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로 국수를 만든다고?

흔해빠진 쌀국수가 30년전만해도
동북아시아에서는 진귀한 음식 취급받은 이유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지금으로 부터 약 30년전에는 쌀국수는 굉장히 신기한 음식이었다. 특히 국수를 먹는데 밀가루가 아니니까 속이 편하다고 좋아하던 부모님의 얼굴이 지금도 선명할 지경이다. 지금은 흔해 빠져서 30년전 한국에서는 신기한 음식으로 취급되었다는 점을 다들 잊어버린거 같지만. 한국이 속한 동북아시아에서는 쌀국수는 흔한음식이 아니었다.
한국, 중국, 일본은 인류 역사에서 쌀 농경을 가장 오래, 가장 정교하게 발전시켜 온 문명권이다. 수천 년 동안 쌀은 이 세 나라 사람들의 밥상 한가운데 놓인 주식이었다. 그런데 기묘한 역설이 있다. 바로 그 쌀로 국수를 만드는 문화는 이 세 나라에서 거의 발전하지 못했다. 반면 지금 전 세계인이 즐겨 먹는 쌀국수는 동남아시아의 열대 식탁에서 꽃을 피웠고. 한 그릇의 쌀국수 안에는 12세기 중국의 전쟁사, 동남아시아의 기후학, 그리고 20세기 인도차이나의 비극이 켜켜이 녹아 있다.

모든 것은 12세기 금나라의 침략에서 시작됐다

쌀국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출발점은 동남아시아가 아니라 중국 대륙의 한가운데에서 만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인 12세기,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가 중원을 장악하면서 송(宋)나라를 양쯔강(揚子江) 이남으로 밀어붙였다.
밀국수를 즐겨 먹던 화북(華北) 사람들이 강남(江南) 땅에 정착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강남은 밀 재배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었다. 사시사철 따뜻하고 습윤한 이 지역은 밀 대신 벼가 잘 자라는 환경이었다. 국수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들은 궁여지책으로 쌀로 면을 뽑아내는 방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남송(南宋, 1127~1279)의 수도 항저우(杭州)는 인구 100만을 넘어서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고, 그곳의 북방 이민자들이 쌀국수를 만들어 먹었다는 것이 중국 면 문화의 역사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새로운 음식은 곧 양쯔강 이남 전역으로 퍼졌다. 중국 남부의 대표적인 볶음 쌀국수인 ‘차 꾸에아 탸오(炒粿條, 초과조)’는 이후 동남아시아로 건너가 태국의 ‘꾸어이띠어우 팟’이 됐고, 오늘날 태국을 대표하는 국민 음식 ‘팟 타이(ผัดไทย)’의 원형이 됐다. 전쟁이 만들어낸 음식 문화가 수백 년에 걸쳐 동남아시아 식탁을 재편한 것이다.

고려와 일본에는 왜 전파되지 않았나 – 쌀의 용도가 정해져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송나라와 활발히 교류하던 고려와 일본에는 쌀국수 문화가 전파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밀이나 메밀로 만든 국수 문화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밀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이전으로 추정되며,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를 방문하고 저술한 『고려도경(高麗圖經, 1123)』에는 “나라에 소맥(小麥, 밀)의 산출이 적어 값이 비싸서 성례(盛禮)에서만 쓴다”는 기록이 나온다. 밀이 귀했기 때문에 밀로 만든 국수는 잔치 음식, 즉 ‘잔치국수’였다. 평민들이 일상에서 먹을 수 없는 특별식이었던 것이다.

고려도경 사본

국수 문화를 보완한 것은 메밀이었다. 메밀은 벼가 자라기 어려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이었다. 한반도의 냉량한 고지대에서 재배되는 메밀은 국수 재료로 활용되며 밀을 대신했다. 결국 동북아시아에서는 ‘쌀은 밥, 국수는 밀·메밀’이라는 역할 분담이 수천 년에 걸쳐 고착되었다. 14세기 고려의 외국어 학습 교재 『번역노걸대(飜譯老乞大)』에 ‘국슈(국수)’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할 때부터, 이 단어는 이미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가마쿠라 시대에 중국 송나라로 유학한 승려 엔니(円爾)가 중국에서 국수 제조 기술을 배워 일본에 들여왔는데, 그것 역시 밀이나 메밀을 사용한 것이었다. 쌀국수는 아예 유입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쌀은 밥이었고, 국수는 밀이었다. 이 공식을 깨뜨릴 이유가 이 나라들에는 없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쌀국수가 전무했던 이유인 메밀의 모습

