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프 지역의 갈등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전 세계 에너지 공급망이 마비된 가운데, 미국 내에서 치솟는 기름값을 잡기 위해 석유 수출을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러한 전면 통제 조치가 단기 처방에 그칠 뿐, 장기적으로는 미국 정유 산업을 파괴하고 글로벌 경제를 침체로 몰아넣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15일 미국 에너지정보청(EIA)과 현지 매체 등에 따르면, 최근 미 정유 제품 수출량은 일일 820만 배럴로 역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이 걸프발 공급 절벽을 메우기 위해 미국산 디젤과 항공유, 휘발유를 대거 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미국의 에너지 재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반면 미국 내수 시장은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했다. 대규모 수출이 이어지는 동안 미국 내 휘발유 평균 가격은 갤런당 4.5달러(리터당 약 1.2달러)를 돌파하며 2022년 7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캘리포니아주는 갤런당 6.14달러까지 치솟았다.
상황이 악화하자 민주당 로 칸나 하의원 등 정치권을 중심으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석유 수출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 재점화됐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유가 안정이 시급한 만큼, 일단 미국민을 위해 공급을 우선하자는 논리다. 에너지 분석업체 래피단 에너지 그룹은 백악관이 수출 통제 조치를 감행할 확률을 35%로 국한하지 않고 꽤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공식적으로 수출 제한 카드를 검토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이다. 미국의 복잡한 에너지 공급 구조상 수출을 막으면 더 큰 혼란이 야기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 석유 수출국 중 하나이지만, 동시에 매일 650만 배럴의 원유를 수입하는 수입국이기도 하다. 텍사스 등지에서 생산되는 미국산 셰일오일은 유황 성분이 적은 경질유(Light Oil)다. 미국 정유공장들은 휘발유나 디젤을 생산할 때 이 경질유에 캐나다나 중동, 남미 등에서 수입한 중질유(Heavy Oil)를 섞어 쓰는 구조를 갖고 있다. 결국 수입을 멈출 수 없기 때문에 세계 에너지 시스템과 단절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RBN 에너지의 로버트 오어스 부사장은 “수출 금지 조치가 내려지면 당장 다음 주에는 가격이 떨어질 수 있겠지만, 1년 뒤에는 지금과 다를 바 없어질 것”이라며 “오히려 정유공장들이 생산량을 감축하거나 문을 닫는 대혼란을 초래해 장기적으로는 공급 부족으로 가격이 다시 폭등할 것”이라고 전했다.
글로벌 석유 메이저 셰브론의 마이크 워스 최고경영자(CEO) 역시 밀컨 연구소 콘퍼런스에서 “수출 금지나 가격 상한제 같은 조치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될지 몰라도, 역사가 증명하듯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낳는다”고 경고했다.
가장 큰 위험은 글로벌 경제에 미칠 파장이다. 맥쿼리 그룹의 비카스 드위베디 전략가는 “미국이 공급을 끊으면 세계 시장의 유가는 미친 듯이 폭등할 것이고, 전 세계는 순식간에 경기 침체에 빠질 것”이라며 “미국 역시 그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래피단 에너지를 이끄는 밥 맥낼리 역시 “세계의 에너지 보험 창구로서 미국의 명성은 영원히 파괴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