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조8000억달러 빚더미에서 찾은 구원투수…
“가상화폐인데 가격이 안 변한다”
비트코인은 무서워도 이건 다르다
지난 7월 18일,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대통령이 ‘지니어스법(GENIUS Act)’에 서명하며 한 말이다. “인터넷 탄생 이후 금융 기술에서 일어난 가장 위대한 혁명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흥분시켰을까.
답은 ‘스테이블 코인(Stablecoin)’이다. 가상화폐지만 비트코인(Bitcoin)처럼 롤러코스터를 타지 않는다. 1달러면 1달러, 변하지 않는다. 마치 카지노 칩처럼 말이다.
카지노 칩의 디지털 버전
스테이블 코인을 이해하려면 카지노 칩을 떠올리면 된다. 카지노에서 1만원으로 칩을 사면 언제든 다시 1만원으로 바꿔준다. 스테이블 코인도 똑같다.
테더(Tether·USDT)를 예로 들어보자. 당신이 1달러를 테더 회사에 주면, 회사는 그 1달러를 은행에 넣어두고 대신 1USDT를 준다. 언제든 1USDT를 가져오면 1달러로 바꿔준다. 간단하다.
현재 스테이블 코인 시장은 2550억달러(약 340조원) 규모다. 이 중 테더와 USDC 두 개가 90%를 차지한다. 테더만으로도 65%다. 삼성전자가 코스피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비슷하다.

미국이 목숨 거는 이유: 1조달러 이자폭탄
그런데 왜 미국이 이렇게 난리일까. 답은 돈이다. 정확히는 빚이다.
미국의 작년 재정적자는 1조8330억달러였다. 우리돈으로 2400조원이 넘는다. 이 중 1조달러 이상이 이자비용이다. 매년 이자만 1300조원 넘게 내는 셈이다.
문제는 이 이자가 계속 늘어난다는 것이다. 미국 국채를 사려는 나라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미 미국 국채 매입을 대폭 줄였다. 국채를 사는 사람이 줄면 금리가 오르고, 금리가 오르면 이자 부담이 늘어난다.
바로 여기서 스테이블 코인이 등장한다.

스테이블 코인 = 국채 구매자
스테이블 코인 발행회사들은 코인을 발행할 때 그만큼의 달러나 미국 국채를 사서 보관해야 한다. 지니어스법이 이를 의무화했다.
예를 들어 테더가 100억달러어치 코인을 발행하려면, 100억달러어치 미국 국채를 사야 한다. 스테이블 코인 시장이 커질수록 미국 국채를 사는 돈이 늘어난다. 국채 수요가 늘면 금리가 떨어지고, 미국의 이자 부담이 줄어든다.
스탠다드차타드(Standard Chartered)는 2028년 스테이블 코인 시장이 2조달러까지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지금의 8배다. 그러면 2조달러어치 미국 국채 구매자가 생기는 셈이다.

1971년 ‘페트로달러’의 디지털 버전
전문가들은 이를 ‘디지털 페트로달러’라고 부른다.
1971년 미국은 큰 위기를 맞았다.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던 ‘금태환제’를 중단해야 했다. 무역적자가 커지면서 금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달러의 신뢰도가 흔들렸다.
그때 미국이 찾은 해법이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밀약이었다. “석유는 오직 달러로만 거래하자”는 약속이었다. 이른바 ‘페트로달러(Petrodollar)’ 시스템이다. 석유를 사려면 달러가 필요하니 전 세계가 달러를 쌓아둘 수밖에 없었다.
이제 미국은 스테이블 코인으로 같은 일을 하려 한다. 디지털 거래를 하려면 달러 스테이블 코인이 필요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송금 혁신, 수수료는 몇 센트
실제로 스테이블 코인의 위력은 대단하다. 특히 해외송금에서 그렇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미국으로 1000달러를 보내려면 은행 수수료만 2~3만원은 들었다. 시간도 2~3일 걸렸다. 환전 비용도 별도다.
스테이블 코인을 쓰면 몇 센트 수수료로 몇 분 안에 보낼 수 있다. 환전도 필요 없다. 이미 달러니까.
월마트(Walmart)가 관심을 보이는 이유다. 연간 100억달러의 신용카드 수수료를 내는 월마트는 스테이블 코인으로 이를 크게 줄일 수 있다. 수익성을 60%까지 개선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화폐가치 불안한 나라들의 구원투수
남미와 아프리카에서는 이미 스테이블 코인이 인기다. 자국 화폐가 휴지조각이 될까 봐 불안한 사람들이 달러 스테이블 코인으로 갈아타고 있다.
아르헨티나 페소는 연 인플레이션이 100%를 넘는다. 1년 전 100페소로 살 수 있던 빵이 지금은 200페소를 줘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달러 스테이블 코인은 구원투수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작년 말 기준 전 세계 소매 해외송금 거래의 15%를 스테이블 코인이 차지했다.
한국도 뛰어든다: “원화 스테이블 코인 만들자”
한국도 가만있지 않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원화 스테이블 코인’ 발행을 제시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도 블록체인 투자사 해시드(Hashed) 재직 시절 “미래 경제를 뒷받침할 새로운 화폐”라고 극찬했다.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6월 원화 스테이블 코인 발행을 허용하는 디지털자산기본법을 발의했다. 은행들과 핀테크 회사들은 벌써 상표권 출원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아직 법제화도 안 됐지만 일단 발을 걸쳐둘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찬성론자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달러 스테이블 코인이 한국에서 퍼지면 원화 사용이 줄어든다. 그러면 한국의 통화주권이 약해진다. 미리 원화 스테이블 코인으로 방파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잠깐, 위험하지 않나요?”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첫째, 민간회사가 만든 화폐라는 점이다. 정부나 중앙은행이 보장하지 않는다. 회사가 망하면 끝이다. 2023년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했을 때 USDC 가격이 0.88달러까지 떨어진 게 대표적 사례다. 단지 USDC 발행사가 그 은행에 돈을 맡겨뒀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둘째, 2022년 테라·루나 사태의 악몽이다. 알고리즘 방식 스테이블 코인이었던 테라USD(UST)가 폭락하면서 투자자들이 수십조원을 날렸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스테이블 코인은 중앙은행이나 예금보험 같은 안전장치가 없어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2023년 한 해 동안 주요 스테이블 코인의 가격이 1달러에서 벗어난 사건이 600번 넘게 일어났다.

한국은행 총재 “신중해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더 근본적인 우려를 표명했다. “원화 스테이블 코인이 오히려 달러 스테이블 코인으로의 전환을 쉽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원화 스테이블 코인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나중에 더 편리한 달러 스테이블 코인으로 갈아탈 수 있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는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한국은행은 또 “스테이블 코인이 외환규제나 과세 회피, 자금세탁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원화를 스테이블 코인으로 바꿔 해외로 빼돌리면 정부가 추적하기 어렵다.
혁신인가, 도박인가
스테이블 코인을 둘러싼 논쟁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이것이 화폐의 미래인가, 아니면 위험한 도박인가.
미국은 재정위기 해결책으로 스테이블 코인에 올인하고 있다. 하지만 기축통화국 미국과 달리 한국에는 한계가 있다. 원화 스테이블 코인이 글로벌 시장에서 테더나 USDC와 경쟁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무엇보다 성급한 도입보다는 충분한 안전장치 마련이 우선이다. 담보자산 100% 보유 의무화, 투명한 감독체계 구축, 예금보험 같은 보호장치 등이 그것이다.
트럼프가 “혁명”이라고 부른 스테이블 코인. 과연 화폐의 미래가 될지, 아니면 또 다른 버블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