국수 문화를 보완한 것은 메밀이었다. 메밀은 벼가 자라기 어려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이었다. 한반도의 냉량한 고지대에서 재배되는 메밀은 국수 재료로 활용되며 밀을 대신했다. 결국 동북아시아에서는 ‘쌀은 밥, 국수는 밀·메밀’이라는 역할 분담이 수천 년에 걸쳐 고착되었다. 14세기 고려의 외국어 학습 교재 『번역노걸대(飜譯老乞大)』에 ‘국슈(국수)’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할 때부터, 이 단어는 이미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가마쿠라 시대에 중국 송나라로 유학한 승려 엔니(円爾)가 중국에서 국수 제조 기술을 배워 일본에 들여왔는데, 그것 역시 밀이나 메밀을 사용한 것이었다. 쌀국수는 아예 유입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쌀은 밥이었고, 국수는 밀이었다. 이 공식을 깨뜨릴 이유가 이 나라들에는 없었다.

동남아시아 – 밀이 자라지 않는 땅, 쌀이 넘치는 땅

동남아시아의 사정은 완전히 달랐다. 연평균 기온 25도를 넘는 열대·아열대 기후에서 밀은 재배 자체가 불가능하다. 밀은 겨울의 저온을 거쳐야 성숙하는 작물이기 때문이다. 반면 이 지역의 쌀은 이모작, 삼모작이 가능할 만큼 풍성하게 생산되었다. 베트남 하나만 보더라도 메콩강 삼각주 지역은 베트남 전체 쌀 생산량의 50%를 책임지며, 끼엔장(Kiên Giang) 성 하나가 연간 430만 톤의 쌀을 생산해 대한민국 전체 쌀 생산량에 육박한다.
이런 환경에서 쌀국수 문화가 전파되었을 때,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밀이 없으니 밀국수를 만들 이유가 없었고, 쌀은 넘쳐 흘렀다. 거기에 무덥고 습한 열대우림 환경에서 수백 년에 걸쳐 발전해온 향신료 문화 – 고수, 라임, 팔각, 계피, 레몬그라스, 피시소스 – 가 더해지면서 동남아시아의 쌀국수는 동아시아의 어떤 국수와도 판이하게 다른 독자적인 풍미 체계를 완성했다.

쌀의 품종이 운명을 갈랐다 – 아밀로스 함량의 과학

그런데 문화적·지리적 이유만으로는 이 현상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쌀의 품종이 다르다는 것이다.
쌀은 크게 두 가지 품종으로 나뉜다. 동북아시아가 재배해 온 ‘자포니카(japonica, 단립종)’와 동남아시아 및 중국 남부에서 재배해 온 ‘인디카(indica, 장립종)’다. 자포니카는 낱알이 짧고 둥글며 찰기가 강하다. 반면 인디카는 낱알이 길고 가느다란 모양이며, 밥을 지었을 때 밥알이 흩어지는 특성을 가진다.
이 차이의 핵심은 전분 성분인 ‘아밀로스(amylose)’의 함량이다. 아밀로스는 쌀가루를 가열했을 때 단단한 겔(gel)을 형성하는 성분으로, 함량이 높을수록 면이 탱탱하고 끊어지지 않는 국수를 만들기에 유리하다. 농촌진흥청 연구에 따르면 자포니카 쌀의 아밀로스 함량은 17~20%에 불과한 반면, 동남아시아의 인디카 쌀은 25~30%에 달한다. 쌀국수 등 제면용 가공에는 아밀로스 함량이 25% 이상이어야 적합하다는 것이 관련 연구의 정설이다.
즉, 자포니카 쌀로 국수를 만들면 탄성이 부족해 면발이 쉽게 끊기고, 조리 과정에서 전분이 과도하게 용출되어 국물이 걸죽해진다. 먹기도 어렵고 외관도 좋지 않다. 반면 인디카 쌀은 아밀로스 함량이 높아 면을 뽑았을 때 탱탱하고 매끄러운 형태를 유지한다. 찰기 없이 흩어지는 단점이 밥으로는 낮은 평가를 받는 인디카 쌀이, 역설적으로 국수로 만들었을 때는 훨씬 우수한 결과를 낸 것이다.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쌀의 약 85%가 인디카이고, 자포니카는 15%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이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품종의 차이는 동북아시아에서 쌀국수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없었던 가장 물리적이고 과학적인 이유다. 한국의 자포니카 쌀로 쌀국수를 만들려는 시도가 현대에 와서야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품종 개량과 현대 식품공학의 힘을 빌려서야 비로소 자포니카 품종으로도 국수 형태를 만들 수 있게 됐다.

