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 최대 도시인 호치민시, 이달 들어 주유소마다 오토바이 부대가 길게 늘어선 모습을 보는 것이 일상이 됐다. 일부 주유소에는 휘발유 재고 소진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었고, 한 번에 주유할 수 있는 금액을 제한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가 불거지며 국제 유가가 들썩이자, 베트남 내 석유 수급에 대한 우려가 즉각 주유소 현장의 긴장감으로 이어진 것이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에 이은 동남아 3대 산유국 베트남. 자국 해역에서 매일 막대한 양의 원유를 뿜어내고 이를 가공할 대형 정유소도 가동 중이지만, 중동 사태에 애태우며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베트남 에너지 시장 특유의 수출입 구조와 막대한 수입액, 정유 설비의 기술적 한계를 짚어본다.
‘원유 트레이드 최적화’ 이면에 숨은 높은 수입 의존도
베트남이 자국산 원유를 두고 수입산을 쓰는 배경에는 경제적 부가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원유 트레이드 최적화’ 전략이 자리 잡고 있다.
베트남 해역에서 생산되는 주력 유종인 ‘백호(Bach Ho)’ 원유는 황 성분과 불순물이 적은 고품질 경질유다. 정제 과정이 비교적 수월하고 휘발유, 항공유 등 고부가가치 제품의 생산 수율이 높아 국제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베트남은 이처럼 시장 가치가 높은 자국산 원유를 전략적으로 수출하여 외화를 확보하고,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대신 내수용 석유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중동 등지에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중질유를 수입한다. 현재 베트남 내 2곳의 대형 정유소가 가동되고 있음에도, 빠르게 증가하는 국내 휘발유·경유·항공유 등 석유제품 소비량의 약 30%는 완제품 형태로 한국과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지의 수입분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이 정유소들을 가동하기 위해 투입되는 원유의 약 80%를 수입산이 차지할 만큼 수입 의존도가 높은 상황이다.
수입 다변화 발목 잡는 설비의 ‘기술적 경직성’
최근 중동 지역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베트남 정부는 베네수엘라산 원유 등 공급망 다변화를 적극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현장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두 핵심 정유 시설이 가진 기술적 경직성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최대 정유 시설인 응이선(Nghi Son) 정유소는 설계 단계부터 쿠웨이트산 중질유 정제에 최적화되어 건설됐다. 공정 자체가 특정 유종에 맞춰져 있어, 공급망에 차질이 생겼다고 해서 곧바로 베네수엘라 등 타 지역의 원유로 대체하는 것은 기술적인 무리가 따른다.
국산 경질유를 주로 처리하기 위해 지어진 융꿧(Dung Quat) 정유소의 상황도 복잡하다. 융꿧 정유소의 핵심 공급원인 백호 유전의 생산량은 2002년 연간 1,350만 톤으로 정점을 찍은 뒤 자연 감소에 접어들어, 최근에는 전성기의 6분의 1 수준인 약 220만 톤 언저리로 줄어들었다. 국산 원유 공급이 감소하자, 융꿧 정유소는 불가피하게 수입산 원유를 혼합 정제하는 블렌딩(Blending) 방식을 도입했다. 국산 원유와 수입 원유를 적절히 배합해 설비 효율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지만, 꾸준히 증가하는 내수 수요를 온전히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연간 145억 달러 수입…외환 시장과 금융권 리스크로 전이
이러한 에너지 수급의 불균형은 실물 경제를 넘어 외환 시장과 금융권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미친다. 원유 및 석유 완제품의 수입 대금은 주로 달러로 결제되는데, 국제 유가가 상승하면 수입을 위한 국가적인 달러 수요가 늘어나게 된다.
실제 수입액 규모를 보면 그 파장을 짐작할 수 있다. 베트남 해관국(세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베트남은 정제용 원유 수입에 약 77억 달러, 내수용 석유제품(휘발유·경유 등) 수입에 약 68억 달러를 지출했다. 한 해에만 총 145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외화가 에너지 수입을 위해 사용된 셈이다. 특히 올해 초 석유제품 수입액이 전년 동기 대비 크게 증가한 것은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을 잘 보여준다.
시장에 달러 수요가 집중되면 베트남 동화(VND) 가치가 하락하고 환율 변동성이 커진다. 이는 현지 은행권의 경영 환경에 직접적인 하방 압력으로 작용한다. 환율이 불안정해지면 은행의 외환 매매 수익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대외 자금 조달 비용 상승을 유발해 금융 시스템 전반의 긴장감을 높이는 요인이 된다.
설비 유연성과 포트폴리오 다변화, ‘에너지 자립’을 향한 과제
결국 베트남이 산유국의 딜레마를 극복하고 외부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필수적이다. 국영 페트로베트남(Petrovietnam) 산하 베트남석유연구소 부소장을 지낸 에너지 전문가 응웬 홍 민(Nguyen Hong Minh) 박사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장기적인 에너지 안보를 확보하기 위한 네 가지 핵심 전략을 제시했다.
민 박사는 첫 번째로 국산 원유 확보를 위한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호 유전 등 기존 유전의 생산량 감소를 방어하기 위해 신규 유전 탐사와 개발에 대한 투자를 획기적으로 늘려 국산 원유 자급률을 다시 끌어올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는 수입 원유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가장 본질적인 방어막이 될 수 있다.
그는 이어 정제 설비의 현대화가 뒤따라야 한다고 조언했다. 특정 국가의 원유에만 최적화된 응이선 정유소 등의 설비를 개선해, 어떤 유종이 들어와도 정제가 가능한 기술적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 박사는 “시설의 유연화가 이루어져야만 중동 사태 같은 돌발 변수 시 베네수엘라 등 유종이 다른 원유로 수입을 다변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에너지 포트폴리오의 다변화 역시 중요한 축이다. 민 박사는 최근 정부가 장려하는 에탄올 혼합유(E10, E15) 등 바이오 연료 확대를 단순한 환경 정책이 아닌, 경제 안보 차원의 포석으로 평가했다. 바이오 연료 비중을 높임으로써 화석 연료 수입량을 줄이고, 결과적으로 외환 시장과 금융권에 가해지는 압력을 분산시킬 수 있다는 분석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비한 국가 석유 비축량 확대를 강력히 제언했다. 현재의 수급 불안은 비축 시스템이 외부 충격을 흡수할 만큼 충분하지 못하다는 방증인 만큼, 장기적인 관점에서 전략적 비축 기지를 확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앞마당에서 원유를 퍼 올리는 1차원적 산유국 모델은 이제 한계에 직면했다. 정제 인프라의 기술적 진보와 친환경 에너지로의 전환을 통해 대외 의존도를 낮추는 것. 짙어지는 글로벌 지정학적 불확실성 속에서, 베트남은 에너지 안보 확보를 향한 중요한 구조적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