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거와 마주치는 노력과 용기 –
가끔 ‘지금 난 왜 이렇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나폴레옹은 ‘오늘의 불행은 언젠가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51세의 나이로 남대서양의 외딴섬 ‘세인트 헬레나’에서 쓸쓸히 죽어간 나폴레옹도 그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을 피하지 못함으로써 이 말의 가치를 몸소 증명해 주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란 것이 차곡차곡 쌓인 과거의 결과물이고, 그 과거에 현재를 더해 미래가 만들어진다는 간단한 방정식을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여러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실마리를 얻습니다. ‘지금의 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동적’으로 움직입니다.
소위 ‘습관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죠. 단골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고, 좋아하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사며, 좋아하는 장르의 영화를 봅니다. 회사에서 보고서를 쓸 때는 종종 같은 실수를 하고, 어떤 타입의 사람을 만나면 ‘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어떤 타입의 사람을 만나면 ‘답답한 사람’이 됩니다. 문득 옛 연인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이 갖고 있는 ‘어떤 공통점’에 깜짝 놀랍니다. 나는 ‘첫눈에 반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 무의식 속에 있는 ‘무언가’가 나를 그들에게 끌리게 만들었던거죠. 또한, 유독 ‘개’를 무서워한다거나, ‘벌레’, ‘쥐’를 보면 주변에 사람이 있건 말건 소리를 치고, 그림 그리는게 싫다거나, 알레르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떤 음식을 안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잘못된 습관’을 고치기 위해 다짐을 하며, ‘의지’의 힘을 빌리는데, 우리 모두 알다시피 우리의 의지는 생각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당장, 올해 1월에 세웠던 다이어트, 운동, 금연, 독서 등 자신이 불과 3개월전에 세웠던 목표를 생각해 보십시요. 무언가를 습관적으로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무의식적으로 한다’는 것이고, 그 습관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망각이라는 보자기를 들춰서 그 원인과 마주쳐야 합니다. 그 원인을 대면했을때 우리는 나도 모르는 내 습관의 뿌리를 만나, 진정한 변화, 해방, 때로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2017)>란 책은 ‘트라우마 : 정신적 외상’에 대한 소설이며, 트라우마가 한 인간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트라우마와 마주치는 노력과 용기가 어떻게 한 인간의 삶을 자유롭게하고, 한단계 더 높은 삶을 살게해 줄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소설입니다. 이야기는 매우 단조롭고 한정된 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 갓 이혼한 30대 중반의 초상화가가, 친구의 아버지가 살던 외딴집에 살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 집은 일본화 화가로서 명성을 갖고 있던 친구의 아버지가 개인 화실이자 세상 및 가족으로부터 떨어진 은둔처로서 사용하던 집인데, 친구는 빈집을 안전하게 지켜줄 믿을만한 이가 필요했고, 주인공은 이혼한 아내와의 기억이 있는 자신의 집에 머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서로간의 필요가 맞아 떨어져 주인공은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일상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이집에서 친구 아버지가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이 집의 다락에 ‘봉인’해 놓았던 최고의 걸작 ‘기사단장 죽이기’란 그림과 밤마다 기이한 방울소리가 들려오던 ‘봉인’된 구덩이를 발견함으로 이상한 일들에 휩싸이게 됩니다. 상처 입은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시작한 은둔 생활에서 오히려 그는 내면 세계의 위태로운 균열을 맞게 됩니다.
엄청난 명성에 비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많지 않은 유명화가인 친구의 아버지, 미술을 전공하였으나 미술가가 되기엔 부족했던 재능 때문에 광고회사의 디자이너로 일하는 친구, 스스로 이룬 부로 인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으나 다른 사람의 부인이 된 후, 세상을 일찍 떠난 옛연인을 잊지 못하는 이웃 남자 등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나 나름대로 충분히 삐뚤어진 내면을 갖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등장인물들이 얼키고 설키면서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자신의 내면을 탐색할 기회를 줍니다.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 브랜드 소설이므로 재미와 긴장감은 보장됩니다. 한번 손을 잡으면 밤을 세워 읽게 되는 하루키 소설의 무서운 흡입력을 이 작품도 갖고 있습니다. 문학 비평적 관점에서 하루키 소설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나, 등장 인물들의 매력 포인트에 대해 쓰고 싶은 말이 많아 손가락이 근질거리지만, 이 컬럼의 취지를 벗어나는 영역이라는 생각에 소설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고, 여러분들께 직접 한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머리속에 ‘좋은 기억’이라는 보물창고와 ‘ 나쁜 기억’이라는 수리센터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생물이 ‘뭉쳐야 산다’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인생이 ‘어린이, 학생, 사회인, 은퇴자’라는 각 단계에 맞춰 효율적인 현재와 밝은 미래를 위해 리셋과 재부팅, 때때로 하드 디스크 포맷까지 반복하다 보니, 역설적이게도 각자가 갖고 있는 보물창고와, 수리센터를 이용하기는 커녕 그 존재조차 망각해 버리는 경우가 생겨버렸습니다. 온동네를 뛰며 즐거워했던 달리기 소년이, 이제는 ‘내가 이몸으로 무슨 달리기야’라며 곳곳에 보이는 러너들에게서 애써 시선을 외면하는 중년 아저씨가 되고, 모임에서 앞장서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던 일꾼이 사람들에게 상처 받아, 아예 모임에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고, 그를 사랑하며 행복했던 아가씨가 ‘사랑은 개뿔’ 이라며 자녀에게서만 행복을 찾는 아줌마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빛나던 소년이 빛바랜 아저씨가 되고, 컬러풀하고 향기롭던 소녀가 무채색의 아줌마가 될 수 있는 것이 인생이고, 그 반대도 가능한 것이 인생입니다. 나이가 들어 주변을 보면, 옛날에 반장, 일등 했던 친구들보다 잘나가는 ‘의외의 친구’을 곧잘 보게 되고, 잘 나가다가도 어떤 ‘불운’에 의해 동정의 대상이 되는 친구들도 보게 됩니다. 골프장에서 자주쓰는 ‘끝날때까지 끝난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인생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할 것 같습니다.
지금 만약 어떤 일로 자신감을 잃었다면 잠깐 시간을 멈추고 ‘자신이 가장 빛나고, 컬러풀 했고, 향기롭던 시절’을 돌아보며 자신의 장점과 특기를 되찾기 바랍니다. 지금 만약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면 조금 아프더라도 자신의 반복됐던 실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약점, 생각하기도 싫은 상처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노력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아마 거기서부터 진정한 변화와 해방, 구원이 시작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보물 창고로 가는 지도와 수리센터의 문을 여는 열쇄가 필요하신 분께 그 안내자로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소개하고, 이 책 <기사단장 죽이기>의 일독을 권합니다.
장연 – 칼럼리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