‘퍼(Phở)’의 탄생 – 중국 광둥, 프랑스 식민지, 그리고 베트남 노동자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쌀국수, 베트남의 ‘퍼(Phở)’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드라마틱하다.
퍼의 기원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경쟁한다. 첫 번째는 중국 광둥(廣東)계 기원설이다. 하노이에 거주하던 중국계 이민자들이 만들어 팔던 쇠고기 쌀국수인 ‘응아우육판(牛肉粉, ngau yuk fan)’이 베트남화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설에 따르면 ‘퍼’라는 이름도 광둥어로 편편한 쌀국수를 뜻하는 ‘판(粉, fan)’에서 파생됐다.
두 번째는 프랑스 기원설이다. 프랑스 식민 통치 시기에 베트남 주둔 프랑스군이 즐겨 먹던 쇠고기 스튜 ‘포토푀(Pot-au-Feu)’가 베트남화된 것이라는 설이다. ‘퍼’라는 발음이 ‘Feu(불)’와 유사하다는 점, 그리고 구운 양파와 생강을 육수에 사용하는 조리법이 프랑스 야채수프 방식과 일치한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
현재 학계에서는 두 설 모두 타당성이 있다는 입장이 우세하다. 퍼의 ‘면’ 자체는 중국 남부, 특히 광둥 지역의 쌀국수 문화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고, ‘소뼈를 우려낸 육수’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소를 농업용 일꾼으로 여겨 식용으로 도축하는 일이 드물었다. 프랑스군이 베트남에 주둔하면서 형성된 소고기 시장이 퍼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이다.

현존하는 기록상 퍼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06년이다. 하노이 남동쪽 항구 도시인 남딘(Nam Định)에서 인도차이나 최대 규모의 섬유 공장 건설이 시작되면서 전국에서 몰려든 수만 명의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음식 장사가 활성화됐고, 이 과정에서 퍼가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설이다. 1913년에는 프랑스인 화가 모리스 살게(Maurice Salge)가 하노이 길거리에서 대나무 지게에 식재료와 숯불을 담아 어깨에 메고 다니며 퍼를 파는 행상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 전문 쌀국수 식당이 하노이 곳곳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중국 광둥의 면, 프랑스의 육수 조리법, 그리고 베트남 특유의 팔각·계피·피시소스 향신료 체계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퍼는, 결코 어느 한 나라의 음식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 하노이의 다층적 문화가 만들어낸 복합적 창조물이었다.

모리스 살게 그림에 나오는 퍼 노점상의 모습

쌀국수 한 그릇은 왜 만들기가 이렇게 힘든가

쌀국수가 동북아시아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만들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밀가루는 물만 넣고 반죽하면 글루텐이 생성되어 자연스럽게 면 형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쌀은 다르다. 글루텐이 거의 없는 쌀가루 반죽은 찬물에서는 전혀 뭉치지 않는다. 콩가루에 가까울 정도로 안 뭉치는 성질 때문에 제면 과정은 상당한 기술과 노동을 요구한다.


