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국인은 잘 모르는 호찌민 도매유통의 중심지
호찌민에서 오래 산 한인이라면 푸미흥(Phu My Hung)의 저녁 회식 자리나 벤탄(Ben Thanh) 시장의 흥정은 익숙하게 떠올린다. 그러나 10군에 소재한 새벽 꽃시장의 풍경을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가 ‘베트남 상권을 안다’고 말할 때, 그 앎은 대개 한인의 동선이 닿는 곳에서 멈춘다. 이번호에서 찾아간 옛 10군(Quan 10)은 그 동선 바깥에 있다.
외국인 거주자도, 관광객도 드문 이 평범한 내륙 동네에 베트남 내수의 민낯이 가장 정직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베트남 시장’ 이라 부르던 것
먼저 익숙한 좌표부터 짚자. 푸미흥은 한인 자본이 한인을 위해 만든, 사실상 한인용 상권이다.
벤탄 시장은 관광객의 흥정 무대이고, 동코이(Đồng Khởi)의 명품관과 1군 대형몰은 외국인과 베트남 상류층을 겨냥한다. 가격은 외국인 기준으로 매겨지고, 간판은 외국어를 의식하며, 동선은 방문객 편의를 따라 설계됐다. 베트남 안에 있되 베트남을 향하지 않은 공간들이다.

10군은 정반대다. 1·3·5·11군과 떤빈(Tân Bình)군에 둘러싸인 이 내륙 한복판은 강이나 운하 같은 경계선 없이 군 전체가 빈틈없는 시가지로 채워졌다. 면적은 약 5.7㎢에 불과하지만 2018년 기준 인구가 약 39만 9000명, 인구밀도는 ㎢당 약 6만 9800명으로 호찌민 최상위권이다. 외부 자본의 거품도, 관광이 끌어올린 호가도 끼어들 여지가 적다. 한인이 모르는 이 동네 안에서, 성격이 전혀 다른 세 시장이 각기 다른 베트남을 증언한다.

버려진 것에서 값을 길어내는 골목 ― 녓따오
오전 9시, 응우옌낌(Nguyễn Kim) 거리의 셔터가 하나둘 올라간다. 좌판 위에는 뜯어낸 회로기판, 색이 바랜 리모컨, 정체불명의 케이블 뭉치가 산처럼 쌓여 있다. 녓따오(Nhật Tảo) 전자시장이다. 전자공학과 학생과 수리 기술자들에게는 ‘없는 부품이 없는 천국’으로 통하는 이곳은, 1987년 부품 행상 수십 명이 빈터에 모여든 노천시장(chợ trời)에서 출발했다. 쪼그려 앉아 판다 해서 ‘쪼홈호(chợ chồm hổm)’로도 불렸다.
이 시장의 진짜 정체는 거래 품목이 아니라 작동 원리에 있다. 옛 10군과 11군 경계에 걸친 이 일대는 중고 전자제품과 폐기 기계의 비공식 순환경제로 유명하다. 도시에서, 또 고소득 국가에서 버려진 전자폐기물이 이곳으로 흘러들고, 주로 노동계층과 이주민인 주민들이 이를 분해·수리·재판매하며 가치를 회수한다. 버려진 기계에서 부품을 살려 새 기기를 만들고 고장 난 가전을 되살리는 기술자들이 골목마다 포진해 있다. ‘쓸모없는 물건’에서 값어치를 끌어내는 이 노동은 세대를 이어 전수되며 안정적 생계가 되어 왔다. 에이온몰의 가전 매장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그러나 베트남 서민경제를 떠받치는 실핏줄이다.
오랫동안 행정의 틀 밖에 있던 이 시장에 2024년 변화가 찾아왔다. 7방(Phường 7) 인민위원회가 1년간의 정비 끝에 호찌민 최초의 ‘전자·가전 전문 거리(Phố chuyên doanh điện máy, điện tử Nhật Tảo)’를 출범시켰다. 녓따오·빈비엔(Vĩnh Viễn)·응우옌낌 거리에 걸쳐 258개 사업가구가 영업하며, 당국은 무현금 결제와 CCTV 설치를 유도했다. 시장의 중심은 응우옌낌 거리의 A동·B동 빌딩으로, A동은 부품 점포가, B동은 스피커·앰프 같은 음향기기가 밀집해 있다. 응우옌낌 아파트 1층의 ‘녓따오 상가(Thương xá Nhật Tảo)’는 1600㎡ 넘는 공간에 약 100개 키오스크를 들였고, 임대료는 키오스크당 월 650만 동부터로 5년간 고정 조건이다. 쪼그려 앉아 흥정하던 노천 시장이 제도권 상가로 옷을 갈아입는 과정이, 외국인의 시야 밖에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새벽을 지배하는 꽃과 밤을 채우는 먹거리 ― 호티키
다시 새벽의 호티키(Hồ Thị Kỷ)로 돌아가자. ‘사이공 속 작은 달랏(tiểu Đà Lạt)’으로 불리는 이곳은 호찌민 최대 꽃 도매시장이다. 24시간 멈추지 않으며, 약 40년 역사에 110여 개 사업가구가 달랏과 메콩 삼각주에서 올라온 생화를 취급한다. 가장 분주한 시간대는 새벽 2시부터 8시. 결혼식과 장례식을 위한 꽃이 이 시간에 대량으로 손을 바꾼다. 1980년 상인 10여 명이 꽃을 팔기 시작해 1987년 현 위치에 정식으로 자리 잡았다.

