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가 먹자골목에 비친 베트남 소비의 진짜 얼굴
해가 지면 호찌민시 옛 빈타인(Bình Thạnh)군의 응우옌자찌(Nguyễn Gia Trí) 거리가 깨어난다. 오후 6시를 넘기면 오토바이가 인도 턱까지 들어차고 식당 간판에 하나둘 불이 켜진다. 분더우(bún đậu) 집 앞에 대학생 무리가 모이고, 돌판 위에서는 소시지가 지글댄다. 몇 걸음 옆에는 통유리로 마감한 체인 카페가 서 있고, 그 맞은편 골목 어귀에서는 수레 노점이 2만 동짜리 간식을 판다.
현지 젊은이들은 이곳을 ‘밤의 먹자골목’이라고 부른다. 부동산 업계는 ‘빈타인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라는 수식어를 붙여 점포를 내놓는다. 한쪽에서는 한 끼 2만~3만 동을 두고 지갑을 열고 닫는 학생들이 줄을 서고, 다른 쪽에서는 월 1억 동이 넘는 임대료를 감당할 브랜드를 찾는 매물 광고가 붙는다. 거리 하나에 베트남 내수 시장의 양 끝이 함께 들어와 있는 셈이다.
베트남 내수는 흔히 숫자로 이야기된다. 대형 쇼핑몰 개점, 커피 체인의 매장 수, 수백조 동 규모의 외식 시장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그 숫자를 실제로 채우는 소비자가 어떤 얼굴인지는 이런 거리에서 더 잘 보인다. 응우옌자찌 거리가 ‘내수 격전지’라 불릴 만한 이유를 따라가 보면, 베트남 소비의 진짜 모습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낸다.


골목 어귀의 노점 수레와 줄 선 대학생들
‘D2’ 라는 번호에서 시작된 거리
이 거리는 원래 이름이 없었다. 옛 25동 일대 도로는 D1·D2·D3·D5처럼 번호로 불렸고, 지금의 응우옌자찌 거리는 ‘D2’ 였다. 호찌민시는 2018년 결정 1819호로 이 일대 도로에 정식 이름을 붙였다. 이때 디엔비엔푸(Điện Biên Phủ) 대로에서 웅반키엠(Ung Văn Khiêm) 거리까지 이어지는 D2 구간은 응우옌자찌로, D1은 응우옌반트엉(Nguyễn Văn Thương)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부동산 매물에 ‘옛 D2(D2 cũ)’라는 표기가 꼬리처럼 따라붙는 이유다. 2025년 행정 개편으로 군(郡) 단위가 사라지면서 이 일대는 타인미떠이(Thạnh Mỹ Tây)동이 됐다.

디엔비엔푸 (Đường Biên Phủ)

웅반키엠(Ung Văn Khiêm)
입지는 처음부터 남달랐다. 옛 25동은 디엔비엔푸, 쏘비엣응에띤(Xô Viết Nghệ Tĩnh), 웅반키엠 등 호찌민에서 가장 붐비는 간선도로들에 세 면이 둘러싸여 있다. 큰길에서는 쉽게 들어올 수 있지만, 정작 거리 자체는 대로의 소음과 교통에서 한 발 비켜나 있다. 사람이 모이기 좋은 ‘안쪽 상권’의 조건을 갖춘 것이다.
행정 계획도 이 흐름을 뒷받침했다. 빈타인군은 184.2ha 규모의 25동 1/2000 상세계획을 승인하면서 디엔비엔푸·웅반키엠·쏘비엣응에띤과 함께 D2 축을 ‘혼합 주거지’로 지정했다. 필지를 합쳐 고층 건물을 짓는 것도 장려했다. 조용한 주택가가 상업 거리로 바뀔 수 있는 길이 이때 제도적으로 열린 셈이다.
이 거리에도 다른 시절이 있었다. 한때 D2·D5 일대는 접대부를 둔 식당들이 늘어선 곳으로 현지 언론에 오르내렸다. 그 거리를 지금의 모습으로 바꾼 것은 결국 사람, 그중에서도 대학생이었다.
대학 캠퍼스가 만든 ‘고정 수요’
응우옌자찌 거리 반경에는 대학이 촘촘히 모여 있다. 1993년 문을 연 외상대학교(Đại học Ngoại thương) 제2캠퍼스가 D5 도로에 있고, 교통운수대학교는 옛 D3 도로인 보오아인(Võ Oanh) 거리에 있다. 디엔비엔푸 대로를 따라서는 HUTECH(호찌민기술대)와 UEF(경제재정대) 캠퍼스가 이어진다. 매물 광고들은 반경 1km 안에 대학이 6곳 넘게 있다고 앞다퉈 홍보한다.


