다”는 문구와 실제 인증 등재는 다른 얘기라는 점도 업계가 지적하는 대목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베트남의 QCVN 01-1:2024는 수도사업자가 수도꼭지까지 책임지는 기준이고, 가정에 설치하는 필터 기기의 성능을 규율하지 않는다. 한국에도 해당 성능 기준은 없다. 제거율을 어떤 조건에서 측정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업체가 제시하는 시험성적서뿐이며, 그 성적서의 시험 조건을 읽는 것은 소비자의 몫으로 남는다.

무엇을 확인해야 하나?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권하는 순서는 제품 비교보다 앞에 있다.
첫째, 관리사무소에 마지막 저수조 세척일을 묻는다. 6개월 주기가 지켜지지 않고 있다면 어떤 필터를 달아도 부담이 줄지 않는다.
둘째, 필터의 교체 주기 표기 방식을 본다. 개월 수로만 표기된 제품은 가족 수와 샤워 횟수에 따라 실제 수명이 크게 달라진다. 리터 단위 처리 용량이 적혀 있다면 자신의 사용량과 견줘볼 수 있다.
셋째, 시험성적서 실물을 요구한다. 어느 기관에서, 어떤 방법으로, 유입 농도는 얼마로 시험했는지가 적혀 있어야 의미가 있다.
넷째, 임대 주택이라면 타공 여부를 확인한다. 벽면 타공이 필요한 제품은 임대인 동의가 필요할 수 있고 이사 때 철거·재설치가 번거롭다.
다섯째, 설치일을 기록해두고 수압 변화를 함께 살핀다. 필터가 포화되면 수압이 먼저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대용량 필터 방식, 무엇이 다른가
이런 조건을 고려한 선택지로 업계가 제시하는 것이 대용량 필터 방식이다. 필터 부피가 커지면 처리할 수 있는 물의 양이 늘어 교체 주기를 길게 가져갈 수 있고, 같은 수질 조건에서 소형 필터보다 포화 시점이 늦다는 설명이다. 다만 본체가 커지는 만큼 설치 공간과 거치 방식은 미리 확인해야 한다.
호찌민 교민 시장에서도 Kwater 등 한국계 업체들이 이 방식의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유통되는 제품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대용량 필터를 적용한 Kwater 정수 샤워기
하나는 녹물과 잔류염소 제거에 초점을 맞춘 유형이다. 스틱형이나 소형 카본블록을 쓰는 일반 샤워기와 달리 용량이 큰 필터를 적용해 교체 주기를 길게 가져가도록 설계한다. 공급 업체들은 제품에 따라 최대 3만~4만 리터를 처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다른 하나는 멤브레인 소재를 적용한 유형으로
녹물과 잔류염소는 물론 중금속·미세플라스틱·미생물까지 여과 대상으로 삼는다. 업체들은 사용 가능 용량이 최대 3만~5만 리터라고 설명한다.
업체들에 따르면 베트남은 수돗물의 잔류염소 농도가 높은 편이다. 열대성 기후 탓에 정수장에서 세균 번식을 막으려고 염소를 많이 투입하는 데다, 배관이 길어 끝까지 소독 효과를 유지하려면 염소를 넉넉히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충분히 걸러내지 않은 물로 샤워하면 피부가 건조해져 가려움증이나 뾰루지 같은 피부 트러블을 겪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고 한다. 특히 피부가 민감한 어린이와 여성에게서 이런 증상이 잦다는 설명이다.
이 방식의 제품은 대부분 별도 공사나 타공 없이 직접 설치할 수 있어 이사할 때 떼어 내기도 간편하다. 임대 주택에 거주하는 비율이 높은 교민 가정의 사정을 고려한 구성이다.

다만 업체가 제시하는 처리 용량은 설계 기준값이다. 실제 사용 기간은 수질과 가족 수, 사용 습관에 따라 달라진다. 제거율 수치 역시 실험실 조건에서 측정한 값인 경우가 많다. 브랜드와 무관하게 구입 전 교체 필터의 가격과 공급 방식, 사후 관리 절차까지 확인해두는 것이 좋다.
가족이 매일 쓰는 물이다. 필터가 얼마나 빨리 갈색으로 변하는지는 흥미로운 장면이지만 판단 기준은 되지 못한다. 우리 집 저수조가 언제 청소됐는지, 이 필터가 몇 리터를 처리하도록 설계됐는지, 그 숫자를 뒷받침하는 문서가 있는지 – 확인할 수 있는 것부터 확인하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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