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동네슈퍼마켓 전쟁

호찌민시 빈탄군 웅반킴(Ung Van Khiem)거리. 저녁 퇴근길에, 오토바이 두세 대가 좁은 골목에 나란히 멈춰 선다. 행선지는 코너를 돌면 나오는 초록색 간판의 작은 가게다. 박호아싼(Bách Hóa Xanh). 한국어로 풀면 ‘초록 잡화점’ 쯤 된다. 150㎡ 남짓한 공간 안으로 들어서면 채소·과일·돼지고기·생선이 가지런히 냉장 진열돼 있다. 아주머니 한 명이 바구니를 들고 당근과 공심채를 집어 들고, 다른 손님은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찍어 결제를 마친다. 오전 나절의 장보기가 10분 만에 끝난다. 재래시장 어귀에서 흥정하던 베트남 아침 풍경이 이 작은 공간 안에서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바뀌고 있다.

‘현대판 재래시장’의 탄생

베트남의 슈퍼마켓 시장은 오랫동안 두 개의 세계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에이온(Aeon)·빅씨(Big C)·롯데마트(Lotte Mart) 같은 대형 하이퍼마켓이다. 수만 ㎡에 달하는 매장 면적, 주차장, 에스컬레이터, 푸드코트까지 갖춘 이 공간은 베트남 중산층에게 ‘나들이 쇼핑’의 목적지였다. 다른 하나는 여전히 골목마다 살아 숨 쉬는 전통 재래시장, ‘쩌(chợ 짜오)’다. 좌판 위에 생선을 펼쳐 놓고, 가격은 흥정으로, 원산지는 묻지 않는 그 공간이다.

그런데 2015년을 전후해 두 세계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새로운 포맷이 등장했다. ‘미니슈퍼마켓(siêu thị mini)’이다. 재래시장처럼 주택가 골목에 있고, 하이퍼마켓처럼 가격이 붙어 있으며, 편의점처럼 빠르게 계산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를 동시에 구현한 것이 박호아싼과 킹푸드마트(Kingfood mart)다.

▲ 2015년을 전후로 이러한 미니마켓이 대거로 베트남에 등장한다

박호아싼은 베트남 최대 전자제품 유통 기업 더지오이디동(Thế Giới Di Động, MWG)이 2015년 론칭했다. 스마트폰·가전을 팔던 회사가 갑자기 채소와 돼지고기를 팔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업계의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2026년 현재 전국 매장 수는 약 3,000개에 육박하며, 2024년 매출은 2조 8,500억 원(285조 동)을 넘었다. 베트남 미니슈퍼마켓 세그먼트 점유율 2위, 매출 기준으로는 빈마트(WinMart)와 사이공 꼬업(Saigon Co.op)을 제치고 업계 1위로 올라섰다.

▲ 박호아싸인의 모회사 모바일월드 그룹

킹푸드마트는 더커피하우스(The Coffee House), 패션 체인 쥬노(Juno), 물류 스타트업 자오항냐인(Giaohangnhanh)을 거느린 복합 그룹 씨드컴(Seedcom)이 2018년에 론칭했다. 규모는 박호아싼보다 작지만, 방향은 다르다. 호찌민 중산층 이상을 겨냥해 300~500㎡의 ‘중간형 슈퍼마켓’ 포맷을 표방하며, 수입 과일·고품질 국산 농산물을 전면에 내세운다. 2026년 현재 호찌민 및 빈즈엉(Bình Dương) 일대에 150개 이상 매장을 운영 중이며, 오렌지색 간판이 도시 곳곳에 박혀가고 있다.

▲ 킹푸드마트의 모회사 씨드컴

골목 끝까지 파고드는 초록색

박호아싼의 전략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재래시장보다 싸게, 그러나 믿을 수 있게.” 전통 시장이 가진 가격 경쟁력은 유지하되, 원산지 표시·위생 관리·고정 가격 등 현대 유통의 신뢰를 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엔진은 공급망이다. 전체 상품의 80%를 제조사 또는 산지에서 직접 소싱해 중간 유통 마진을 걷어냈다. 달랏(Đà Lạt)의 채소 농가에서 매일 8~9톤의 채소가 박호아싼 물류망을 통해 수백 개 매장으로 분산된다. 자체 투자한 ‘4제로 안전농장(4KFarm)’ – 무농약·무방부제·무성장촉진제·비유전자변형 – 에서 재배한 채소도 직공급한다.
기술도 조용히 작동한다. AI 재고관리 시스템을 도입해 신선식품 손실률(shrinkage rate)을 8%에서 3.2%로 절반 이하로 낮췄다. 재고 회전일은 18일에서 12일로 단축됐다. 매장당 직원은 5~7명. 경쟁사 대비 25% 적은 인력으로 운영되지만, 하루 500건 이상의 주문을 처리한다.
매장 공간 자체도 전통 시장의 문법을 의식해 설계됐다. 채소·육류·수산물 등 신선식품 코너가 매장 중앙에 자리 잡아, 들어서는 순간 냉기와 함께 ‘오늘 저녁 반찬’이 눈에 들어온다. 건조식품·생활용품은 사방 벽면 선반에 배치한다.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동선이 막히지 않도록 통로 폭은 두 사람이 나란히 지나갈 수 있는 너비를 확보한다.

