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이 곧 고향이다

백반 한 그릇에 담긴 한국인의 정서…
호찌민에서 다시 피어나다

식탁에 앉는 순간, 사람은 어디서든 고향을 떠올린다. 된장찌개 냄새, 나물 무침의 색깔, 뜨거운 밥 위로 피어오르는 하얀 김. 그것이 무엇이든 한국 사람에게 밥상은 단순한 한 끼가 아니다. 기억이고, 정서이며, 때로는 정체성 그 자체다. 낯선 땅에서 그 감각이 되살아날 때, 사람들은 종종 눈시울을 붉힌다.
호찌민에서 한국 교민으로 산다는 것은 그 감각을 매일 새롭게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섭씨 35도를 웃도는 열대의 태양 아래, 오토바이 소음과 매캐한 매연이 뒤섞인 거리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뜨거운 국물이 그리워진다. 얼큰하고 시원한 찌개 한 뚝배기, 정갈하게 늘어선 반찬들, 그리고 갓 지은 밥. 그것은 단순한 식욕이 아니다. 몸속 어딘가에 각인된 귀소본능에 가깝다.

백반이라는 이름의 문화유산

백반(白飯)은 한국 밥상의 원형이다. 화려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지만, 그 안에는 수백 년의 식문화가 응축되어 있다. 밥과 국, 그리고 몇 가지 반찬으로 이루어진 이 단출한 구성은 조선 시대 반상(飯床) 문화에서 비롯됐다. 탄수화물 중심의 밥이 갖는 영양적 한계를 반찬이 보완하고, 간장과 된장 같은 발효 식품이 깊은 맛을 더하는 구조다. 한식 연구자들이 “밥을 중심에 놓고 그 주변을 반찬이 받쳐주는 균형의 미학”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조선 초기 어의(御醫) 전순의(全循義)가 세조의 명으로 편찬한 『식료찬요(食療纂要)』는 이 철학을 명료하게 압축한다. “병은 당연히 오곡(五穀), 오육(五肉), 오과(五果), 오채(五菜)로 다스려야 한다”는 서문의 선언은 오늘날의 언어로 바꾸면 ‘음식이 곧 약’이라는 의미다. 식의동원(食醫同源), 먹는 것과 치료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이 오래된 믿음은 여전히 한국인의 밥상관(觀)에 깊이 스며있다.
실제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91퍼센트 이상이 “한식은 건강에 좋다”고 믿는다. 나물과 발효식품의 다양성, 섬유질이 풍부한 채소 반찬들, 오방색(五方色)이 어우러지는 색채의 조화. 이 모든 것이 ‘밥 한 상’이라는 작은 우주 안에 담겨 있다. 문제는 그 이상(理想)이 늘 현실에서 구현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전국 수십 곳의 백반집을 직접 돌아본 영양 분석 결과는 냉정하다. 나트륨 과잉, 단백질 부족, 반찬의 획일화. 정성보다 효율이 앞서고, 철학보다 비용이 앞서는 현실 속에서 백반의 이상은 종종 흐릿해진다. 한 영양 전문가는 “소금 과잉 섭취를 조장하는 국을 큰 뚝배기에 가득 줘 1인분으로는 과하고, 짠 찌개도 두세 종류씩 나온다”며 “다 먹으면 하루 나트륨 권장량의 두세 배를 훌쩍 넘는다”고 비판한다. 먹어도 헛헛한 백반, 넘치지만 낭비인 한정식. 그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서 진짜 백반의 이상은 여전히 길을 잃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이국(異國)의 땅에서 그 이상에 더 가까운 밥상과 마주치는 일이 있다. 호찌민의 어느 골목에서, 뜨거운 열기를 피해 밀려드는 한국 교민들로 가득 찬 식당 안에서.

