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황작물의 역사

생명의 줄을 이어준 구황식물…
생존을 위한 민초들의 지혜를 바라보다

조선시대를 살아간 민초들에게 ‘보릿고개(麥嶺)’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었다. 지난 가을부터 마련해 두었던 식량이 바닥나고 보리가 익기까지의 시간, 이 고단한 시간을 버텨내는 것이 하나의 거대한 생존 과제였다. 정약용(丁若鏞)은 그의 농시(農詩)에서 이 참상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보릿고개 험하고 험해 태행산의 협곡 같네
단오절이 지나야만 보리 수확이 시작되지
그 누가 장차 풋보리죽 한 사발을 들고 가서
비변사의 대감님께 맛 좀 보라고 나눠 줄까”

이 시는 단순한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당시 민초들의 실제 고통을 담고 있다. 보릿고개는 단순히 물리적 시간이 아닌, 죽음을 향해 기울어진 절벽과도 같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구황작물과 구황식물은 다르다

구황작물(救荒作物)은 ‘흉년 따위로 기근이 심할 때 주식물 대신 먹을 수 있는 농작물’을 의미한다. 비황작물(備荒作物)이라고도 불린다. 한편, 구황식물(救荒食物)은 구황작물을 포함한 더 넓은 개념으로, 식품으로 먹을 수 있는 야생 식용식물까지 총칭한다.
구황작물의 중요한 특징은 재배기간이 짧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60일 내외, 길어도 90일을 넘지 않는 작물들이 주로 선택되었다. 또한 인간이 특별히 관리하지 않아도 자연 상태에서 잘 자라는 특성도 중요했다.

역사를 바꾼 구황작물 ‘감자’

구황작물 중 인류 역사를 크게 바꾼 작물로는 감자를 꼽을 수 있다. 헨리 홉하우스(Henry Hobhouse)의 저서 『역사를 바꾼 씨앗 5가지』에서도 감자가 선정될 정도로, 감자는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감자는 1600년대에 스페인의 피사로(Pizarro)가 남미의 페루와 볼리비아에서 발견하여 유럽으로 가져왔다. 처음에는 ‘악마의 식물’이라는 오명을 받았는데, 이는 생김새가 못생겼을 뿐만 아니라 음습한 땅속에서 줄기에 매달려 나오는 모습이 죽은 시체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 사람들은 감자를 먹으면 나병에 걸리거나 죽어서 지옥에 간다는 미신을 믿었고, 돼지에게나 사료로 주는 작물로 여겼다.

감자를 보급한 두명의 인물

감자가 유럽에서 널리 퍼지게 된 데는 두 인물의 공이 컸다. 프랑스의 농업학자 파르망티에(Antoine-Augustin Parmentier)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다. 파르망티에는 프로이센과의 전쟁 중 포로로 잡혀 1년간 감자만 먹고 살았는데, 건강하게 귀환한 후 감자의 가치를 알리는 데 헌신했다. 프랑스 요리 중 ‘파르망티에’라는 이름이 붙은 감자 요리가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프랑스의 농업학자 앙트완 파르망티에,
그는 감자만이 아니라 옥수수도 도입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더 독특한 방법으로 감자를 보급했다. 그는 감자를 귀족들만 먹을 수 있는 고급 식품이라고 선전하고, 일반 농민들에게는 재배를 금지시켰다. 그러면서 낮에는 감자밭에 경비를 세웠다가 밤에는 느슨하게 관리했고, 농민들이 몰래 감자를 훔쳐 심게 했다. 이러한 역설적인 전략 덕분에 감자는 빠르게 보급되었고, 프리드리히 2세는 ‘감자 대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독일에 감자를 보급한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

감자흉작으로 역사를 바꾼 아일랜드 대기근

감자가 역사에 미친 가장 극적인 영향은 아일랜드에서 볼 수 있다. 1800년대 초,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 지배 아래 있었다. 영국인 지주들의 착취가 심해 아일랜드 소작인들은 수확한 곡물을 모두 상납하고, 자신들은 감자만을 먹고 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감자 덕분에 기아 문제가 해결되면서 아일랜드의 인구는 오히려 급증했다. 18~19세기 유럽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감자 재배의 확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경제학자 맬더스(Thomas Robert Malthus)의 인구론도 이러한 현상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1845년, 아일랜드에 감자역병이 돌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퍼진 이 질병으로 인해 아일랜드 800만 인구 중 1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이 대기근은 19세기 이후 최악의 기근으로 기록되었다. 견디다 못한 아일랜드인들은 미국과 캐나다로 대거 이주했는데, 이주 과정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캐나다행 배에 탔던 약 10만 명 중 1만 6000여 명이 항해 중에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이주 행렬은 계속되어 1910년경에는 아일랜드 인구가 800만에서 400만으로 반감되었다.

