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주 필자는 칠순을 기념하여 가족과 함께 7년 만에 대만 여행을 다녀왔다. 가는 날부터 귀국하는 날까지 태풍의 영향으로 3박 4일 내내 비가 내렸다.
그래서 첫날에는 미리 계획한 일정을 취소하고 타이베이의 중정기념당을 시작으로 실내관광 중심의 코스로 변경했다. 덕분에 이튿날에는 대만고궁박물관에서 비교적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다.
중정기념당은 대만의 국부로 추앙받는 장제스(蔣介石)가 1975년 사망한 이후, 그를 기리기 위해 1976년부터 건립되기 시작하여 1980년에 완공되었다.
초기 조성할 당시 패방(牌坊)에는 ‘大中至正(대중지정)’이라는 글이 새겨졌다. 이는 주역의 ‘介於石 不終日 貞吉…以中正也(개어석 부종일 정길…이중정야)’라는 구절에서 유래한다. 그 의미는 ‘돌에 새기듯 굳고 알맞게 맹세하고 종일 멈추지 않으면 마침내 길하다’는 뜻이다.
장제스는 일본 유학 후 양명학(陽明學)의 영향을 받아 본래 이름인 주태(周泰)를 버리고 중정(中正)으로 개명하였으며, 자(字) 또한 개석(介石)으로 삼았다. ‘대중지정’은 왕양명이 강조한 개념으로 ‘공정하고 바르며 곧은 상태’를 의미한다. 줄여서 ‘중정(中正)’이라고 하며, ‘개석’은 바위처럼 단단하여 어떤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007년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은 장제스를 ‘2.28 사건의 원흉’으로 규정하고 중정기념당을 ‘국립대만민주기념관’으로 바꾸었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패방의 ‘대중지정’이 철거되고 ‘자유광장(自由廣場)’으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가 집권한 후 중정기념당으로 되돌려 놓았다. ‘자유광장’의 이름은 권위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변경되지 않았다.
지난해 5월 20일 취임한 반중 대만독립 성향의 라이칭더(賴淸德) 총통은 취임식 전날인 5월 19일을 ‘백색공포 기억일’로 제정하여 장제스 집권기에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로 하였다. 또한 중국 본토와의 역사적 관계를 지우기 위해 대만 전역의 공공장소에 남아있는 760여개의 장제스 동상을 철거한다고 발표하였다. 백색공포는 1949년 장제스 국민당 정부의 대만 이전부터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의 국민당 1당 독재 시기를 가리킨다.
내가 대만에 공부하러 간 1983년 2월은 계엄령이 아직 해제되지 않았고, 동네 파출소에는 헌병이 주둔하고 있으며, 야당인 민진당은 미국에서 망명해 명맥만 유지할 때였다. 지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이튿날도 아침부터 비가 내렸고, 오전에는 가족과 일정을 보내고 오후에는 혼자 고궁박물관에 갔다. 이 박물관은 세계 최대의 중국문명 유물 전시관으로, 중국의 수천 년 왕조와 제국이 남긴 예술의 정수를 60만8000점을 보유하고 있다.
본 전시실에 들어가려니 박물관 최고의 스타인 취옥백채(翠玉白菜)와 동파육 모양의 육형석(肉形石)이 관람객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천년의 미(美)’로 불리는 취옥백채는 푸른빛과 흰빛의 조화가 돋보이는 옥 조각이다. 푸른 배추잎 위에는 여치와 메뚜기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원래는 부정부패를 경고하는 의미로 제작된 보물이었다. 배추를 뜻하는 ‘바이차이(白菜)’의 발음이 ‘수많은 재물’을 뜻하는 百財와 비슷해, 대만의 모든 가정에서 하나 이상의 복제품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어서 송나라 문인들의 특별 기획 전시실에 들렀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곳으로, 그 동안 책에서만 보던 유명 학자와 문인들의 친필 서한, 시첩, 저서 등이 전시되고 있었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를 비롯해 사마광, 구양수, 황정견, 왕안석, 소식소철 형제의 작품이 망라되어 있었다.