해가 지면 같은 골목의 표정이 바뀐다. 꽃시장과 평행하게 뻗은 골목은 100여 개 노점이 늘어선 먹거리 거리로 변신한다. 오후 3시부터 밤 11시까지, 1인분 1만~5만 동의 가격에 베트남 길거리 음식이 쏟아진다. 새벽의 꽃 도매와 야간의 먹거리가 시간대를 나눠 한 공간을 교대로 차지하는 이중 구조다. 최근 이 골목은 젊은 층의 ‘SNS 명소’로 떠올랐지만, 인스타그램 사진 너머의 진짜 정체는 도매가 새벽을 지배하는 베트남 유통의 모세혈관이다. 수백 명의 상인에게 일자리를 주고, 도시민의 경조사와 저녁 식탁을 동시에 책임지는 이 시장이야말로, 화려한 관광 시장이 보여주지 못하는 베트남 일상의 기반이다.

중산층은 이미 브랜드로 갈아탔다 ― 수반한
같은 옛 10군 안에서도 수반한(Sư Vạn Hạnh) 거리의 풍경은 전혀 다르다. 오후 6시, 퇴근하고 하교한 젊은이들이 노래방과 카페, 패션 점포가 빽빽한 거리로 쏟아진다. ’10군의 엔터테인먼트 천국’으로 불리는 이 거리의 앵커는 2018년 문을 연 수반한 몰(Vạn Hạnh Mall)이다. 지하 1층 포함 8층 규모로, 지하의 꿉엑스트라(Co.opXtra) 마트는 5만 개 넘는 품목을, 1~3층은 유니클로·나이키·리바이스 등 브랜드 200여 개를, 5~6층은 51개 식당을 들였다. 주 고객은 18~45세 지역 주민, 그중에서도 가처분소득이 늘고 있는 중간소득 가정과 젊은 직장인이다.

녓따오에서 도보 거리에 있는 이 몰의 실적은, 한인이 흔히 놓치는 사실 하나를 숫자로 보여준다. 2025년 2분기 기준 호찌민 리테일 전체 공실률이 약 6.4%인 가운데, 수반한 몰은 100% 점유율로 시 평균을 크게 웃돌았다. 비중심부 임대료가 ㎡당 월 40~50달러로 도심 업무지구(CBD)의 53달러보다 낮은 점이 중급 리테일러를 끌어들이고, 2025년 3분기에는 중국 캐릭터 완구 브랜드 팝마트(Pop Mart)가 이곳에 플래그십 매장을 열었다. 도심 한복판이 아닌 옛 10군의 비중심 상권이 신규 브랜드의 테스트베드로 작동하는 것이다. ‘베트남 중산층은 아직 길거리 시장에 머문다’고 여기는 동안, 정작 그 중산층은 자기 동네 몰에서 글로벌 브랜드를 사고 있었다.

한 동네에 쌓인 세 개의 베트남
녓따오, 호티키, 수반한. 도보 거리로 묶이는 이 세 시장은 버려진 전자제품으로 생계를 잇는 비공식 순환경제, 새벽 도매로 굴러가는 전통 시장, 글로벌 브랜드를 소비하는 중산층 공간을 반경 수백 미터 안에 압축한다. 베트남 경제가 거쳐 왔고 지금도 동시에 통과하는 발전 단계들이, 한 동네에 지층처럼 쌓여 있는 셈이다.
푸미흥의 한국 식당과 벤탄의 기념품 좌판이 가짜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베트남 안의 외국인 무대였지, 베트남 내수의 본류는 아니었다. 사이공의 진짜 시장은 어디에 있는가. 그 답은 화려한 1군이 아니라, 한인의 동선이 한 번도 닿은 적 없는 이 평범한 골목 끝에 있다. 카메라를 들고 다시 찾아야 할 이유가, 그래서 충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