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금융당국과 시중은행들이 은행 계좌에 방치된 채 주인에게 잊힌 수조 원 규모의 휴면 자산 처리 방안을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5일 독일 금융업계 및 현지 조사에 따르면 최근 독일 아동구호단체(SOS 어린이마을)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독일 국민의 86퍼센트는 일정 기간 주인을 찾지 못한 휴면 자산을 사회적 프로젝트를 위한 기금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답했다. 반면 정부가 이를 환수해야 한다는 의견은 8퍼센트, 은행의 수익으로 돌려야 한다는 의견은 2퍼센트에 그쳤.
현재 독일은 법적으로 ‘잊힌 계좌(휴면 계좌)’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있으나, 통상 장기간 거래가 전무한 예금 가치나 주식, 채권 등의 증권 자산을 의미한다. 독일 연방교육연구부의 2021년 보고서에 따르면 이러한 휴면 계좌에 묶여 있는 자산 규모는 최소 42억 유로(미화 약 49억 달러)에서 많게는 90억 유로(한화 약 6조 원에서 13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휴면 자산은 주로 자산 소유주가 사망한 후 유족이나 상속인이 해당 계좌의 존재를 알지 못하거나 찾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발생한다. 특히 최근 디지털 금융의 발달로 종이 통장이나 우편 명세서가 사라지고 계좌 정보가 이메일이나 컴퓨터 하드디스크에만 남게 되면서 자산 추적은 더욱 어려워졌다. 가상화폐나 대체불가토큰(NFT) 같은 디지털 자산은 사실상 유족이 인지하기 불가능한 수준이다.
더 큰 문제는 독일 현지 법조계와 금융권에서 이 자산의 처분을 두고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독일 법률상 휴면 자산은 자동으로 은행이나 정부의 소유가 되지 않는다. 은행은 이 돈을 기한 없이 무기한 보관해야 하며, 원소유주나 상속인의 소유권 역시 영구히 소멸하지 않는다. 정부가 이 자산을 귀속할 수 있는 경우는 법정 상속 절차에 따라 국가가 최종 상속인으로 지정될 때뿐이다.
이에 따라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없는 상황에서 각 은행은 자체 기준에 따라 휴면 계좌를 관리하고 있다. 대다수 은행은 소유주 사망 후 상속인을 찾을 수 없거나 수년간 연락이 두절된 경우를 기준으로 삼지만, 엄격한 개인정보 보호법으로 인해 적극적인 소유주 찾기에는 한계가 따른다.
독일 정부도 제도 개선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약 10년 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노르베르트 발터보리안스 재무장관은 비활성 계좌에 방치된 돈이 20억 유로에 달한다고 지적하며 국가 차원의 휴면 자산 통합 등록 시스템 구축을 촉구했다. 최근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가 이끄는 정부 역시 상속인들이 온라인으로 조상들의 휴면 자산을 쉽게 통합 조회할 수 있는 중앙 데이터베이스 구축 법안을 입법 예고했으나 법안 통과까지는 갈 길이 먼 상태다. 베를린에 본사를 둔 상속인 찾기 전문가 협회(VDEE)의 베아트리체 아이젠슈미트 이사는 현재로서는 유족들이 각 금융기관에 일일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문의해야 하므로 중도에 자산 찾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며 중앙 집중식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독일이 제자리걸음을 걷는 사이 주요 선진국들은 이미 명확한 제도를 운용 중이다. 영국의 경우 15년 이상 방치된 휴면 자산은 사회 및 환경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공익 기금으로 이체된다. 다만 원소유주가 나타나면 기한 없이 언제든 돌려받을 수 있다. 프랑스는 10년간 거래가 없으면 유휴 자산을 공공 금융기관인 예금수탁청(CDC)으로 이관하고, 이후 20년 동안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국가 자산으로 귀속한다.
스위스는 60년간 연락이 두절된 휴면 계좌 정보를 대중에게 공개하고, 마지막 1년의 유예기간 내에 상속인이 청구하지 않으면 소유권을 정부로 강제 이전한다. 미국 역시 주별로 3에서 5년간 비활성화된 계좌의 자산을 주정부의 미청구 자산 관리국으로 이관해 보관하며, 소유주는 언제든 적법한 절차를 거쳐 자산을 반환받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