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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넘어 라이프스타일이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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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러닝 열풍, 그 이면을 파헤치다
금요일 밤 9시.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치킨과 맥주를 앞에 두고 일주일의 피로를 달래고 있을 시간, 서울 여의도공원에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영하 6도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60여 명의 20-30대가 얇은 러닝복 차림으로 몸을 풀고 있는 것이다. 한때 ‘헬스장 가야지’ 하던 시대는 갔다. 이제는 ‘뛰어야지’다. 네이버에서 ‘러닝’을 검색하면 341만 개, ‘런스타그램’을 검색하면 114만 개의 게시물이 쏟아진다. 웬만한 아이돌 팬덤보다 활발한 수치다. 그런데 이 열풍, 진짜 지속될까? 10년 전 요가 열풍도, 코로나 시기 골프 열풍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는데 말이다. 하지만 러닝은 뭔가 다르다.
“러닝하는 사람 vs 안 하는 사람” 새로운 구분법의 탄생
글로벌 러닝화 브랜드 HOKA의 한국 마케팅본부장은 업계 관계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러닝 열풍이 앞으로도 계속될까요?”라고 밝혔다. 그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혹시 최근에 러닝 해보셨나요?”라고 되묻는다고 했다. 그가 러닝 업계에서 근무하며 발견한 특이한 점은 “러닝을 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보는 기준이 ‘뛰는가? 안 뛰는가?’로 구분한다”는 것이었다. 이전 스포츠 브랜드에서 근무할 때는 사람들을 ‘등산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혹은 ‘캠핑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로 구분짓지 않았는데, 러닝계의 이런 관점은 충분히 독특한 경험이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익명성과 소속감의 절묘한 조화
MZ세대가 러닝에 빠져드는 첫 번째 이유는 이 운동이 가진 독특한 특성 때문이다. 러닝은 ‘매우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으로 연결 가능한’ 운동이다. 요즘 사람들은 운동을 하면서도 남과 직접적인 경쟁보다는 각자의 방식으로 즐기고 싶어 한다. 특히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는 익명성을 기반으로 한 크루 문화에 익숙하다. 러닝 크루는 친구나 직장 동료가 아닌, SNS나 러닝 플랫폼을 통해 ‘느슨한 관계’로 형성된다.
오프라인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뛰더라도, 깊이 얽히지 않고 각자의 속도로 달리면 된다. 이러한 개인적인 운동이면서도 가볍게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크루 문화가 러닝의 지속적인 인기를 이끄는 핵심 요소다.
브랜드가 운영하는 크루뿐만 아니라, 지역 러너들이 직접 만든 소규모 크루도 증가하고 있으며, 이들은 단순히 운동하는 공간을 넘어 스타일과 문화를 공유하는 장으로 확장되고 있다. 서울 대표 러닝 크루 중 하나인 ‘WAUSAN30(와우산 30)’ 크루 같은 곳들이 대표적이다.
‘러닝코어’ 패션의 부상, 스포츠에 스타일을 더하다
러닝 열풍의 두 번째 동력은 바로 ‘러닝코어(Running Core)’ 패션의 등장이다. 최근 러닝 패션이 하나의 독립적인 스타일로 자리 잡으면서 새로운 개념이 떠오르고 있다. 러닝코어는 단순히 운동복이 아닌, 패션과 기능성을 결합한 스타일리시한 러닝 룩을 의미한다. 나이키, 아디다스뿐만 아니라 HOKA, ON 같은 러닝 전문 브랜드들도 디자인에 더욱 신경 쓰면서, 러닝화가 단순한 스포츠 용품을 넘어 일상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잡고 있다.