대학이 모이자 하숙이 따라왔다. 거리 이면 골목마다 월 250만~350만 동짜리 원룸과 하숙방이 들어찼다. 이곳에 사는 학생들에게 응우옌자찌 거리는 학교 앞 식당가이자 부엌이다. 뚜오이째(Tuổi Trẻ)가 2024년 이 거리를 취재했을 때 만난 교통운수대 학생 홍응언(Hồng Ngân)도 근처에서 하숙하고 있었다. 그는 공부가 없는 저녁이면 친구들과 이 거리에 나와 2만~3만 동짜리 음식을 먹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 동네는 먹을 게 많아요. 친구들이랑 여기서 자주 만나요. 좀 여유 있는 날엔 비싼 것도 먹고요.”
이 한마디에 이 거리 소비의 성격이 담겨 있다. 평소에는 철저히 아끼지만, 여유가 생기는 날에는 기꺼이 조금 더 쓴다. 매일 찾아오는 고정 수요와 가끔 지갑을 더 여는 수요가 한 사람 안에 함께 들어 있는 것이다.
4만9천 동 분더우부터 13만9천 동 뷔페까지
거리에 늘어선 메뉴는 베트남 전국을 옮겨놓은 듯하다. 같은 보도에 따르면 이 거리에서 가장 흔한 음식은 하노이식 분더우와 분짜(bún chả)로, 이 두 메뉴를 파는 가게만 10곳이 넘었다. 모둠 분더우 한 접시는 4만9천 동부터 시작했고, 손xúc xích nướng đá님을 끌려고 채소와 라이스페이퍼를 공짜로 더 얹어주는 가게도 있었다. 후에(Huế)식 분보(bún bò), 냐짱(Nha Trang)식 생선 국수, 다낭(Đà Nẵng) 특산 요리, 하이퐁(Hải Phòng)식 바인다꾸어(bánh đa cua), 사이공식 껌떰(cơm tấm)도 한 거리에서 경쟁한다.

바인다꾸어 (bánh đa cua)

분짜(bún chả)
가격대도 넓다. 미니 훠궈는 3만9천 동, 닭고기 훠궈는 7만9천 동, 뷔페는 13만9천 동부터다. 한식당과 태국 식당도 섞여 있다. 가장 북적이는 곳은 오히려 길가의 수레 노점이다. 돌판에 굽는 소시지 ‘쑥씩느엉다(xúc xích nướng đá)’가 한 개 2만 동, 여기에 손으로 찧은 레몬차, 치즈를 넣은 동전빵이 줄지어 팔린다. 중국에서 건너와 베트남 젊은이들 사이에 번진 ‘트렌드 간식’들이 이 거리에서 먼저 시험대에 오르는 것이다. 신메뉴가 대학가에서 반응을 얻으면 시내로 퍼지고, 반응이 없으면 몇 달 만에 수레째 사라진다. 손님층은 학생에 그치지 않는다. 학생의 일상 수요 위에 직장인의 ‘나들이 수요’가 한 겹 더 얹힌 구조다.

쑥씩느엉다(xúc xích nướng đá)

