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조 달러 클럽’에 나란히 선 삼성·SK하이닉스… 그 이유는?
한국 증시가 사상 처음으로 본 적 없는 풍경을 그려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반도체 기업이 나란히 시가총액 ‘1조 달러 클럽’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미국 이외의 국가 중 최초로 복수의 기업이 이 같은 시가총액을 달성한 국가가 됐다. 아시아 기업으로는 대만 TSMC, 삼성전자에 이어 SK하이닉스가 세 번째로 고지를 밟았다.
SK하이닉스는 5월 27일 전 거래일보다 9% 넘게 급등해 장중 227만9000원까지 치솟으며 신고가를 경신했고, 시가총액은 약 1598조원, 원·달러 환율을 적용해 약 1조600억 달러 규모로 불어났다. 삼성전자가 6일 국내 기업 최초로 1조 달러를 돌파한 지 불과 3주 만이다. 두 종목의 시총 합계가 전체 증시의 50.4%로 처음으로 절반을 넘어섰을 만큼, 한국 경제는 지금 메모리 반도체라는 거대한 파도 위에 올라타 있다.
호찌민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 교민들에게도 이 흐름은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삼성전자는 베트남 최대 외국인 투자 기업이며, 이번 메모리 호황의 다음 무대 중 하나로 베트남이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지금 메모리가 붐인가… ‘AI 추론의 시대’
이번 호황의 진원지는 인공지능(AI)이다.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AI가 학습 단계를 넘어 본격적인 ‘추론(inference)’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데이터를 저장하고 그래픽처리장치(GPU)로 빠르게 전송하는 메모리의 가치가 폭발적으로 커졌다.
핵심은 고대역폭메모리(HBM·High Bandwidth Memory)다. D램 칩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처리 속도를 혁신적으로 끌어올린 이 제품은 엔비디아의 AI 가속기에 필수적으로 탑재된다. HBM은 AI 산업 성장의 최대 수혜 품목으로 꼽히며, 엔비디아가 차세대 AI 칩 로드맵을 공개할 때마다 수요 전망이 한층 높아진다. 과거 D램 시장이 공급 증가에 따라 가격 경쟁을 벌였다면, 현재 HBM 시장은 기술력과 생산능력이 가격 결정권을 좌우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수요는 HBM에만 머물지 않는다. AI 학습·추론용 데이터센터에서 DDR5와 서버용 SSD 수요가 동시에 급증하면서, 메모리 업체들이 첨단 공정과 신규 생산능력을 서버·HBM 쪽으로 집중 배분하고 있다. 그 결과 일반 D램과 낸드플래시까지 품귀에 빠졌다. 노무라는 “D램, 낸드플래시, HBM의 3중 슈퍼사이클이 온다”고 진단했다.
가격은 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가트너는 D램·SSD 가격이 2026년 말까지 합산 기준 130% 폭등할 것으로 내다봤다. 글로벌 메모리 시장 규모는 2024년 1650억 달러에서 2025년 약 2250억 달러를 거쳐, 2026년에는 약 4200억 달러로 1년 만에 두 배가량 커질 전망이다.
실적은 이미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 4월 AI 수요에 힘입어 분기 매출이 사상 처음 50조원을 돌파하는 역대 최고의 1분기를 기록했다. 미래에셋증권은 SK하이닉스의 올해와 내년 영업이익을 각각 290조원, 420조원으로 추정했다.

이번엔 다르다… “사이클이 아니라 구조적 성장”
메모리 반도체는 전통적으로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는 대표적 ‘사이클 산업’이었다. 그래서 시장의 가장 큰 관심은 “이 붐이 얼마나 갈 것인가”에 쏠린다.
전문가들의 무게중심은 “이번엔 다르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글로벌 금융회사 UBS가 마이크론 목표주가를 3배나 높여 잡으며 메모리가 사이클 산업에서 구조적 성장 산업으로 바뀌었다는 논리를 제시했고, 이것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동반 급등의 도화선이 됐다. 과거 메모리 수요가 PC와 스마트폰에 의존했던 것과 달리, 이번 상승 사이클은 AI 데이터센터라는 거대한 신규 수요원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다.
공급 측면에서도 당분간 부족이 이어질 전망이다.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장은 2026년 초 업계 간담회에서 2027년 수요 대비 공급 부족이 2026년보다 더 심화될 것이며 이미 2027년분 주문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클라우드 업체들은 2025년 하반기부터 2~3년치 물량을 선점 계약으로 묶어두면서, 2026년분 HBM과 상당량의 서버 D램·SSD가 사실상 ‘예약’된 상태라는 분석도 나온다. 옴디아는 2026년 데이터센터가 전 세계 메모리 소비량의 70%를 차지할 것으로 예측했다.
다만 과열 경고도 분명히 존재한다. 가격이 계속 오를 경우 스마트폰·PC 제조사들이 부품 비용 상승을 부담스러워하면서 최종 수요가 둔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실제 소비자 시장에는 이미 그늘이 드리워졌다. 가트너는 메모리 가격 급등으로 올해 전 세계 PC 출하량이 10.4%, 스마트폰 출하량이 8.4%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가 “1990년대 이후 최대 슈퍼사이클”이라 부르는 만큼, 정점 이후의 하락 가능성도 상존한다.