전통 방식에 따르면 먼저 불린 쌀을 곱게 갈아 물처럼 만든 뒤, 이것을 촘촘한 거름망에 담아 수분을 제거하고 숙성시킨다. 숙성이 끝나면 다시 물을 가해 적절한 농도의 반죽을 만들고, 이를 스팀 찜기 위에 얇게 펴서 쪄낸다. 쪄낸 반죽은 대나무 쟁반에 올려 햇빛에 말린 다음 가공한다. 얇게 떠내면 라이스 페이퍼(bánh tráng)가 되고, 두텁게 떠서 칼로 자르면 넓적한 쌀국수 면이 된다. 가는 면을 만들 때는 쌀가루 익반죽을 구멍 뚫린 체에 밀어 끓는 물 속으로 짜내는 방식을 쓰는데, 이 역시 상당한 체력과 기술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삶을 때도 세심한 타이밍이 필요하다. 쌀국수는 끓는 물에 넣어 단 30초만 담갔다가 건져야 한다. 과도하게 익히면 면이 불어터지고 국물이 탁해진다.
이 모든 과정은 동남아시아의 인디카 쌀을 사용했을 때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지지만, 자포니카 쌀로는 원천적으로 쉽지 않다. 아밀로스 함량이 낮은 자포니카 쌀은 아무리 노력해도 탱탱한 면발 형태를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쌀국수 – 21세기에야 가능해진 이유

한국에서 베트남 쌀국수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그러나 대중화된 것은 2000년대 초반 이후다. 한국과 베트남 수교(1992년)가 이루어진 후 양국 간 교류가 확대되고, 베트남 관광객이 급증하며, 국내에서 일하는 베트남 노동자와 결혼 이민자가 증가하면서 베트남 식문화가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에 스며들었다. 2000년대 초반 ‘웰빙’이라는 키워드가 한국 사회를 휩쓸면서 쌀국수는 ‘밀가루를 쓰지 않은 건강식’으로 마케팅되며 급속도로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쌀국수가 21세기에야 본격 대중화될 수 있었던 데는 또 하나의 기술적 이유가 있다. 바로 국내에서 쌀국수 면을 대량 생산하는 체계가 이 시기에야 갖춰졌다는 점이다. 한국 쌀국수 면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쌀가루 100%로 만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쌀가루 30% 이상에 밀가루를 혼합한 것이다. 후자의 경우 밀가루에서 글루텐을 보완함으로써 자포니카 쌀의 낮은 아밀로스 함량이라는 근본적 한계를 극복하는 방식이다. 100% 쌀국수 면의 경우에는 아밀로스 함량이 높은 고아밀로스 자포니카 신품종 – 이른바 ‘도담쌀’ 같은 품종 – 을 활용하거나, 인디카 쌀을 수입해 사용한다. 어느 쪽이든 20세기 이전의 농업 환경과 식품 기술로는 구현이 불가능했던 방식이다.
더불어 국내 쌀국수 시장의 확산에는 프랜차이즈 외식 산업의 역할도 컸다. 2000년대 초반 홍대를 중심으로 베트남 쌀국수 전문점이 줄지어 들어서면서 젊은 세대 사이에서 쌀국수는 빠르게 ‘일상적인’ 외식 메뉴로 자리 잡았다. 지금은 한국 어디서나 동네 분식집에서도 쌀국수를 팔고, 편의점과 마트에는 즉석 쌀국수 제품이 진열되어 있다.

한 그릇에 담긴 역사 – 쌀국수는 아직도 진화 중이다

12세기 금나라의 철기병이 화북 평원을 짓밟으며 몰아낸 남송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쌀로 국수를 만드는 고통스러운 실험을 하면서 수천 년 후 전 세계인이 즐길 음식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20세기 베트남의 난민들이 낡은 목선에 몸을 싣고 남중국해의 풍랑을 헤치면서, 그들이 운반하는 것이 단순한 조리법이 아니라 수백만 명의 이민자 공동체를 먹여 살릴 문화 자산이라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음식의 역사는 언제나 사람의 역사다. 그리고 가장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들이 종종 가장 아름다운 음식 문화를 낳는다. 오늘 한국에서 쌀국수 한 그릇을 들이켤 때, 그 뜨끈한 국물 속에는 9세기의 쌀 재배 기술, 12세기의 전쟁, 19세기의 식민 통치, 그리고 20세기 가장 비극적인 난민 사태가 함께 녹아 있다. 쌀국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가 역경 속에서도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능력을 증언하는, 살아 있는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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