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한 달여 동안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화제 중 하나는 단연 축구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축구 국가대표들이 입방아에 올랐습니다.
이민성 감독이 이끄는 23세 이하 대표팀에서는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고 병역 특례를 받은 일부 선수들이 경솔한 언행을 보였고, 모레노라는 새 감독이 이끄는 성인 국가대표팀에서는 일부 선수들이 집단행동에 나섰습니다. 국가대표라는 이름에 거의 맹목적인 기대와 응원을 보내온 국민들의 탄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아무리 혈기 왕성한 젊은 나이라 해도, 대한민국의 명예를 짊어지고 국민을 대신해 나서는 ‘국가대표’가 어떻게 국민이 뻔히 보는 앞에서 저런 행동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지, 참 괘씸한 녀석들입니다. 어린 선수들의 치기가 빚은 실수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국가대표’ 라는 이름을 대입하면 결코 그냥 넘길 일이 아닙니다.
이들의 행동이 유독 비난받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같은 길을 먼저 걸어간 선배들이 보여준 선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병역 특례를 받은 선수가 이들만은 아닙니다. 지금 성인 대표팀에서 뛰고 있는 선수 손흥민, 이강인 등 대부분이 같은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국민의 대표로 나서 따낸 금메달 그 자체를 기뻐했을 뿐, 병역 특례라는 개인적 이득을 애써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국가대표라는 무게에 걸맞은 언행으로 박수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선수들은 그야말로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제 입으로 털어놓았습니다. 제사상을 받는 조상들이 누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일입니다. 여기에는 지도자의 책임도 큽니다. 23세 이하 대표팀 감독 자신이 이미 사회적 비판의 한가운데 서 있는 인물이니, 그 아래 선수들이 보고 배운 것 역시 온전할 리 없습니다.
결국 이번 실언과 망발의 여파는 점점 더 커질 조짐입니다. 앞선 선배들이 보여준 모범을 외면한 이들 때문에 이제 병역 특례 제도 자체가 흔들릴 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뒤따르는 모든 후배 체육인의 공적(公敵)이 됩니다.
우리 축구의 전설 차범근의 예를 한번 볼까요. 그는 1978년 말, 만 25세의 나이로 독일 다름슈타트에 입단합니다. 당시 그는 공군에서 복무 중이었지만 전역을 수개월 앞두고 있었고, 공군은 그를 만기 전역으로 처리해 곧바로 독일에서 뛸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특혜라는 말이 돌자, 그는 급히 귀국해 남은 5개월의 복무를 마저 채웁니다. 군 복무에 관한 한 한국은 이렇게 엄격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스물여섯에 다시 독일로 건너간 차범근은 외국인 선수로서 분데스리가 98골을 넣으며 독일 축구의 전설이 됩니다.
지금 그대들이 해외 무대에서 뛰고 있는 현실은 누가 만들었는지 아십니까? 그저 자신이 공을 좀 잘 차서 진출했다고 생각합니까? 차범근, 박지성, 손흥민 같은 선배들이 낯선 땅에서 갖은 차별을 견디며 한국인의 긍지를 잃지 않고 성실히 노력해 온 대가입니다. 그 선배들 덕분에 외국 구단이 한국 선수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번 성인 대표팀에서 파벌을 만들어 분란을 일으킨 ’96년생 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선 선배들의 활약이 있었기에 지금 외국 클럽에서 뛸 수 있는 것입니다. 2018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서 함께 뛴 손흥민의 활약이 없었다면 과연 그들이 병역 특례를 받을 수 있었을지도 돌아볼 일입니다. 선배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곧 자신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같은 길을 걷는 이들에게 선배는 더욱 절실한 존재입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만큼 잘사는 것이 그저 삼성이나 현대 같은 몇몇 기업이 잘나가는 덕분입니까? 그보다 먼저 독일에 광부로, 간호사로 건너가 남들이 꺼리는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50도가 넘는 중동의 사막에서 밤에도 불을 끄지 않고 피땀을 흘린 선배 세대가 있었고, 그들의 노력이 바탕이 되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입니다.
1953년 전쟁의 폐허 속에서 국민소득 67달러의 세계 최빈국으로 출발한 한국은 10여 년 뒤인 1964년 수출 1억 달러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62년이 지난 올해, 연간 수출 1조 달러 달성이 확실시됩니다. 무려 1만 배입니다. 그런데 1억 달러를 수출하던 당시 주요 수출품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합판, 어패류, 의류, 가발, 돼지털, 신발이었습니다.
그런 가난한 나라가 1조 달러 수출 대국이 된 것은 그대가 잘나서 가 아닙니다. 최고의 품질을 만들겠다며 자신들이 만든 제품을 전부 불태운 기업인과 직원들, 나라가 외환 위기에 빠지자 장롱 속 금붙이를 들고나와 나라를 돕겠다고 나선 국민들, 그 앞선 발자취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살면서 가끔은 돌아봐야 합니다. 과연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배우며, 무엇을 먹고 살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지금 그대들이 누리는 평화와 풍요, 그리고 개인적 명예까지, 이 모두를 누가 만들어 그대에게 안겨주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대는 지금 선배들이 쌓은 노력을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 누림에서 그치지 말고, 거기에 그대의 노력을 더해 후배들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한국인이 살아온 방식입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이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는 동안 나라가 한 뼘이라도 발전하는 데 보탬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국민의 도리는 다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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