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베트남과는 동행 (同行)…
발전 노하우 전수하던 시대는 끝났다
오토바이 행렬이 강물처럼 흐르는 호치민 도심. 빈 생수통 열댓 개를 묶어 싣고 달리는 오토바이 옆으로, 뒷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여성이 여유롭게 지나간다. 지난 1월 29일 떤선녓(Tan Son Nhat) 공항에 내려 숙소로 향하던 최규철(崔圭哲) 코트라(KOTRA) 호치민 무역관장의 눈에 비친 첫 풍경이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그 짧은 길에서 우리나라 70~80년대의 모습과 2000년대의 모습을 한꺼번에 봤습니다. 고속 성장의 한복판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도착 첫날의 인상을 이렇게 떠올렸다. 덥고 습한 날씨에도 의외로 파란 하늘이 놀라웠다고 했다. “춥고 더운 건 살다 보면 적응이 되는데, 나쁜 공기는 쉽게 적응이 안 되더군요. 그런 면에서 호치민은 다행입니다.”
부임 5개월 차. 입사 26년, 해외 근무만 만 14년을 채운 베테랑 통상 전문가에게도 베트남은 첫 동남아 근무지다. 두바이(UAE)에서 시작해 시드니·멜버른(호주)과 브라티슬라바(슬로바키아)를 거쳐 다섯 번째 임지로 호치민에 닿았다. 본지는 부임 후 처음으로 그를 만나 베트남 시장의 변화, 한국 기업의 기회와 위협, 그리고 코트라가 교민 사회와 어떻게 호흡할 것인지를 두루 물었다. 그는 시종 “기본”과 “현장”이라는 두 단어로 돌아왔다.
“비행시간 10시간 이내 임지는 처음… 친숙한 이웃에 온 느낌”
다섯 개 임지를 거친 그에게 베트남은 어떻게 다를까. 그는 무엇보다 한국과의 ‘거리’를 꼽았다. “사실 비행시간 10시간 이내의 무역관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만큼 한국과 가깝다는 뜻이죠.” 경제·관광·음식·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워낙 밀접하다 보니, 발령을 받았을 때 낯선 곳이 아니라 친숙한 이웃 나라에 간다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이전 근무지와의 차이도 분명했다. 한국과의 비즈니스 관계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던 과거 임지들에서는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에 초점을 뒀다면, 베트남은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형성된 두꺼운 관계를 더 촘촘하게 다지는 전략이 필요한 시장입니다.” 그는 베트남을 한국 기업의 비즈니스가 이미 곳곳에 뿌리내린, ‘심화’가 관건인 시장으로 규정했다.
한국, 베트남 최대 투자국… “누적 989억 달러, 1만 개 기업 진출”
최 관장이 짚은 베트남 시장의 위상은 구체적인 숫자로 뒷받침됐다.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투자(FDI) 프로젝트는 2026년 1분기 기준 1만 447건, 누적 투자액은 989억 달러에 이른다. 한국은 베트남 최대 투자국이고, 진출 기업은 약 1만 개 수준으로 파악된다. 업종은 누적 기준 제조업이 약 73%를 차지하고, 그다음이 부동산경영업과 건설업 순이다.
주목할 변화는 협력의 ‘질’이다. 그는 양국 정상이 강조한 ‘새로운 분야의 협력’을 거론했다. “단순한 생산 파트너를 넘어 AI, 반도체, 에너지, 바이오 같은 미래 산업을 함께 개척하는 ‘동행’의 길을 걷자는 겁니다. 한 단계 높은 차원의 협력이죠.” 베트남이 첨단산업 육성과 디지털 전환에 속도를 내면서, 이 분야에서 한국 기업과의 협력은 더 확대될 것으로 그는 내다봤다.
베트남 정부의 정책 변화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외국인 투자 정책이 첨단산업 유치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베트남은 2025년 법인세법 개정을 통해 기존의 일반 제조·산업단지 중심 혜택보다 반도체, AI, 디지털기술, R&D, 첨단기술 프로젝트에 우대 정책을 집중하고 있다”며 “신규 투자 예정 기업에 대한 법인세 감면 같은 인센티브가 점점 선별적으로 바뀌고 있어, 투자 전에 업종별로 적용 가능성을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솔직한 진단도 덧붙였다. “전통적인 제조 기업 입장에서는 이런 변화가 다소 비우호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통관·세무 애로 가장 많아… 법령 개정 잦아 문의 빗발쳐”
호치민 무역관의 일상은 진출 기업의 ‘애로 처리’와 맞닿아 있다. 무역관은 베트남 남부를 중심으로 한국 기업의 수출 확대와 현지 진출을 지원하는 현장 거점으로, 시장조사와 바이어 발굴, 상담 주선, 유통망 연계, 투자·통상 애로 지원, 경제동향 제공이 주된 일이다.
