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요한 자리일수록, 공간이 말한다
호찌민에 산 지 몇 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연중 식지 않는 열기도, 오토바이 물결도 어느 정도는 몸에 밴다. 그러나 퇴근길 어느 저녁, 문득 밀려오는 국물 생각만큼은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는다.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는 해장국 소리, 흰 쌀밥 위로 올라오는 김, 얼큰하고 구수한 국물 한 모금에 몸속 어딘가가 탁 풀리던 그 감각. 이국 땅에서 일하고 생활하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 맛을 그리워하는 순간이 있다.
호찌민 7군 푸미흥(Phu My Hung)은 베트남 최대의 한인 밀집 거주지다. 한국 학교와 한국계 마트, 한국어 간판이 즐비한 이 동네에는 수만 명의 교민과 주재원, 유학생, 장기 여행자들이 뒤섞여 산다. 이들의 식탁 위에는 쌀국수와 반미(Banh Mi)도 있지만, 긴 하루의 끝에 진짜 위로가 되는 것은 역시 제대로 된 한식 한 그릇이다. 그 역할을 묵묵히 해 온 집이 있다. 7군 한복판에 자리 잡은 한식당 ‘미각(Migac Korean Restaurant)’이다.
상호에 담긴 이야기를 먼저 꺼낼 필요가 있다. 이전 상호명 ‘미각 더국밥’에서 ‘더국밥’은 단순히 국밥을 파는 집이라는 뜻이 아니다. ‘국가대표 밥집’을 압축한 표현으로, 처음부터 호찌민 한인 사회의 대표 한식 공간을 지향해 온 이 식당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 현재는 간판을 ‘미각’으로 바꾸고 보다 폭넓은 한식 전문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굳혀 가고 있다.
반찬이 이렇게 많아도 되나
한식당이라는 이름 앞에서 단출한 백반집을 상상하기 쉽다. 실제로 문을 열고 들어서면 깔끔하게 정돈된 인테리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미각이 처음부터 단순한 동네 밥집을 지향한 것은 아니다. 공간 규모부터가 다르다.
탁 트인 홀은 대규모 단체 손님을 소화하기에 충분하고, 별도의 개별 룸은 소규모 모임과 비즈니스 식사를 위한 공간으로 따로 구획되어 있다. 푸미흥에서 한국 교민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자리, 즉 부서 회식, 거래처 접대, 지인들과의 사적인 모임까지 한 지붕 아래서 모두 소화할 수 있는 구조다. 미각이 단순히 끼니를 때우는 식당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은, 이 넓은 공간 구성 자체에서 이미 드러난다.

▲ 홀 사진, 공간이 무지 넓다
개별 룸은 사전 예약을 통해 이용할 수 있다. 창가 쪽에 자리가 잡혀 있어 바깥 거리 풍경을 바라보며 식사할 수 있고, 룸 안에는 전용 화장실도 갖춰져 있어 자리를 벗어날 필요 없이 오롯이 모임에 집중할 수 있다. 조용하고 사적인 공간이지만 답답하거나 폐쇄적인 느낌은 없다.
접대 자리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인 소음 차단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점도 이 룸의 덕목이다. “미리 예약하면 룸도 잡을 수 있어서 접대하기도 좋다”는 단골의 말은 단순한 추천이 아니라, 이 공간이 이미 교민 사회의 비즈니스 식사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 고급스럽게 꾸며진 개별룸 사진, 인스타그램 발췌
자리에 앉으면 가장 먼저 반찬이 펼쳐진다. 오이지, 파김치, 배추김치, 깍두기, 동그랑떡, 우렁초무침 등 그날그날 구성이 조금씩 다르지만, 항상 손이 많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차림새다. 반찬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용히 채워 주는 직원들의 손놀림도 인상적이다. 요청을 굳이 하지 않아도 먼저 알아채고 가져다준다는 후기가 여럿 쌓여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 반찬이 작지만 적당한 양으로 6찬이나 나온다
소고기 무국 한 그릇, 맑고 깊은 것의 차이
이날 나는 경상도식 소고기 무국을 주문했다. 단정한 탕기에 담겨 나왔는데, 국물 색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첫 숟가락을 들었다. 심심할 것 같다는 예상과 달리 국물이 묵직했다. 간이 과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감칠맛이 혀에 남았다.
19만 동 수준의 가격에 이 정도 완성도면, 서울 어느 골목 한식당과 견줘도 밀리지 않겠다 싶었다.

▲본기자가 먹은 소고기 무국
밀면도 이 집의 간판 메뉴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초창기에는 밀면을 팔지 않다가 손님들의 요청이 이어지면서 메뉴에 추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쫄깃한 면발과 깔끔한 육수의 조합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많지만, 살얼음이 지나치게 많거나 육수가 다소 은은하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냉면과 밀면 모두 개인 기호에 따라 편차가 크게 느껴질 수 있는 메뉴인 만큼, 짙은 국물보다 시원하고 가벼운 맛을 선호하는 사람에게 더 잘 맞을 것이다.