Sculpture by Rowan Gillespie commemorating the Great Famine; in Dublin

기근에는 자연재해에 의한 ‘자연기근’과 인재(人災)에 의한 ‘인공기근’이 있다. 인공기근은 인간의 욕심, 잘못된 신념, 그리고 정책적 실패로 인해 발생한다. 전쟁 중에 적의 식량 공급을 차단하기 위해 농작물을 불태우는 행위도 인공기근의 원인이 된다.
아일랜드 대기근의 경우, 직접적인 원인은 감자역병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영국의 식민지배와 극심한 착취가 있었다. 당시 영국의 곡물법은 외국산 밀의 수입을 금지했는데, 이는 영국 지주계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기근이 왔을 때도 값싼 밀의 수입이 불가능했고, 많은 아일랜드인이 굶어 죽게 되었다.
이 사건은 결국 아일랜드가 영국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벌이는 계기가 되었고,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자유국’과 ‘북아일랜드’로 분리되는 역사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처럼 감자 한 작물을 둘러싼 역사의 인과관계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와 포드 자동차를 발명한 헨리 포드(Henry Ford)는 이때 이주한 아일랜드인의 후손이다. 미국 대통령 중 22명이 아일랜드계라고 알려져 있으며, 버락 오바마(Barack Obama)도 모계쪽이 아일랜드계다. 세계 최강국 미국의 역사에 감자가 미친 영향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다.

한국에 전해진 구황작물들의 역사

우리나라에는 1824년경 중국으로부터 감자가 전해졌다. 당시 중국인이 강원도에서 인삼을 탐내다가 대신 감자를 소개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밖에 고구마는 1763년 일본에 조선통신사로 다녀온 조엄(趙曮)이 들여왔으며, 옥수수는 18세기 초엽 청나라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이 세 작물 모두 널리 전파되지 못했다. 고구마는 본래 열대 작물이라는 특성상 삼남 지방 이북에서의 재배 확산이 늦었고, 감자는 산간 지방에서의 재배에는 알맞았으나 도입이 가장 늦었을 뿐더러 개량 이전에는 씨알이 작아 말 그대로 모자란 끼니를 때울 수 있을 정도만 유통되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옥수수의 경우다. 18세기에는 5종류였던 품종이 19세기에는 3종류로 줄어드는 등 오히려 확산이 늦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지력 소모가 큰 옥수수의 특성상 보급에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기 때문이며, 산림 파괴가 심각해진 19세기에는 재배가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작물은 모두 19세기 후반 이후 근대적 개량종이 보급되면서야 본격적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조선시대의 구황 정책과 환곡제

조선 정부는 기근에 대비하기 위해 국가적 차원의 여러 대책을 마련했다. 그중 핵심은 환곡제(還穀制)였다. 1795년(정조 19) 정조(正祖)가 내린 환향(還餉) 책문(策問)에는 당시 환곡제의 역할이 잘 드러나 있다.
“집안은 경석(磬石)처럼 썰렁하고 솥에서는 쌓여 있던 먼지가 일어난다. 빈 항아리에는 낱알 하나도 담겨 있는 것이 없고 이웃에는 한 움큼의 곡식도 빌릴 곳이 없다…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한 차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희망이라곤 없다. 이러한 때에 관아의 문에 방문이 내걸리고 창고를 연다는 날짜가 정하여지면 남녀 할 것 없이 기쁨에 들떠서 빈손으로 갔다가 가득 얻어 돌아오는데… 설날의 세찬으로부터 보릿고개에 이르기까지 이것으로 생활을 하고 이것으로 농사를 짓는다.”
또한 정부는 산야에서 구득할 수 있는 구황식물의 종류와 조리법을 기록한 『구황벽곡방(救荒辟穀方)』, 『구황촬요(救荒撮要)』 등의 구황서를 편찬하여 백성들에게 보급했다. 이러한 서적들은 기근 상황에서 백성들의 생존 지침서 역할을 했다.