진출 기업들이 가장 많이 호소하는 애로는 크게 두 갈래다. 수입 통관·관세, 그리고 회계·세무 행정이다. 통관에서는 품목별 HS코드 관세율과 원산지·인증 서류 확인, 통관 지연 문의가 많고, 회계·세무에서는 부가세 환급, 세무조사 대응, 이전가격, 청산 문의가 잦다. 특히 베트남은 법령 개정이 빈번해 바뀐 절차를 확인하려는 문의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무역관은 FTA해외활용지원센터를 운영해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자체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회계·법률 서비스는 자문사를 통해 지원한다.
FTA 혜택을 제대로 누리려면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단순히 관세율만 확인해서는 안 됩니다. HS코드, 원산지 기준, 원산지증명서, 사후검증 가능성까지 함께 관리해야 합니다.” 특히 베트남에서 생산한 뒤 제3국으로 수출하거나 한국·중국·아세안산 원부자재를 함께 쓰는 기업이라면 RCEP의 누적 기준 활용 가능성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품목분류와 원산지 판정자료, 거래계약서, 생산공정 자료를 체계적으로 보관하고 필요시 전문가와 사전 검토를 거치라는 당부다.
‘행정적 역차별’을 두고는 신중하게 선을 그었다. “제도상 베트남이 특정 국가 기업을 차별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통관·세무·인허가·원산지 검증 과정에서 지역별, 담당기관별로 해석 차이나 처리 속도 차이가 생길 수 있고, 기업 입장에서는 그것이 행정 부담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미·중 공급망 재편 “기회이자 위협”… “우회수출 거점 활용은 위험”
대화가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이르자 그는 가장 길게, 그리고 가장 분명하게 말했다. 베트남이 미·중 공급망 재편의 대안 생산기지로 부상하는 흐름을 그는 “기회이자 위협”으로 규정했다.
기회는 분명하다. “베트남은 중국을 보완하는 생산기지로서 전자, 섬유, 가구, 기계부품, 소비재, 물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글로벌 기업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도 현지 생산, 부품 공급, 유통망 진입, 제3국 수출 거점화 측면에서 기회를 넓힐 수 있습니다.” 그는 베트남을 한국 기업의 글로벌 공급망 구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역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곧바로 단서를 달았다. 베트남을 단순한 우회수출 거점으로만 활용하는 방식은 원산지 검증, 통상 규제, 미국의 공급망 투명성 요구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산 원부자재 의존도가 높으면, 베트남에서 생산하더라도 실질적 부가가치와 원산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래서 생산비 절감만 볼 게 아니라 원산지 관리, 공급망 투명성, 현지 부품조달, 품질관리, ESG·노무 기준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력 문제도 빼놓지 않았다. “요즘 인력 확보 문제가 커지고 있습니다. 기업별로 차별화된 인적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에요. 작은 변화가 결코 작지 않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지역별 차별화 전략 “북부는 제조, 남부는 소비·유통, 중부는 신산업”
한국 기업의 활동은 호치민을 넘어 하노이, 다낭으로 확산되고 있다. 최 관장은 지역별 특성이 뚜렷하다고 했다. 북부 하노이권은 전자·전기·부품·물류·첨단 제조업 중심의 공급망이 발달해 대기업 협력사와 제조업 기반 진출이 활발하다. 남부 호치민권은 소비재·유통·서비스·물류·제조업·에너지 인프라 수요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시장이다. 중부 다낭권은 아직 제조업 집적도는 낮지만 IT, 관광서비스, 물류, 스마트시티, 신산업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코트라의 대응도 이런 차이에 맞춰져 있다. “베트남을 하나의 시장으로 보지 않습니다. 북부는 제조·공급망, 남부는 소비·유통·서비스, 중부는 신산업·거점형 시장으로 구분해 접근합니다.” 하노이·다낭·호치민 무역관 간 협업을 강화하고, 기업의 업종과 진출 목적에 따라 적합한 지역과 파트너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교민이 멀게 느낀다는 말, 충분히 이해… 커피 한잔하러 오시라”
교민 사회와 코트라 사이의 거리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주된 지원 대상이 한국 기업의 수출·투자 활동이다 보니 교민 사회와 접점이 제한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수출·투자와 관련해 무역관과 긴밀히 소통하는 교민 기업도 적지 않다며,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소통 기회를 넓혀가겠다고 했다.