낙곱새에서 장어까지, 한식의 폭을 넓히다
미각이 단순한 국밥 전문점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낙곱새’ 메뉴가 등장하면서부터 분명해졌다. 낙지와 곱창, 새우를 함께 볶아내는 이 요리는 부산식 술자리 음식으로, 국물 메뉴와는 전혀 다른 결의 음식이다. 모임 자리를 겨냥한 포석이기도 하다. 여럿이 둘러앉아 소주를 기울일 때, 뜨겁게 볶아 나오는 낙곱새 한 접시는 특유의 강렬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회식 자리에서 국밥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수요를 이 메뉴가 메워 준다.
가게 측이 대창을 사용한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손님 중 한 명이 곱창 식감이 다르다고 지적하자, 주인은 “찐 부산 스타일은 대창”이라며 재료 선택의 이유를 설명하는 답글을 달았다. 이 집이 단순히 교민 수요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을 유지하며 운영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 대목이다. 차돌삼합 역시 두 명이 먹기에 양이 넉넉하고 상태가 좋다는 평이 꾸준하다.

얼마 전에는 장어까지 선보여 “베트남에서 장어라니 진짜 대박”이라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메뉴의 폭을 넓힐수록 모임 장소로서의 가치도 함께 높아진다. 국물 요리를 선호하는 사람도, 고기 요리를 즐기는 사람도, 면 요리가 당기는 사람도 각자 원하는 것을 고를 수 있는 메뉴판은 자리를 잡는 사람 모두의 부담을 덜어 준다.
술자리 메뉴로 보자면 삼겹살 수육도 빠질 수 없다. 비계와 살코기 비율이 균형 잡혀 있고 부드럽게 씹힌다는 평이 많다. 다양한 양념장이 함께 나와 개인 입맛에 맞게 조합해 먹을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퇴근 후 소맥 한 잔에 수육 한 접시, 얼큰한 국물로 마무리하는 저녁 코스가 이 집에서는 자연스럽게 완성된다.

디테일이 만드는 단골
미각이 교민 사회에서 꾸준히 입소문을 탄 데에는 음식 외의 요소들도 한몫하고 있다. 우선 직원 구성이다. 직원 중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가 있어, 언어 장벽 없이 편안하게 주문하고 소통할 수 있다. 베트남에서 한국 식당을 찾을 때 언어 문제로 불편함을 겪은 적 있는 교민들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된다. 단체 모임 자리에서 메뉴 설명과 추가 주문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려면 직원과의 소통이 원활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집의 한국어 가능 직원은 단순한 서비스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식사 후 서비스로 제공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빼놓을 수 없다. 테이크아웃 잔에 담겨 조용히 나오는 커피 한 잔이 식사의 마무리를 깔끔하게 정리해 준다. 거창한 디저트가 아니지만, 이 작은 배려가 기억에 남는다. “다 먹고 나면 아메도 한 잔씩 주네요”라는 반응은 한두 번이 아니다. 모임이 끝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 커피 한 잔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면, 대화는 자연스럽게 조금 더 이어진다. 사소하지만 영리한 마무리다.

대화가 필요한 자리에는, 미각이 있습니다
“호찌민 사는 한국인들의 향수병을 치료해 주는 곳.” 한 방문객이 남긴 이 표현이 이 집의 성격을 가장 잘 요약한다. 베트남 장기 출장 때마다 계속 찾는다는 사람, 여행 4일 중 이틀 연속 방문했다는 사람, 배달로도 종종 시켜 먹는다는 사람, 아침 해장부터 저녁 소맥까지 시간대를 가리지 않고 찾는다는 사람들이 리뷰를 채우고 있다.
그러나 미각의 야심은 단순히 향수를 달래주는 동네 국밥집에 그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넓은 홀과 예약 가능한 개별 룸, 다양한 메뉴 구성과 한국어 소통이 가능한 직원, 그리고 모임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불편하지 않게 만들어 주는 공간의 여유. 이 모든 요소는 혼자 찾아오는 손님뿐만 아니라 단체로 움직이는 교민 커뮤니티의 수요를 함께 겨냥하고 있다. 법인 회식, 동호회 모임, 신규 주재원 환영 자리, 한국에서 온 출장자 접대까지, 푸미흥에서 한국인들이 모여야 하는 이유는 늘 있고, 미각 더국밥은 그 자리 중 하나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있다.
완벽한 집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집이 7군 교민 사회에서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분명하다. 깔끔한 공간, 성실한 반찬, 신뢰할 수 있는 음식 맛, 그리고 손님의 말에 귀 기울이는 주인. 화려하지 않지만 매일 돌아가고 싶은 한식당이,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싶은 자리가 갖춰야 할 것들을 이 집은 대부분 갖추고 있다.
호찌민의 열기 속에서 제대로 된 한식이 간절해지는 날이 있다면, 혹은 누군가를 모아야 하는 자리를 찾고 있다면, 푸미흥으로 가면 된다. 미각의 뚝배기 안에는 고향의 온도가, 그 넓은 공간 안에는 사람을 모으는 힘이 담겨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