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성지 메카에서 중동 안보 지형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서명식이 열렸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 셰바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한자리에 모여 ‘메카 공동 방위협정'(Mecca Joint Defence Agreement)에 서명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군사력 2위인 튀르키예, 이슬람권 유일의 비공식 핵보유국 파키스탄, 그리고 막대한 석유 자본을 쥔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의 결합은 그 자체로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들 무슬림 수니파 3개국이 맺은 협정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단연 ‘집단방위’ 조항이다. “3국 중 한 국가에 대한 공격을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선언은 이 협정이 단순한 군사 교류를 넘어 굳건한 군사 동맹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시사한다.
영국 킹스칼리지 런던 전쟁학부의 나와프 오바이드 수석 연구원은 이를 두고 “포스트 아메리카 중동의 시작”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글로벌 안보의 절대적 축이었던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지역 국가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방위 아키텍처를 스스로 구축하려는 움직임이라는 해석이다.
하지만 이 거창하고 화려한 수사의 이면에는 각국의 철저한 각자도생과 엇갈린 셈법이 자리 잡고 있다. 안보 전문가들은 협정을 체결한 3개국의 진짜 속내가 상징적 선언보다는 방위산업, 정보 공유, 군사 훈련 등을 다룬 실무적 부속 조항들에 더 노골적으로 반영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 ‘방산 큰손 고객’ 사우디를 겨냥한 튀르키예
먼저 이번 협정의 ‘방위산업 협력 및 기술 이전’ 조항을 보면 튀르키예의 뚜렷한 목적의식이 드러난다. 방산 강국으로 도약 중인 튀르키예의 시선은 철저히 사우디의 두툼한 지갑을 향해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서명 직후 “이번 협정은 방산 분야의 공동 프로젝트를 지원할 것”이라고 공언한 대목이나, 튀르키예 대통령실이 이번 협정의 핵심 성과로 ‘방위산업 협력’을 콕 집어 언급한 것은 이러한 속내를 엿보게 한다.
이미 2023년 사우디와 역대 최대 규모의 드론 수출 계약을 맺었던 튀르키예로서는, 거대한 ‘이슬람 방산 블록’을 양산할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큰손’을 제도적으로 묶어둔 셈이다.
튀르키예는 동시에 이란과의 전면전을 감수하면서까지 사우디를 방어할 군사적 의지는 조심스럽게 조절하고 있다. 하칸 피단 튀르키예 외무장관은 이번 조약을 두고 “기술적으로 나토 5조(집단방위)와 같지만, 피해 수준에 맞춰 군수 지원이나 병력 투입 여부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며 자동 참전 논리에 선을 그었다.
결국 무기 수출과 자국 방위산업의 고도화라는 확실한 경제적 실리는 챙기되, 이란 등과의 직접적인 안보 리스크는 최소화하겠다는 실용적인 계산이 깔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해석이다.
◇ 안보 기여 대가로 경제위기 넘으려는 파키스탄
‘대테러 및 비대칭 위협 정보 공유’와 ‘정례 합동 훈련’ 조항은 심각한 경제난에 허덕이는 파키스탄의 처절한 생존 전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국가 부도 위기에 몰린 파키스탄에 이번 협정은 사우디의 구제금융을 끌어내기 위한 생명줄에 가깝다는 해석이 많다.
실질적인 움직임도 이미 시작됐다. 군사 전문 매체와 외신에 따르면, 파키스탄은 이미 지난 5월부터 8천여 명의 병력과 전투기, 방공 시스템 등을 사우디에 배치하며 안보 기여도를 적극적으로 증명해 왔다.
사우디가 겪는 예멘 후티 반군의 위협 등 비대칭 전력 대응에 필요한 전술 정보와 병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보장받으려는 노골적인 거래인 셈이다.
협정 체결 직후 이슬라마바드 시내에 3국 국기가 내걸리고 축하 행진이 벌어지는 등 환호했지만, 전문가들은 파키스탄의 핵 교리와 정규군의 시선이 여전히 적성국인 인도에 고정되어 있기에 중동 화약고에 선뜻 핵우산을 내어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분석한다.
◇ ‘국방 협력 입체화’ 꿈꾸는 사우디
가장 정교한 외교전을 펼친 곳은 사우디다. 최근 후티 반군의 재부상과 이란발 갈등 속에서 기존 방위망의 취약성을 체감한 사우디는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안보를 여러 국가로 분산시켜 위험을 줄이는 고도의 ‘전략적 다중화’를 택했다.
이는 사우디 측의 공식 입장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사우디 당국자는 AP통신 등을 통해 “이번 협정은 핵무기 야망이나 종파적 블록을 형성하려는 것이 아니며, 미국 등 기존의 국제 파트너십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립적이고 지속 가능한 국방력을 구축하려는 노력”이라고 강조했다.
첨단 무기와 글로벌 억지력을 위해서는 여전히 미국과의 연결 고리를 유지하되, 부족한 실전 병력과 훈련 지원은 파키스탄에서 채우고 작전 경험과 방산 기술은 튀르키예와 연대하는 입체적인 퍼즐을 맞춘 셈이다.
나아가 이번 협정의 이행을 감독할 상설 사무국을 사우디에 두기로 한 것 역시 새로운 다자간 안보 체제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리야드의 주도면밀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 ‘공동의 적’ 없는 3개국의 모호한 군사 연합…나토와는 다르다
명확한 ‘공동의 적’이 없는 3개국이 각자의 안보 및 경제적 필요에 따라 결합했다는 사실은 이번 협정을 ‘강력한 요식행위’로 보는 시각에 힘을 싣는다.
나토가 갖춘 통합 방공망이나 합동 지휘 체계가 전혀 구축되어 있지 않은 데다, 군사 교리가 완전히 다른 세 나라의 군대가 실제 전장에서 하나의 연합군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현 단계에선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구체적인 군사 작전 지침이 철저히 비공개에 부쳐진 사실은, 이 협정이 외부 공격에 대한 3국의 즉각적인 공동 대응 시스템이라기보다는 상징적 억지력 차원이라는 분석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후티 반군의 사우디 공격이 튀르키예와 파키스탄의 자동 참전으로 이어져 중동 전쟁으로 확대될 것이란 식의 관측은 협정의 실체와 다소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만, 역설적으로 이 협정이 지닌 군사적 모호성 자체가 억지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분석도 있다.
당장 내일 연합군을 꾸려 전쟁을 치르겠다는 뜻은 아니더라도, 이질적인 3개국이 강력한 조약으로 묶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역내 잠재적 적국들에는 전술적 모호성과 셈법의 혼란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사우디에 공식적인 핵우산을 씌우지 않더라도, 조약 문구에 담긴 모호함이 이란을 비롯한 주변국들에는 넘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선’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불확실성으로 요동치는 중동에서 사우디, 파키스탄, 튀르키예 3국은 각자의 ‘동상이몽’을 안고 메카 협정에 서명했다.
이들 3개국이 그려낸 새로운 억지력의 방정식이 단발성 선언에 그칠지, 아니면 다극화 체제로 진입하는 중동 안보 지형의 룰을 근본적으로 뒤바꿀지에 전 세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