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베트남 대기근으로 조부모와 형제를 잃은 아픔을 딛고, 평생을 농민의 빈곤 퇴치와 종자 혁신에 바친 한 기업인의 역정이 병오년(2026년) 설을 맞아 큰 울림을 주고 있다. 17일 카페에프(CafeF) 보도에 따르면 타이빈 종자 그룹(ThaiBinh Seed Group)의 이사회 의장이자 노동영웅인 쩐 마인 바오(Tran Manh Bao) 회장은 ‘왜 농민은 이토록 비참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50년 넘게 현장을 누벼왔다.
쩐 마인 바오 회장의 유년기는 기근의 트라우마로 가득했다. 그의 외조부모는 굶주림으로 일주일 간격으로 세상을 떠났고, 삼촌과 사촌 역시 아사했다. 소를 몰던 어린 남동생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생고구마를 주워 먹었다가 목숨을 잃었다. 어머니로부터 들은 ‘아이의 손을 잡고 거리를 헤매던 굶주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가 농업에 투신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은 상이군인이었던 그는 전후 선전국 간부로 일할 기회를 마다하고 1975년 타이빈성 농업국 현장직을 선택했다. 그는 돼지 사육장 노동자부터 사무실 청소부까지 밑바닥 일을 자처하며 당시 국가 주도 농업 시스템의 비효율성을 목격했다. 노동자들은 일한 만큼 보상받지 못했고, 계획 경제는 비용과 수익에 대한 고려 없이 숫자만 늘리는 방식이었다.
반전의 기회는 1986년에 찾아왔다. 태풍으로 파괴된 종자 농장의 책임자가 된 그는 성 당서기의 암묵적 지지 아래 ‘최종 생산물 할당제’라는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이는 당시의 경직된 체제에 반하는 위험한 시도였으나, 불과 1년 만에 쌀 수확량이 20% 이상 증가하며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노동 신문은 이를 ‘동코 농장의 새로운 계약 농법’이라 부르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2000년 그가 타이빈 종자 회장으로 취임했을 당시 회사는 자본도 없고 직원의 30%가 문맹인 최악의 상태였다. 그는 ‘사람, 과학 기술, 협력 관계’라는 세 가지 기둥을 세우고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다. 문맹 직원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2001년에는 당시 거금이었던 5억 동을 들여 직원들을 중국으로 유학 보냈다. “외국어를 모르면 국제 협력은 불가능하다”는 그의 고집은 결국 회사를 베트남 최초의 종자 저작권 보호 업체이자 아시아태평양 종자 협회 회원사로 키워냈다.
위기도 있었다. 2013년 기록적인 한파로 10만 헥타르의 논이 폐허가 되자 11개 성이 회사에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는 회사 잘못이 아님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비를 털어 1,063톤의 종자를 농민들에게 무상 지원했다. 당시 의구심을 샀던 그 품종은 2022년 베트남 국가 브랜드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쩐 마인 바오 회장은 1991년 노동 훈장에 이어 2020년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그가 이끄는 타이빈 종자 그룹 또한 2025년 말 노동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는 “전장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우리 회사가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을 때는 울었다”며 “농민들이 쌀 한 그릇을 더 먹고 자식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게 되는 것이 우리가 만드는 종자의 가장 큰 가치”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