열대의 한복판, 고향 밥상을 차리다

호찌민 2군 타오디엔(Thao Dien) 인근의 안푸(An Phu) 지구는 최근 몇 년 사이 한인 커뮤니티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고급 서비스드 아파트와 국제학교, 한국 식당과 카페들이 밀집하면서 교민들의 일상적 생활권으로 자리를 잡은 이 지역에, 지난해 한솔식당(Hansol Restaurant) 안푸점이 문을 열었다. 교민 사이에서 그 소식은 꽤 빠르게 퍼졌다. 원래 호찌민 북쪽 떤빈(Tan Binh)군 공항 인근에만 있던 한솔식당이 2군에 생겼다는 것은,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린 교민들에게 단순한 식당 오픈 이상의 의미였다.
한솔식당 본점은 호찌민 거주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곳이다. 박항서(Park Hang-seo) 전 베트남 국가대표팀 감독이 단골로 드나들며 더욱 유명해진 이 집은, 수년간 교민들의 ‘소울 레스토랑’으로 자리해 왔다.그러나 공항 쪽이라는 지리적 한계 탓에 타오디엔이나 안푸에 사는 교민들은 좀처럼 발길을 하기 어려웠다. 안푸점의 개업은 그 갈증에 대한 응답이었다.

점심시간을 조금 넘긴 평일 오후, 안푸점을 처음 찾았다. 식당은 큰 도로에서 한 블록 들어간 골목 안쪽에 자리하고 있어, 처음 오는 사람이라면 잠시 헤맬 수도 있다. 그러나 골목 입구에서부터 들려오는 한국어 소리와 어딘가 익숙한 음식 냄새가 방향을 안내해 준다. 문을 열자 2층 규모의 홀이 이미 손님들로 상당히 차 있었다. 자리를 안내받고 메뉴판을 펼치는 사이, 직원이 반찬을 날랐다. 그 동작이 자연스럽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시그니처는 동태탕, 그러나 반찬이 진짜다

메뉴를 고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집의 시그니처가 동태탕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양푼이동태전골을 주문하고, 권유에 따라 알(어란)을 추가했다.

기다리는 동안 반찬들을 살폈다. 나물 두 종류, 김치, 계란말이, 고등어조림, 그리고 두어 가지 더. 젓가락이 먼저 움직인 것은 계란말이였다.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겉은 노릇하고 속은 달큰한 그 맛은 어느 한국 가정의 저녁 식탁에서 맞닥뜨릴 법한 것이었다. 나물은 간이 과하지 않고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 있었다. 고등어조림은 약간 아쉬움이 남았다. 생선살이 기대만큼 부드럽지는 않았고, 양념의 깊이도 조금 더 있었으면 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반찬의 구성과 수준은 호찌민에서 이 가격대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을 충분히 넘어섰다.

동태탕이 나왔다. 뚝배기가 아닌 양푼이에 가득 찬 국물은 처음 보는 순간부터 식욕을 자극했다. 첫 숟갈을 뜨는 순간, 국물이 얼큰하면서도 시원하게 목을 타고 내려갔다. 한국에서도 제대로 된 동태탕을 내는 집이 드문데, 이 국물은 분명 공들인 흔적이 있었다. 동태살은 잘 익어 부드럽게 흐트러졌고, 알은 고소하면서 묵직한 맛을 더했다. 무는 푹 익어 국물을 흠뻑 머금고 있었다. 두부는 따로 주문하지 않아도 들어 있었는데, 국물과 잘 어우러졌다. 매운 편이지만 자극적이지는 않았다. 땀을 흘리면서도 계속 국물에 손이 갔다. 열대 기후에서 이런 국물을 만나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어딘가 풀렸다는 느낌, 다시 힘이 생긴다는 감각.
2인분 기준으로 양이 상당했다. 밥을 두 공기 먹고도 국물이 넉넉하게 남았다. 여럿이 왔다면 한 그릇을 나눠 먹고 다른 메뉴를 하나 더 추가하는 방식이 합리적일 것 같았다.

목살과 제육, 그리고 비빔국수

두 번째 방문에서는 목살양념구이와 제육볶음을 시켰다. 목살은 불 맛이 살아 있었다. 양념이 고기 안쪽까지 잘 배어 있으면서도 겉은 적당히 그을려 씹는 맛이 있었다. 고추장아찌와 함께 먹으면 궁합이 좋다는 걸 두어 점 먹고 나서야 알았다. 아삭한 아찌의 산미가 고기의 기름기를 잡아주면서 입안이 정리됐다.

제육볶음은 평균 이상이었다. 돼지고기의 두께가 적당하고 고추장 양념이 너무 달지 않아 밥 반찬으로 손색이 없었다. 다만 최고라고 부르기엔 조금 아쉬움이 있었다. 양념이 전체적으로 균일해서 먹다 보면 단조롭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었다. 오징어와 삼겹살을 함께 볶는 오삼불고기는 다음 방문을 기약했다.