베트남은 무엇을 얻는가… ‘후공정 허브’로의 도약
호찌민 교민 사회가 주목할 대목은 바로 베트남이다. 이번 메모리 붐과 미·중 갈등에 따른 공급망 재편이 맞물리면서, 베트남은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거점으로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베트남의 강점은 반도체 제조의 마지막 단계인 ‘후공정(ATP·조립·테스트·패키징)’이다. 후공정은 완제품 생산비의 20~30%를 차지하며, 세계 시장 규모는 약 950억 달러로 추정된다. 베트남은 미국 행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후공정 산업에서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이는 국가 중 하나로 꼽힌다.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 베트남 정부의 적극적인 세금 감면과 투자 유치 정책이 맞물린 결과다.
특히 후공정은 AI 시대에 그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 웨이퍼를 보호하고 전기 신호를 연결하는 패키징 기술은 HBM 등 고성능 AI 반도체의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경쟁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단순 조립을 넘어 AI 반도체의 성능을 결정짓는 고부가가치 영역으로 진화한 것이다.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가 줄을 잇고 있다. 삼성전자는 베트남 정부와 반도체 패키징 공장 설립을 위한 양해각서(MOU) 체결을 추진하며, 기존 스마트폰 중심이었던 베트남 생산 거점을 후공정까지 확장하려 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현재 하노이, 박닌, 타이응우옌 등에서 제조 공장 6곳과 연구개발(R&D) 센터를 운영하며, 누적 투자액이 232억 달러를 넘는 베트남 최대 외국인 투자 기업이다. 최근에는 약 2조2000억원 규모의 반도체 테스트 공장 건설에 착수해, 200명 이상의 삼성전자 엔지니어가 현장에서 근무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기업뿐만이 아니다. 미국 앰코테크놀로지(Amkor)는 박닌성 공장에 16억 달러를 투자해 연간 36억 개의 칩을 생산하며 세계 후공정 시장의 5%를 차지하고 있고, 한국의 하나마이크론도 박잔성에 6억 달러 규모의 후공정 공장을 짓고 있다. 엔비디아도 2024년 12월 베트남 정부와 AI 협력 협정을 맺고 AI 연구개발센터와 데이터센터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베트남의 시선은 더 위를 향한다. 베트남 정부는 약 5억 달러 규모의 자국 최초 반도체 전공정(웨이퍼 프로세스) 공장 건설 프로젝트를 승인했으며, 첫 팹은 2027년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후공정 기지에서 출발해 설계와 전공정까지 아우르는 종합 반도체 생태계로 발돋움하겠다는 구상이다. 다만 현재 베트남의 산업 참여는 설계·연구와 후공정에 집중돼 있고, 제조 단계 참여는 여전히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갈 길은 멀다.
호찌민과 인근 남부 지역에서 제조·물류·교육 분야에 종사하는 한국 교민들에게, 반도체 공급망의 베트남 이전은 새로운 사업 기회이자 고용 창출의 신호로 읽힌다.

‘도쿄 선언’ 40여 년… 한국은 어떻게 메모리 최강국이 됐나
오늘의 영광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출발점은 1983년 2월 8일, 고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이 일본 도쿄에서 반도체 사업을 본격화하겠다고 결심한 ‘도쿄 선언’이었다. ‘TV도 제대로 못 만드는데 무슨 반도체냐’는 비웃음과 ‘3년 안에 실패한다’는 냉소가 뒤따랐지만, 삼성은 그해 12월 국내 최초로 64K D램을 국산화하며 첫발을 뗐다.
추격은 경이로웠다. 삼성은 64K D램부터 시작해 256K·1M·4M D램을 잇따라 개발하며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5.5년, 4.5년, 2년, 6개월로 빠르게 좁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추격이 추월로 바뀌는 순간이 왔다. 1992년 삼성전자는 기흥캠퍼스에서 64M D램을 개발해 D램 세계 1위에 올랐고, 1993년에는 메모리 반도체 전체에서 세계 최고 자리를 차지하며 메모리 강국 일본을 처음으로 넘어섰다.
행운도 따랐다. 1991년 당시 일본의 반도체 3강 도시바·NEC·히타치가 주기적 불황에 대비해 1M D램 라인 증설을 중단하고 4M D램으로의 이동을 모색하던 시점이, 삼성에게는 도약의 기회가 됐다. 여기에 독특한 조직 문화가 더해졌다. 매일 밤 11시 임직원이 모여 하루 성과를 점검하는 ‘일레븐 미팅’, 매주 수요일 설계·공정부터 경쟁사 기술까지 회사의 미래를 논의하는 ‘수요 공정회의’가 경쟁력의 원천이 됐다.
위기의 순간 단행한 ‘선택과 집중’도 결정적이었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당시 삼성전자는 부천사업장을 미국 페어차일드에 매각하고 메모리 반도체에 집중하며, 용인·화성·평택을 거점으로 메모리 왕좌에 앉았다.
한국 전체로 보면 1998년부터 D램에서, 2000년부터 메모리 반도체에서 세계 1위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현재 메모리 시장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 3사가 과점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한국이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HBM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80%를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점에 선 한국,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두 기업은 1조 달러에 안주하지 않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클린룸과 팹 건설, AI 데이터센터 거래처 확보에 집중하며 생산능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SK하이닉스는 HBM 월 생산량을 17만 장에서 25만 장으로 늘리고, 평택 P4-4 구역 준공 시점을 2027년에서 2026년 4분기로 앞당겼다. 차세대 제품 경쟁도 가속화된다. HBM4와 HBM4E 등 차세대 제품이 본격 양산되는 2027년에는 가격이 올해보다 최소 50% 이상 오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TV도 못 만든다’던 나라가 40여 년 만에 미국 외 유일하게 두 개의 ‘1조 달러 반도체 기업’을 보유한 나라가 됐다. 시장은 현재 상황을 일시적 현상이 아닌 구조적 변화로 분석하고 있으며, AI 메모리 슈퍼사이클이 본격화되면 한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은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그 파도의 끝자락이 베트남 남부의 공장 부지에까지 닿고 있다는 사실은, 호찌민 교민 사회에도 적지 않은 의미를 던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