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이공계의 무게중심이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 미국의 연구 환경이 흔들리는 사이 아시아 명문대들이 세계적 석학을 빨아들이고, 아시아의 최상위 인재들도 미국 대신 역내 대학을 택하기 시작했다. 올해 베트남 수능 공동 수석이 미국 대학을 마다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을 선택한 것은 이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을 떠나는 과학자들
변화의 진원지는 미국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출범 초부터 연방 연구개발 (R&D) 예산을 대폭 줄이려 했다. 국립보건원(NIH) 예산을 30% 이상, 국립과학재단 (NSF) 예산을 50% 이상 삭감하는 급진적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여기에 반이민 기조와 중국계 연구자에 대한 비자·수사 압박이 겹치면서 미국을 떠나는 과학자가 늘고 있다.
미국 뉴욕포스트 분석에 따르면 2024년 이후 최소 105명의 미국 최정상급 과학자가 중국행을 택했다. 이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바이오·의학 분야로, 의료 혁신에서 미국을 따라잡으려는 중국의 투자와 맞물린다. 우주과학과 기후, 컴퓨터, 반도체 같은 핵심 분야 인재도 포함됐다.
수용하는 쪽은 아시아다. 중국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귀국한 중국 인재는 53만6천 명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하버드대 통계학 종신교수이자 미국 국립과학원 회원인 류쥔(劉軍) 교수는 지난해 8월 칭화대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데이터과학과 인공지능(AI) 분야의 권위자다.
▲ 류쥔 교수 (왼쪽) 칭화대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긴 하버드 통계학 종신교수 류쥔
알테어(Altair)에서 소프트웨어 개발 수석부사장을 지낸 미국 국립공학한림원 회원 저우밍(周明)은 보잉 787과 에어버스 A380·A350의 핵심 설계 소프트웨어에 기여한 구조 최적화 분야의 대가로, 2025년 중국 닝보동방이공대 석좌교수 겸 공학부 주임으로 부임했다.
신생 사립 연구중심대학인 서호대(西湖大)의 영입도 두드러진다. 2018년 저장성 항저우에 설립된 이 대학에는 프랑스 파리시테대 수학과 교수였던 천화이(陳華一), 호주국립대에서 20년간 재직한 수학자이자 호주과학원 회원인 왕쉬자(汪徐家), 미국 베일러의대 해부교육센터장이던 장샤오밍(張曉明) 등이 합류했다.
▼ 저우밍교수
출처:닝보동방과학기술대학교 홈페이지
▲ 보잉 787, 에어버스 350항공기 소프트웨어를 설계한 저우밍 박사의 모습
“황금 같은 기회”… 홍콩의 공세
가장 공격적으로 움직이는 곳은 홍콩이다. 홍콩과기대(HKUST)는 아이비리그 학생들에게 공개적으로 러브콜을 보내 7명에게 입학을 제안했고, 이 가운데 6명이 장학금과 함께 이를 받아들였다. 찰스 응(Charles Ng) HKUST 부총장은 트럼프 행정부의 단속이 유능한 교수들까지 미국 밖으로 밀어내면서 홍콩이 세계적 학자를 영입할 “황금 같은 기회”를 맞았다고 말했다.

▲ 사진: 홍콩 과기대 모습
이런 자신감은 순위 상승에 뿌리를 둔다. QS 세계대학순위 2026에서 홍콩 대학 5곳이 100위권에 들었고, 홍콩대(HKU)는 세계 11위로 뛰어올라 중국계 대학 사상 최고 순위를 기록했다. 컴퓨터과학부터 경영학까지 미국의 인기 전공과 겹치는 분야에서 강세를 보이며 ‘하버드 난민’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평가다.
홍콩 정부도 뒷받침에 나섰다. 고등교육에 연 200억 홍콩달러 이상을 배정하고, 지난해 11월부터 비현지 학부생의 시간제 취업 제한을 풀어 졸업 후 정착을 유도하고 있다. 호텔과 상업용 건물을 학생 기숙사로 전환하는 절차도 간소화했다.