길게는 천년 넘는 동안 잠들어 있던 유물들이 세월을 뛰어넘어 차가운 유리 상자 속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 다시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중에서 동파거사 소식(蘇軾)의 활달한 행서체 친필 시가 눈에 띄었다. 바로 ‘次韵三舍人省上詩(차운삼사인성상시)’였다. 소동파가 동료 세 사람의 시에 화답하여 쓴 시 가운데 한 수가 전시되어 있었다.
차운은 다른 사람이 지은 시의 운자를 따라 짓는 것을 의미한다. 삼사인은 세 사람의 중서성 소속 관리들을 뜻하며, 성상은 중서성이라는 관청에서 있었던 일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시의 제목은 ‘세 사인이 중서성에서 읊은 시에 차운하여 쓴 시’가 된다. 그 중 한 부분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卻見三賢起江右(각견삼현기강우, 문득 세 현인이 강서지방에서 일어남을 보았네)嗟君妙質皆瑚璉(차군묘질개호련, 아아, 그대들의 뛰어난 자질은 모두 호련과 같고)顧我虛名但箕斗(고아허명단기두, 나를 돌아보니 헛된 이름뿐 쓸모없는 기두에 불과하구려)’라는 구절이다.
‘호련지기(瑚璉之器)’란 말은 ‘자질이 뛰어난 인물’을 의미하며 논어 공야장 편에서 출처를 찾을 수 있다. 공자가 공야장과 남용을 높이 평가하며 자천을 군자로 평가하자, 자공이 자신을 어떤 그릇으로 보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공자는 ‘너는 호련이다’고 대답했다.
호련은 종묘에서 오곡을 담는 그릇으로, 하나라에서는 호(瑚), 상나라에서는 련(璉), 주나라에서는 보궤(簠簋)라고 불린다. 이는 제기 중 가장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공자 사상의 핵심은 예(禮)와 인(仁)이다. 종묘의 제사는 예 가운데 가장 중요한 행사였으며, 호련은 그 제사에서 중요한 그릇이다. 공자는 자공의 자질이 뛰어나 국가의 인재로서 손색이 없음을 언급한 것이다.
기두(箕斗)란 남기북두(南箕北斗)의 줄임말이다. ‘남쪽 하늘의 키를 닮은 기성은 쌀을 까부르지 못하고, 국자를 닮은 북두칠성으로는 술을 퍼 담지 못한다’는 의미로, 이름만 있고 실제로는 쓸모가 없음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소동파는 동료들의 인품을 칭찬하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갖고 있으며, 동료들이 조정의 인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불세출의 대시인이자 문장가인 소동파도 동료들을 높이며 자신은 낮추었다. 소동파는 자신이 동료들보다 못하다고 여겨 그들을 ‘호련지기’라 하고 자신을 ‘남기북두’라 했던 것일까.
요즘 우리나라 정치판의 아귀다툼은 약과일 수 있다.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총칼 없는 전쟁의 시대이다. 애초에 소통과 타협은 버려지고 오직 전투뿐인 정장 속에서는 관용과 배려는 패배로 간주되고 있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깔아뭉개야 이겼다며 웃고 있다.
상대방의 공을 칭찬한다고 해서 나의 공이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 국민의 수준은 예전과 같지 않은데, 왜 정치인들은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국민들이 문자 그대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할 수는 없는가. ‘세상이 변했으면 인간사도 바뀌어야 하지'(世異事異) 않겠는가.
이형로는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대만대학 철학연구소, 교토대학 중국철학연구소에서 수학한 후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현재 덕수궁에서 근무하며 스스로를 ‘덕수궁 궁지기’라 칭한다. 저서로는 ‘궁지기가 들려주는 덕수궁 스토리’, ‘똥고집 궁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2018년)와 최근 ‘궁지기가 들려주는 꽃*나무의 별난 이야기’ 1~9권을 펴냈으며, 현재 10권을 준비 중이다. ‘영봉(0峰)’, ‘한골’, ‘허우적(虛又寂)’이라는 별명을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