미니 훠궈는 3만9천 동

하노이식 분더우와 (bún đậu Hà Nội)
손님이 많은 거리는 파는 사람에게도 매력적이다. 문제는 모두가 같은 계산을 한다는 점이다. 유행 간식이 뜨면 같은 수레가 열 대, 스무 대로 불어난다. 손님은 그대로인데 파이를 나눌 사람만 늘어난다. 이 거리에서 벌어지는 ‘격전’의 첫 번째 층위는 거창한 브랜드 전쟁이 아니라, 바로 이 이웃 수레 사이의 경쟁이다.
월세 1억 동, 분더우 몇 그릇을 팔아야 할까
격전의 두 번째 층위는 점포 임대료다. 2026년 7~8월 현지 부동산 플랫폼에 올라온 매물을 보면 이 거리 임대료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HUTECH 바로 앞 가로 8m·세로 20m 건물은 월 1억 동, 가로 10m·세로 20m 4층 건물은 월 1억3천만 동에 나왔다. 거리 초입 8번지 건물(7x20m)은 월 1억4천만 동에 5년 계약 조건이 붙었다. 반면 골목 안으로 몇 걸음만 들어가면 4x18m 1층 점포가 월 1,600만 동으로 떨어진다. 같은 동네에서 대로변과 골목의 임대료가 열 배 가까이 벌어지는 것이다. 모두 호가이지만, 현지 부동산 플랫폼 바트동산(batdongsan.com.vn)은 이 거리 임대료가 지난 1년 사이 올랐다고 표시하고 있다.리 주소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매매가는 더 높다. 4x20m(80㎡) 5층 건물이 245억 동, ㎡당 3억 동 넘게 매물로 나와 있다. 이 건물의 월 임대수익은 5천만 동으로 광고된다. 건물주에게는 안정적인 ‘현금흐름 자산’이고, 임차인에게는 매달 넘어야 하는 문턱이다.
이 문턱의 높이를 간단히 계산해 볼 수 있다. 업계에서는 체인 외식업체의 임대료가 매출의 약 18%를 차지한다고 본다. 이 비율을 적용하면 월세 1억 동짜리 점포는 한 달 매출이 약 5억5천만 동은 나와야 한다. 4만9천 동짜리 분더우로 환산하면 한 달 1만1천여 그릇, 하루 370그릇 이상이다. 2만~3만 동을 쓰는 학생 손님만으로는 맞추기 어려운 숫자다.
그래서 거리의 판도는 자연스럽게 둘로 갈린다. 대로변 넓은 점포는 자본력과 브랜드 인지도를 갖춘 체인이나 대형 식당이 차지한다. 소규모 자영업자는 골목 안으로 들어가거나 수레를 끈다. 실제로 이 거리 매물 광고들은 선호 임차인으로 ‘체인 브랜드’를 명시하는 경우가 많다. 커피·밀크티 체인의 매장 안내 자료에도 이 거리 주소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숫자로 본 베트남 외식 시장
이 거리의 풍경은 베트남 외식 시장 전체의 흐름과 겹친다. 외식업 관리 솔루션 업체 iPOS.vn에 따르면 2024년 베트남의 외식(F&B) 업소는 32만3천여 곳으로 전년보다 1.8% 늘었다. 업계 매출은 688조 동으로 16.6% 증가했다. 업소 수는 거의 제자리인데 매출은 크게 늘었다는 것은, 늘어난 돈이 새 가게보다 기존 강자에게 더 많이 흘러갔다는 뜻으로 읽힌다. 2025년 매출은 755조 동으로 9.6% 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F&B 전문가 응우옌타이빈(Nguyễn Thái Bình)은 최근 현지 매체 인터뷰에서 대형 체인들이 오히려 확장 속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간접 경쟁자였던 소규모 가게들이 영업을 줄이거나 철수하면서 체인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줄었다는 설명이다. 같은 보도는 호찌민 곳곳에서 비용 상승을 견디지 못한 가게들이 연말에 점포를 내놓고, 그 자리를 큰 체인이 채우는 흐름을 전했다. 응우옌자찌 거리에서 대로변은 체인이, 골목과 보도는 자영업자가 나눠 갖는 구도는 이 전국적 흐름의 축소판이다.
베트남 내수의 진짜 얼굴은
그렇다면 이 거리가 보여주는 베트남 내수의 실제 모습은 무엇일까.
첫째, 베트남 소비자는 철저히 가격을 따지지만 경험에는 돈을 쓴다. 평소엔 2만~3만 동짜리 한 끼로 버티던 학생도 친구와 만나는 날엔 훠궈 집 문을 연다. 직장인은 1인당 10만 동으로 저녁 한 끼에 노점 간식, 음료까지 묶어 ‘나들이’를 즐긴다. 한 번에 크게 쓰기보다 작은 금액을 자주, 여럿이 함께 쓰는 소비다.
둘째, 내수의 주인공은 젊다. 응우옌자찌 거리를 움직이는 것은 대학 캠퍼스와 하숙촌, 그리고 SNS다. 새로운 맛이 영상으로 퍼지면 가장 먼저 줄을 서는 것도, 가장 먼저 등을 돌리는 것도 이들이다. 트렌드 간식의 생애가 몇 달에 불과한 이유이기도 하다.
셋째, 시장은 커지지만 그 안의 자리는 좁아지고 있다. 손님은 늘어도 판매자는 더 빨리 늘고, 임대료는 그보다 먼저 오른다. 자본을 갖춘 체인은 좋은 목을 잡고, 소상공인은 골목과 수레로 밀려나면서도 끈질기게 버틴다. 베트남 내수가 ‘성장’이라는 한 단어로만 설명되지 않는 이유다.
이 거리의 다음 장면도 이미 준비되고 있다. 인근 반타인(Văn Thánh) 운하에서는 준설과 기반시설 정비 사업이 진행 중이다. 시 당국은 1천여 가구의 보상과 이주를 2026년 9월 15일까지 마칠 계획이었다. 운하 주변 환경이 바뀌면 이 일대 상권의 지도도 다시 그려질 가능성이 크다.
밤 9시가 넘어도 응우옌자찌 거리의 불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대로변 체인 카페의 통유리 안에서는 노트북을 편 학생들이 앉아 있고, 그 앞 보도에서는 수레 노점상이 다음 유행 메뉴를 고민한다. 숫자로 보는 베트남 내수는 매끄러운 성장 곡선이지만, 거리에서 만나는 내수는 매일 밤 다시 치러지는 작은 승부들의 합이다. 베트남 소비 시장의 진짜 얼굴을 알고 싶다면 보고서보다 이 거리 1km를 걸어보는 편이 빠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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