일반 교민이 잘 모르는 서비스도 소개했다. 한국인 직원 채용지원 서비스(K-Move)는 이미 많은 교민 기업이 활용하고 있고, 무역관 안 FTA활용지원센터를 통해 관세·세제·통관 정보를 언제든 받을 수 있다. “무역관은 모든 분께 열려 있습니다. 서비스 수혜 여부와 관계없이 들러주시면, 따뜻한 커피 한잔하면서 무슨 방법이 있을지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교민 경제단체와의 협력도 넓혀가고 있다. 최근 코참(KOCHAM)과 협업해 진출 기업 애로를 파악하고 FTA 오프라인 세미나를 열었으며, 하반기에는 총영사관·코참·코트라가 공동으로 ‘호치민시와의 대화’를 준비해 애로 제기와 정책 제안을 진행할 예정이다.
“Don’t Crack Under Pressure”… 26년을 버틴 한 문장
인터뷰 후반, 개인적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자 그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26년 커리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으로 그는 망설임 없이 첫 해외 근무지 두바이를 꼽았다. “2003년 3월 말 도착했는데, 공항 문을 나서는 순간 열기와 습도가 엄습하더군요. 그때 아내가 제 얼굴을 쓰윽 보는데,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이런 곳에 나를 끌고 오다니’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첫 해외근무라 어려움이 많았지만 많은 일을 했고, 아이 셋 중 둘을 그곳에서 얻었다고 했다.
세 번째 임지였던 브라티슬라바도 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2015년 무역관 개설요원으로 파견 나가 3개월 만에 무역관을 열었다. 코트라가 86개국에 132개 무역관을 운영하지만 개설요원 파견은 매우 드문 경우다. 법적 지위 확보부터 사무실 물색과 인테리어, 직원 채용, 네트워크 구축까지 무에서 유를 만드는 과정이라 스트레스가 컸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어느 제품의 광고 문구였다. “‘Don’t Crack Under Pressure (압박에 무너지지 마라).’ 지금도 힘든 상황에 처할 때마다 이 문구를 되새깁니다.”
호치민에서의 일상도 ‘땀’과 연결돼 있다. 안과 밖의 온도차가 심해 건강관리가 필수라는 그는, 숙소 수영장에서 일주일에 두세 번 출근 전 수영을 하고 지인 소개로 테니스 동우회에도 가입했다. “온도차가 큰 환경일수록 어떤 운동이든 정기적으로 땀을 빼는 걸 권합니다.”

“발전 노하우 전수하던 관점은 끝… 동등한 동반자로”
마지막으로 그는 씬짜오베트남 독자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목소리에 무게가 실렸다. “베트남만큼 한국의 위상이 높은 지역도 드뭅니다. 다른 지역에서 근무할 때는 알게 모르게 인종차별을 느낀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곳에서는 현지 기업과 기관 사람들에게 ‘한국 덕분에 베트남이 이만큼 성장했다’는 고맙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이런 곳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 참 다행이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분위기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자신이 알던 과거의 베트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경제 등 많은 분야에서 빠르게 변하고 있고, 베트남이 한국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지고 있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발전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관점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 미래를 함께 여는 ‘동행’의 관점으로 베트남과 함께해야 합니다. 그 역할을 이곳 교민과 진출 기업이 최전선에서 보여주셔야 합니다. 함께 가야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말처럼, 한국과 베트남은 더 멀리 함께 가야 할 전략적 동반자입니다.”
그는 한국과 베트남의 인연을 무역관의 역사로 매듭지었다. 호치민 무역관은 양국 수교(1992년 12월 12일) 직전인 1992년 11월 23일 문을 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64년 10월 사이공 무역관을 열어 1975년 사이공 함락 때까지 운영하다, 남베트남 공산화로 폐쇄됐다가 1992년 재개소한 역사를 품고 있다. “사이공 시절에도 상황에 맞게 역할을 다했을 것이고, 베트남이 변화하면서 무역관의 역할도 진화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부임 5개월. 그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말을 인터뷰 내내 두 번, 세 번 반복했다. 지원 정책과 서비스는 상황에 맞게 변하지만 변치 않는 것은 ‘고객만족’이고, 그것이 곧 ‘기본’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재임 기간에 현지 기업을 최대한 많이 만나,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우리 기업과 매칭하는 데 힘을 쏟겠습니다. 그래야 성과가 납니다.” 개인의 안녕과 기업의 발전을 기원한다는 인사로 그는 인터뷰를 맺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