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메르 루주 정권(1975∼1980년) 당시 ‘캄보디아판 아우슈비츠’로 악명을 떨쳤던 S-21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아 ‘킬링필드’ 대학살을 증언한 화가 보 멩이 85세로 별세했다.
17일(현지시간) 유엔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 전범재판소(ECCC) 등에 따르면 보 멩은 지난 14일 노환으로 숨졌다.
캄보디아 전범재판소는 “보 멩의 별세는 잔혹한 크메르 루주 정권 동안 자행된 심각한 범죄, 특히 전 S-21 보안 센터에서 일어난 역사와 비극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 증인의 상실을 뜻한다”고 밝혔다.
보 멩은 뚜올슬랭 수용소로도 알려진 S-21에서 2년 가까이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79년 베트남군이 크메르 루주를 몰아냈을 때 이곳에서 발견된 단 12명의 생존자 중 한 명이다.
이들을 제외한 S-21 수감자 약 2만 명은 모두 이곳 또는 인근 쩡액 수용소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1941년 캄보디아 중부 깜뽕짬주의 농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젊었을 때 독학으로 그림을 배워 영화관 간판을 그리다가 크메르루주에 가담, 선전 포스터 그리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1977년 대다수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유도 모른 채 간호사인 아내와 함께 체포됐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아내와는 그날 헤어진 뒤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는 2010년 출간된 자신의 전기에서 수감 당시 “매일 밤 달을 바라봤다”면서 “건물 주위에서 사람들이 울고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어머니 도와주세요, 어머니 도와주세요’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고 회상했다.
보 멩은 이곳에서 7일 동안 전기고문과 채찍질 등 잔혹한 고문에 못 이겨 자신이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이라고 거짓 자백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이유로 화가 일을 맡아 크메르 루주 지도자 폴 포트(1925∼1998)와 중국 마오쩌둥, 북한 김일성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들 공산주의 지도자의 그림을 실제 인물과 똑같이 제대로 그리지 못하면 살해될 것이라는 위협 속에서도 그림을 잘 그려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후 크메르 루주 정권이 붕괴하자 자신이 목격한 참상을 생생한 그림과 전기 등으로 남겨 대학살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일조했다.
특히 2009년에는 S-21 소장을 맡았던 깡 겍 이어우(1942∼2020)의 전범재판에 증인으로 나서 그가 종신형을 선고받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재판에서 보 멩이 깡 겍 이어우에게 자신과 함께 체포된 아내의 행방을 아느냐고 묻자 깡 겍 이어우는 아내가 학살 장소로 보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 멩 부부가 체포되고 이들의 두 자녀도 수용소로 보내져 그곳에서 굶주림 끝에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살아남은 이후 재혼했지만, 지갑 속에 첫 아내의 작은 초상화를 계속 갖고 다니면서 “나는 그를 잊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럴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고 고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또한 꿈에 동료 수감자들의 유령이 나타나 자신들을 위해 정의를 이뤄달라고 요구한다면서 괴로워하기도 했다.
크메르 루주 대학살의 방대한 기록을 수집해온 캄보디아 기록센터의 창 육 소장은 보 멩의 정의를 위한 삶의 여정이 기록에 남았다면서 “전 세계 대량학살의 역사에서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AP 통신에 밝혔다.
크메르 루주는 1975년 4월 론 놀의 친미 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이후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겠다며 무수한 주민에 대해 학살과 고문을 자행했다.
이후 1979년 1월 베트남의 침공으로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처형, 고문, 기아, 강제노동 등으로 당시 캄보디아 전 인구의 무려 약 4분의 1인 170만∼220만명을 숨지게 한 것으로 추산된다. 1984년 영화 ‘킬링 필드’로 이런 참상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