HOKA의 맥시멀 쿠셔닝 슈즈인 BONDI 시리즈나 살로몬의 트레일 러닝화 XT6는 러너들뿐만 아니라 패션 피플들에게도 인기 있는 아이템이 됐다. NORDA와 SATISFY 등의 프리미엄 러닝 브랜드 역시 지속 성장하고 있다. 스트리트 패션과 스포츠웨어가 결합하는 트렌드 속에서 러닝코어 스타일은 계속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잘 뛰기 위해”가 아니라 “멋있게 뛰기 위해” 러닝을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러닝 시장의 지속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데이터 기반 성취감
러닝이 MZ세대에게 특별히 어필하는 세 번째 이유는 바로 ‘측정 가능한 성취감’이다. 애플워치, 가민 등 웨어러블 기기와 Strava, 나이키 런클럽 같은 러닝 앱의 발달로 자신의 운동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추적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됐다. 러닝은 거리를 정해놓고 하는 운동 특성상 동일 거리를 몇 분 내에 주파했는지 비교가 매우 쉽다. 헬스장에서의 운동보다 기록 비교가 훨씬 직관적이고, 실력 향상을 눈으로 확인하기 좋다.
더 나아가 점점 빨라지는 기록은 운동 시간 단축으로도 이어진다. 동일한 5km를 뛰더라도 처음보다 적은 시간에 완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면 할수록 점점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동일한 자극을 얻게 되는 헬스 같은 운동과는 완전히 반대다.
코로나가 가속화한 비대면 운동 문화
코로나19 팬데믹은 러닝 붐에 결정적인 촉매제 역할을 했다. 실내 운동시설 이용이 제한되면서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야외 운동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러닝은 별도의 장비나 장소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쉽게 시작할 수 있어 대중적으로 사랑받기 시작했다.
특히 건강과 체력 증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비대면 활동이 선호되는 상황에서 러닝은 최적의 운동으로 떠올랐다. 정신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현대 사회에서 러닝은 단순한 신체 운동을 넘어 마음을 정리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치유의 시간’으로도 자리잡았다.
일정한 리듬으로 달리면서 명상과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어, 러닝을 통해 심신의 안정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현대인들의 바쁜 일상 속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정신 건강을 관리하는 수단으로 러닝이 각광받는 이유다.
확장되는 러닝 생태계, 단순한 유행을 넘어서
러닝 열풍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장 큰 이유는 러닝 시장의 다변화다. 이제 러닝은 단순한 도로 위의 운동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 달리는 트레일 러닝, 수영과 사이클이 결합된 철인 3종 경기, Strava 같은 가상 러닝 플랫폼까지 다양한 형태로 확장되고 있다.
트레일 러닝은 기존의 도로 러닝과는 다른 매력을 제공한다. 산과 숲을 달리면서 자연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운동을 넘어 힐링과 모험 요소가 결합된 스포츠로 성장하고 있다. SALOMON, HOKA와 같은 브랜드들도 트레일 러닝 브랜드로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산악 지형을 고려하면 로드러닝에서 트레일 러닝으로의 발전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세계 트레일 러닝 성지라 불리는 UTMB (Ultra Trail Mont Blanc) 같은 대회에 도전하는 국내 러너들도 늘어나고 있다.
철인 3종 경기 역시 흥미로운 시장이다. 러닝을 하던 사람들이 더 큰 도전을 찾으면서 철인 3종 경기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작년 최고 예능 중 하나였던 tvN의 ‘무쇠소녀단’은 최고시청률 3.57%를 달성하며 대중에게 낯설었던 철인 3종 경기에 대한 친숙함을 전달했다.
라이프스타일이 된 러닝, “선택이 아닌 필수”
러닝 열풍은 단순한 운동 트렌드를 넘어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정착하고 있다. 골프나 테니스처럼 특정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 크루 문화와 러닝코어 트렌드, 그리고 확장된 러닝 형태들이 결합하면서 러닝은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이 됐다.
러닝을 단순한 체력 단련이 아닌, 개인의 스타일과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실제로 러너들 사이에서는 “뛰는 사람과 뛰지 않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구분법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앞으로도 러닝 시장은 단순한 운동을 넘어 패션, 기술, 커뮤니티가 결합된 더욱 다채로운 형태로 진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3월이 다가오는 지금, 아직 러닝의 매력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이번이야말로 도전해볼 때다. 러너들에게 있어 사람을 보는 기준은 ‘러닝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뉜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기준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