디지털 접점은 베트남 국민 메신저 잘로(Zalo)를 통해 열린다. 동네 박호아싼 매장이 운영하는 잘로 채팅 그룹에 들어가면, 채팅창에서 주문하고 1~2시간 내 가정 배달을 받을 수 있다. 앱 설치 없이, 스마트폰 메신저 하나로 ‘장 보기’가 완결된다. 오후 9시 반까지 운영하는 콜센터(1900-1908)로 전화 주문도 가능하다.
고객 신뢰를 담보하는 장치도 공격적이다. 신선식품 품질에 불만족할 경우 동일 제품 2개로 교환해주는 ‘1 đổi 2(1개 사면 2개 교환)’ 정책이 전 매장에 적용된다. 배달이 지연될 경우에는 5만 동(약 3,000원) 상품권을 즉시 보상한다. 전자제품 AS에 익숙한 MWG의 고객 서비스 DNA가 신선식품 유통에 이식된 결과다.

프리미엄을 동네 슈퍼에서

킹푸드마트가 겨냥하는 풍경은 조금 다르다. 소비자가 사는 동네 안에 있되, 에이온몰에 가야 살 수 있었던 수입 과일과 고품질 국산 농산물을 팔겠다는 것이다. 뉴질랜드산 키위, 칠레산 체리, HAGL(황아인자라이) 그룹의 수출 등급 바나나가 주택가 매장 진열대에 오른다.
킹푸드마트 CEO 응우옌티응옥투이(Nguyễn Thị Ngọc Thúy)는 “수입 과일은 대량 직수입을 해야 가격 경쟁력이 생기고, 대량 소비를 위해선 매장 규모가 커야 한다”는 논리로 확장의 정당성을 설명한다. 씨드컴 그룹의 물류 계열사 자오항냐인·아하무브(Ahamove), IT 솔루션 계열사 하라반(Haravan)이 재고·결제·배달 시스템을 내부에서 지원하는 구조다. 그룹 생태계 전체가 킹푸드마트의 인프라가 된다.
브랜드 경험도 신경 쓴다. 매장 간판과 유니폼, 쇼핑백까지 오렌지 컬러로 통일한 시각 아이덴티티, 원라이프(OneLife) 멤버십 앱을 통한 포인트·바우처·배달 주문 통합, 넓은 무료 주차장 등은 “동네 슈퍼지만 경험은 다르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현재 원라이프 앱 사용자는 200만 명, 앱 론칭 2년 만에 온라인 구매 고객 성장률이 분기당 300%를 넘었다.

재래시장을 이길 수 있을까

두 체인의 진짜 라이벌은 에이온이나 롯데마트가 아니다. 아직도 베트남 식품 소매 시장의 87% 이상을 점유하는 전통 재래시장이다. 베트남 소비자들, 특히 중·장년 여성 소비자들이 수십 년간 쌓아온 재래시장과의 신뢰 관계를 어떻게 끊어낼 것인가가 핵심 과제다.
박호아싼이 주목한 것은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재래시장이 강제 폐쇄되는 상황에서 집 근처 미니슈퍼마켓의 가치가 폭발적으로 드러났다. 팬데믹이 끝난 뒤에도 ‘가깝고 빠르고 믿을 수 있는’ 쇼핑에 길들여진 소비 습관은 돌아오지 않았다. 킹푸드마트 역시 같은 시기 4배 성장이라는 숫자를 경험했다. 위기가 이 새로운 포맷의 가능성을 앞당겨 증명한 셈이다.
외식업계의 변화도 우군이다. 호찌민에서 급성장 중인 한국 음식, 일본 음식, 서양 요리에 대한 관심은 ‘집에서 직접 요리해보겠다’는 수요와 연결된다. 수입 소고기, 허브류, 수입 치즈를 동네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은 과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도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선식품 유통은 냉장 물류의 촘촘한 관리를 요구한다. 박호아싼이 수십 개 점포를 닫아야 했던 2022~2023년의 고통은 “빨리 늘린다고 다 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업계 전체에 남겼다. 씨드컴이 더커피하우스를 골든게이트(Golden Gate)에 매각해야 했던 실패 경험도 킹푸드마트의 확장 속도를 신중하게 조절하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집 근처 슈퍼’ 전쟁의 다음 라운드

박호아싼은 2025년 11월 닌빈(Ninh Bình)성에 20개 매장을 동시 개점하며 처음으로 베트남 북부 시장에 진출했다. 10년을 남부와 중부에서 다진 뒤 마침내 하노이를 향해 북상한 것이다. 킹푸드마트는 아직 호찌민을 벗어나지 않았다. “한 시장에서 먼저 확실하게 잘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둔다”는 CEO의 말이 전략을 요약한다.
2030년이 되면 베트남 중산층은 인구의 절반을 넘어설 전망이다. 그들이 매일 들어가는 동네 슈퍼마켓이 어떤 간판을 달고 있을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초록 간판과 오렌지 간판이 골목 끝에서 나란히 서서, 조용하지만 치열하게 그 자리를 다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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