QS 아시아 순위가 보여주는 지형 변화
지난해 11월 발표된 QS 아시아대학순위 2026은 이 지형 변화를 압축해 보여준다. 홍콩대가 처음으로 아시아 1위에 올라 베이징대(2위)를 제쳤고, 싱가포르의 싱가포르국립대 (NUS)와 난양공대 (NTU)가 공동 3위에 나란히 올랐다. 상위 10위 안에 홍콩 대학 5곳이 포함돼 홍콩은 역대 최고 성적을 냈다.
세계 순위에서도 아시아의 약진이 뚜렷하다. 중국 본토에서는 칭화대가 세계 17위로 올라섰고 푸단대는 30위로 아홉 계단 뛰었다. 중국 본토 대학 5곳이 100위권에 들었다. 싱가포르는 NUS 8위, NTU 12위로 두 곳 모두 15위권에 자리했다.
한국도 이 흐름에 함께한다. QS는 한국이 중국과 함께 20위권에 가장 많은 대학을 올린 나라라고 평가했다. 100위권 한국 대학 15곳 중 12곳이 순위를 끌어올렸다.
베트남 수능 수석의 선택
이 변화가 개인의 진로에서 드러난 사례가 올해 베트남에서 나왔다. 베트남 교육훈련부가 지난 7월 1일 발표한 고교 졸업시험 결과에서 하노이사범대 부속 영재고 12학년 호앙 흐엉 장(Hoàng Hương Giang·18)은 A01(수학·물리·영어) 조합 30점 만점에 29.75점을 받아 전국 공동 수석에 올랐다. 그는 SAT 만점(1천600점)과 IELTS 8.0을 갖춰 미국 명문대에 지원할 조건을 충분히 갖췄고, 서울대(SNU)로부터 전액 장학금 제안도 받았다.
그러나 그는 AI 전문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위해 카이스트 컴퓨터과학과를 택했다. 장은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 강국이자 성장 잠재력이 크다”며 대학과 기업의 긴밀한 산학협력, 베트남과의 문화적 유사성, 안전한 환경을 고려해 유학지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는 모든 전공 과목이 영어로 진행되는 점,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대전의 연구 환경도 선택 이유로 꼽았다.
▲ QS 아시아 대학순위 2026 사진 대부분의
상위권 학교는 중화권지역이며 한국의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
서울대, 한양대도 20위권안으로 진입했다
카이스트는 QS 2026 세계 53위, 아시아 12위에 올라 있다. 김용현 카이스트 입학처장은 이 대학이 2025년부터 베트남 학생 모집을 시작했으며, 반도체 분야 대학원 장학 프로그램(글로벌 EPSS)을 포함해 여러 산학협력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우수 학생을 끌어들이기 위해 국제화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인재가 미국으로 향하던 시대는 끝나는가?
빛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미국에서 논문 조작으로 조사받던 학자들이 칭화대 등 명문대에 그대로 영입된 사례가 보도되며 검증 부실 논란이 일었다. 미국 마릴랜드대 종신교수였던 한 인사는 논문 조작으로 조사·철회를 겪고도 2026년 2월 칭화대 선전국제대학원 정교수로 임용됐다. 급속한 인재 영입 경쟁이 질 관리라는 숙제를 함께 안겨준 셈이다.
그럼에도 큰 흐름은 분명하다. 세계 이공계 인재가 미국으로 향하던 시대에서, 아시아가 인재를 끌어당기고 붙잡는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 석학은 아시아로 모여들고, 아시아의 최상위 인재는 굳이 서구로 떠나지 않는다. 베트남 수능 수석의 선택은 그 변화의 작은 단면이다.
▲ 미국 명문대와 서울대를
거절하고 카이스트를 선택한 베트남 수능 수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