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가지가 넘는 제사상 음식 앞에서 베트남 출신 이주 여성 응우옌 티 바이(39) 씨는 생선의 머리를 동쪽으로, 꼬리를 서쪽으로 정성스럽게 돌려놓는다. 단 하나의 실수도 시댁 어른들에 대한 불경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화성시에 거주하며 올해로 한국 생활 18년 차를 맞은 바이 씨는 한국의 설날을 모든 며느리가 넘어야 할 ‘문화적 문턱’이라고 표현했다.
2008년 한류 열풍 속에 한국으로 시집온 그는 드라마 속 로맨틱한 장면을 보며 비빔밥과 미역국만 알면 한국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첫 명절, 보수적인 시댁의 부엌에 발을 들인 순간 그 환상은 깨졌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시댁은 매년 설과 추석마다 온 친척이 모이는 거점이 되었고, 바이 씨는 장자 집안의 며느리로서 부엌의 ‘안주인’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한국의 전통 설 상차림은 보통 20~30가지, 많게는 40가지가 넘는 음식을 포함한다. 바이 씨는 이틀 밤낮으로 불 앞에 서 있던 2008년의 첫 겨울을 생생히 기억한다. 햅쌀로 지은 밥과 고사리, 시금치, 도라지, 콩나물 등 4색 나물, 그리고 무국에 끓인 소고기와 돼지고기, 조기 등이 상에 오른다. 특히 그를 힘들게 한 것은 전(Jeon) 요리였다. 재료 손질에만 4시간 이상이 소요되었고, 밀가루와 달걀물을 입혀 노릇하게 부쳐내는 작업은 때로 48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어졌다.
음식의 맛보다 더 어려운 것은 차례(Charye) 상차림이었다. ‘동두서미(생선 머리는 동쪽)’, ‘홍동백서(붉은 과일은 동쪽)’ 등 복잡한 규칙에 맞춰 음식을 배열해야 한다. “현지인들도 자주 틀릴 만큼 복잡한 순서” 때문에 바이 씨는 시어머니의 승인이 떨어질 때까지 숨을 죽여야 했다. 설날 아침 9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들이 조상에게 절을 올리는 순간이 되어서야 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화성시에 사는 해풍 출신의 응우옌 티 푹(42) 씨 역시 2003년 한국으로 온 뒤 설날의 리듬에 적응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삼형제 집안의 둘째 며느리인 그는 동서들과 역할을 나누며 고단함을 이겨낸다. 첫째는 장보기와 외부 업무를, 둘째와 막내는 요리를 전담하는 체계적인 분업 덕분에 갈등을 피하고 즐겁게 일한다. 푹 씨는 “힘들지만, 동서들과 수다를 떨며 떡국을 끓이는 시간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한국 통계청과 여성가족부 자료에 따르면, 2025년까지 베트남 여성은 한국 내 전체 외국인 배우자의 30% 이상을 차지하며 국적별 1위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KIHASA)의 2024년 보고서는 설날과 같은 전통 제례에 참여하고 이해하는 정도가 고부 관계와 결혼 만족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했다.
베트남 여성들은 한국 문화와 유사한 유교적 배경 덕분에 전통에 가장 잘 적응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조상을 기리고 가족이 모여 세배하며 세뱃돈을 나누는 풍습은 베트남의 뗏(Tet)과 매우 닮아 있다. 푹 씨는 “매년 설을 보내며 가족 재회와 조상 숭배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이제는 내가 진정으로 이곳에 속해 있다는 것을 느낀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