비빔국수는 예상 밖의 수확이었다. 배가 불렀음에도 면을 남기기 어려웠다. 면발이 탱탱했고, 양념장의 새콤달콤한 비율이 좋았다. 고명으로 올라온 오이채와 달걀지단이 시각적으로도 단정했다. 비빔국수 한 그릇만 놓고 봐도 이 집이 메인 메뉴 외에 곁가지 음식들에도 신경을 쓴다는 인상을 받았다.
밥은 두 번 모두 약간 질게 느껴졌다. 뜨거운 국물과 함께 먹다 보면 크게 거슬리지는 않지만, 단독으로 반찬과 함께 먹을 때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백반에서 밥의 질감은 의외로 전체적인 식사 만족도에 영향을 미친다.

공간과 사람

식당 안을 가득 채우는 소리에 대해 한 가지 솔직하게 써야 할 것 같다. 2층 홀은 천장이 높고 내부 마감이 단단한 소재로 되어 있어 소리가 꽤 울린다. 손님이 많은 시간대에는 대화가 불편할 정도로 소음이 증폭된다. 식사 중에 귀가 피로해지는 느낌은 분명히 있었다. 흡음재를 더하거나 테이블 배치를 바꾸는 방식으로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늑함을 기대하고 온다면 1층을 택하는 편이 낫다.
직원들은 바쁜 시간대임에도 손님을 챙기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추가 반찬을 요청했을 때 빠르게 응대해 주었고, 물을 따로 요청하지 않아도 먼저 채워주었다. 주문을 받는 방식도 간결하고 정확했다. 베트남인 직원들이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한국 손님과 거리낌 없이 대화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이 집이 오랫동안 운영되면서 직원 교육에 공을 들여왔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가격은 1인당 20만~30만 동 수준으로 형성되어 있다. 호찌민 타오디엔 일대의 한식 식당 중에서 이 가격대는 결코 비싸지 않다. 반찬의 수와 질, 메인 요리의 양을 생각하면 오히려 가성비가 높은 편이다.

한식이 현지화된다는 것의 의미

한솔식당 안푸점에서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테이블 곳곳에 베트남 손님들이 섞여 있다는 점이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동태탕 국물을 숟가락으로 뜨는 베트남인들의 모습은, 이 식당이 교민 전용 공간을 넘어서고 있다는 신호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한국 반찬 문화는 낯설 수 있다. 처음에는 반찬이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는지, 어떻게 먹는 것인지 어리둥절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먹어보면 그 풍성함에 금세 익숙해진다. 실제로 베트남 손님들 중 재방문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직원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문화적 간극에서 비롯된 크고 작은 불편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주문 과정에서의 혼선, 반찬 추가 요청에 대한 응대 방식 등에서 한국 손님과 베트남 손님 사이에 경험의 차이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열대 기후의 한복판에서 한국 음식을 내는 식당이 지역 사회와 더 깊이 연결되려면, 그 간극을 좁히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그것은 음식의 맛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다.

밥 한 그릇의 무게

한솔식당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결국 이 글은 백반 이야기다. 아니, 더 정확히는 ‘밥상이 사람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조선 시대 의서가 음식을 약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단지 영양의 문제가 아니었다. 제철 재료를 고르고, 정성 들여 조리하고, 가지런히 상을 차리는 행위 안에 돌봄의 마음이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밥상을 차린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을 함께 챙긴다는 의미였다.
호찌민의 열기 속에서 낯선 언어와 낯선 음식에 둘러싸여 지내는 한국 교민들에게, 한 그릇의 동태탕이 갖는 의미는 단순히 ‘맛있다’는 감각을 넘어선다. 그것은 어느 순간 지쳐버린 몸을 일으켜 세우는 무언가다. 반찬이 줄지어 놓인 밥상 앞에서, 사람들은 잠시 이국의 낯섦을 잊는다.
백반은 화려하지 않다. 자랑하지 않고, 으스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안에는 수백 년의 지혜와 돌봄이 담겨 있다. 그 밥상이 호찌민 2군의 한 골목에서, 오늘도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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