흙과 뿌리 껍질을 먹어야 했던 우리 조상들

구황식물의 종류로는 산과 들에 자생하는 식물의 잎, 줄기, 뿌리, 꽃, 그리고 나무의 열매나 껍질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조선 전기에는 도토리가 가장 중요한 구황식물이었다. 소나무 껍질은 도토리 다음으로 구황에 요긴했다.
특이한 것은 ‘먹을 수 있는 흙’인 백토(白土)와 백적토(白赤土)의 활용이다. 1423년(세종 5) 기록에는 함길도 화주(和州)에서 흙을 파서 떡과 죽을 만들어 먹었다는 내용도 있다. 이런 종류의 흙은 운모의 일종으로, 산화 실리콘을 비롯한 무기질이 주성분이었다. 물에 풀어 돌가루와 같은 큰 입자를 가라앉힌 다음, 중간의 미세질을 밀가루처럼 가공하여 먹었는데, 이를 ‘토죽(土粥)’이라 불렀다.
구황식품은 그 효용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상당수의 구황작물은 일반작물에 비해 맛이 떨어지거나 수확량이 적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상품가치가 없어 취급이 좋지 못했으며, 심한 경우에는 일반작물의 수확을 방해하는 잡초로 간주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피(稗)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구황작물이지만, 맛이 없다는 단점 때문에 벼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는 오히려 제거 대상이었다. 또한 정작 구황작물이 필요한 기근 시에는 그 수량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자투리땅에서 반쯤 방치 상태로 기른 작물의 수확량이 일반작물만큼 많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심한 기근이 들면 사람들은 도토리, 칡, 고사리, 소나무 껍질과 잎, 얼레지 비늘줄기, 야생 열매와 꽃, 기타 나물 등을 먹었다. 해안지방에서는 해초나 상품가치 없는 해산물을 활용했고, 더 나아가 들개, 길고양이, 개미, 메뚜기, 물방개, 지렁이와 같은 벌레나 쥐, 개구리, 도롱뇽 등의 소동물을 먹기도 했다. 그중에서 일부는 번데기처럼 대중화되기도 했다.

식용흙 예

옥수수의 혁명적 특성

옥수수는 구황작물 중 가장 혁명적인 곡물로 평가받는다. 볏과의 1년생 풀인 옥수수는 인류의 생존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옥수수의 학명은 ‘Zea mays L.’로,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Linné)가 명명했다. 원산지는 정확히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대체로 멕시코로 알려져 있으며, 멕시코에서는 옥수수를 신으로 모시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옥수수’라는 명칭은 중국어 ‘옥촉서(玉蜀黍)’의 발음이다. 옥수수는 수수에 ‘옥’ 자를 붙여 탄생한 이름이다. 중국에서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명칭을 사용했는데, 옥수수를 의미하는 한자는 100종이 넘을 정도다. 광동에서는 속미(粟米), 대만에서는 번맥(番麥)이라 부르며, 가장 흔한 명칭은 옥미(玉米)다.
중국에서 옥미를 사용한 최초의 자료는 서광계 (徐光啓, 1562~1633)의『농정전서(農政全書)』다. 우리나라에서는『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비롯한 여러 자료에서 ‘직당(稷唐)’으로, 조선 후기 이가환(李家煥)의『금대시문초(錦帶詩文草)』에서는 ‘번맥(番麥)’으로 표기했다.
옥수수의 가장 큰 장점은 그 놀라운 생산성이다. 씨앗 한 알로 엄청난 양을 수확할 수 있으며,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또한 열매뿐만 아니라 줄기, 잎, 열매를 감싸는 수염까지 모두 활용할 수 있고, 보관도 용이하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인류는 옥수수를 통해 식량 부족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었다.

건강식품이 된 구황작물

과거에는 생명을 구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던 구황작물이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건강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는 시대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열량 과잉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구황작물은 영양학적으로 우수한 대안 식품으로 자리 잡았다.
대표적인 구황작물인 감자, 고구마, 옥수수는 모두 풍부한 식이섬유와 비타민, 미네랄을 함유하고 있다. 특히 감자는 사과보다 5배 많은 비타민 C를 함유하고 있으며, 고구마는 미국공익과학센터(CSPI)에서 ‘최고의 음식 10가지’ 중 1위로 선정될 만큼 영양가가 높다. 옥수수의 표피에 있는 셀룰로오스는 장 건강에 도움을 주며, 돼지감자에 풍부한 이눌린은 혈당 조절과 장내 환경 개선에 효과적이다.
100세 이상의 장수 노인들의 식단에서 구황작물이 빠지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연세대학교 김형석 명예교수(105세)가 아침 식단으로 찐 감자를 즐기는 것처럼, 구황작물은 오랜 세월 건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구황작물은 현대인의 식생활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고구마는 감자보다 당지수(GI)가 낮아 다이어트 식품으로 인기가 높고, 돼지감자는 혈당 조절과 체중 관리에 효과적이다. 토란, 칡, 메밀, 도토리 등 다른 구황작물들도 각각의 영양학적 가치로 현대인의 식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때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먹었던 구황작물이 이제는 건강한 삶을 위한 필수 식품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이 소박한 작물들이 현대 영양학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은 우리 식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봄철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먹었던 구황작물이 이제는 우리의 삶을 더 건강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식품으로 거듭난 것이다. 구황작물의 역사는 생존을 위한 투쟁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건강한 미래를 위한 지혜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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