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 최고지도부의 강력한 기초과학 육성 지침에 힘입어 그동안 존립 위기에 처했던 현지 기초과학 학계가 미래 핵심 기술을 선도할 새로운 생태계로 탈바꿈하고 있다. 외국의 선진 기술을 단순 도입·조립하던 수준에서 벗어나 스스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기술 강국으로 도약하겠다는 전략이다.
베트남 과학계와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최근 또 람 총비서 겸 국가주석은 과학기술 부문 최고 권위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기초과학은 독자적인 핵심 기술을 형성하는 뿌리이자 근간”이라고 단언하며 기초과학을 국가 과학기술 발전의 최전선에 배치하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최고지도부의 의지는 시장 논리에 밀려 고사 직전에 몰렸던 현지 기초과학 학계에 커다란 반전의 계기가 되고 있다.
실제로 베트남의 기초과학은 그동안 심각한 위기를 겪어왔다. 행정 조직 슬림화 정책(결의안 18호)의 여파 속에서 국립 하노이대학교 자연과학대학의 토양·환경 자원 학과처럼 생물·화학·지질학의 모태가 되는 핵심 학과조차 취업률과 시장성이라는 시장 논리에 밀려 폐과 위기에 내몰리기도 했다. 대학 측이 다른 인기 학과의 등록금 수입을 전가해 강사들의 기본급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실정이었다.
학계 전문가들은 베트남 기초과학이 겪은 시련의 원인으로 과거의 ‘역투자 방식’을 지적해왔다. 한국이나 중국처럼 기술 발전이 무르익은 뒤 수학과 기초과학에 재투자하는 흐름과 달리, 베트남은 1960년대부터 인력 투자는 활발했으나 이를 뒷받침할 국내 기술 산업 인프라가 존재하지 않아 기초과학과 산업 기술 간의 고리가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는 분석이다. 1970년대 한때 베트남-헝가리 합작 동력 공장이나 반도체 트랜지스터를 생산하던 Z181 공장 등이 기술 자립의 불씨를 지폈으나, 이후 40년 동안 시장에서 도태되며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이어지지 못한 아픈 역사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대학교와 연구소가 버텨낸 기초과학 인력은 최근 베트남에 진출한 글로벌 다국적 기업들의 연구개발(R&D) 부문을 지탱하는 핵심 자산으로 거듭나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베트남은 단순 임가공과 저임금 노동력만 제공하는 변방에 불과했으나, 2008년 고첨단기술법 제정을 기점으로 외국인 투자(FDI) 기업들에 R&D 투자를 의무화하는 지침을 제시하면서 지형이 바뀌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는 기업이 삼성이다. 초기 단순 조립 공장으로 시작했던 삼성은 베트남 내에 대규모 R&D 센터(SRV)를 구축해 운영 중이다. 삼성 SRV는 이날 하노이 국립 공과대학교와 석사 과정 공동 양성 및 인재 공급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하며 현지 전문 인력 확보에 박차를 가했다. 이 밖에 보쉬, LG, 닛산 오토매틱스 등 글로벌 기업들도 베트남 내 R&D 투자를 대폭 확대하는 추세다. 최근에는 네덜란드의 한 첨단 기업이 필리핀의 생산 기지와 유럽의 R&D 센터를 모두 폐쇄하고, 고숙련 인재 잠재력이 높은 베트남으로 전 공정을 통합 이전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추 득 찐 하노이 국립 공과대학교 총장은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국내 대학들의 꾸준한 인재 양성 노력이 첨단 기술 경제의 수요를 충족하기 시작했다”며 “과거에는 기업들이 정부 압박에 못 못해 억지로 R&D 비용을 책정했지만, 이제는 베트남의 기초과학 인재들로부터 실제 상업적 이익과 기술 혁신이라는 보상을 얻고 있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과학계는 최고지도부의 초당적 지원 지침에 따라 향후 베트남 기초과학이 단순한 학문 연구를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 신뢰받는 국가 경쟁력의 핵심 축으로 완전히 자리 잡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