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z Interview – 이 강춘 사장

“1992년 한·베 수교 이후 수많은 한국인들이 베트남으로 향한다. 그 중에는 젊은 창업자도 있었지만,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빈손으로 이 땅을 찾은 사람들도 있었다.이강춘 사장 역시 그 중 한 사람이다.” 베트남에 빈손으로 들어와서 나름대로의 성공을 이룬 뒤,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노후생활을 즐기는, 세상 부러울 게 없이 살고 있는 이강춘이라는 사내의 인생을 통해 다양한 삶의 모습을 배워본다. 베트남의 우기철이 거의 마감되는 시기임에도 오전내내 굵은 비가 사무실 창문을 두드리고 있던 날, 베트남 일상에서는 흔치 않은 양복차림을 한 그가 사무실을 들어선다.

베트남 진출 초기 이야기

이강춘 사장은 본지가 10여년전 교민단체 노인회를 지원하는 사업가를 소개하는 기사를 만들며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 당시에는 맥스비나라는 대형 봉재 공장의 사장이었다. 그후 별다른 사적 연결이 없던 그를 골프 모임에서 만나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이룬 베트남의 스토리가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정식으로 초대했다.
맛있다고 느껴본 적이 별로 없는 머그잔의 사무실 커피를 한 모금 삼키고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베트남 진출은 언제였지요?

“제가 베트남을 처음 찾은 시기는 1996년입니다. 한국의 IMF 가 닥치기 일년 여 전이지만 제가 하던 섬유 무역 사업은 이미 사양길에 들어설 때였습니다.
수년 전 한국과 수교를 한 베트남은 저같이 한국에서 돌파구를 못 찾는 사람들에게 새롭게 회자되고 있던 곳이라 저도 지푸라기라도 쥔다는 심정으로 홀로 베트남을 찾았지요.

당시의 베트남에 대하여는 잘 아시겠지만 많이 열악했지요. 하지만 돌파구는 찾는 절박한 입장에 좋고 나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저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몇 개월을 보냈습니다.

초기 방문의 결론은 사업의 가능성은 차치하고라도 베트남이라는 곳이 너무 맘에 들었습니다.
날씨는 무진장 덥지만 사람들이 너무 좋았습니다. 말은 잘 안 통하지만 정서적인 소통이 가능하고 미소만으로도 오가는 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들어가 집사람에게 당분간 베트남에 가서 살길을 찾아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무작정 떠났습니다. 그야말로 빈손이었죠. 몇푼의 돈과 긁는 순간 집사람의 잔소리가 날아올 것이 뻔한 비상용 신용 카드 한장만이 전부였죠

공항 근처 작은 호텔에서 거주하며 살 길을 찾았지요. 일차 방문 때 공부한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봉제 오더 중계라는 일을 찾았습니다. 한국업체의 자잘한 오더를 베트남 공장에 연결하고 그 커미션을 받아서 생활을 할 수 있었지요. 한국에서도 회사 차원에서 하던 일이라 그리 낯설지 않았지요. 일단 생활은 간신히 커버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었지요.

그래서 이미 늦은 나이긴 하지만 한국인이 경영하는 봉제회사에 관리자로 취직을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봉제 무역을 하긴 했지만 공장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지라 그 기회를 통해 봉제 공장에 대한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 제 개인적 목적이었죠.
헝그리 정신으로 똘똘 뭉쳐있던 당시라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지요. 열심히 일한 덕분에 취직한 회사의 관리자로서 역할도 잘하고 봉제공장의 운영 노하우도 많이 배웠지요.
그렇게 베트남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여기까지 단숨에 이야기를 이어간 그는 잠시 숨을 돌리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신용 하나로 세운 공장

생각보다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특별한 사연을 기대한 탓인지 모르지만 평이한 출발이라 기대와는 다른 느낌이다.
“빈 손으로 들어온 사람 치고는 크게 어렵지는 않게 시작했습니다.”

“맞습니다. 일단 한국에서의 경험이 이곳에서 시작점이 될 수 있었지요. 그간 해오던 일을 이곳에서 계속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공백기간을 줄여준 듯합니다. 이곳에 와서 새로운 일을 하려 했다면 아마 훨씬 힘든 과정을 겪어야 했을 것입니다. 새롭게 베트남에 진출하시는 분도 가능하면 자신이 하던 일과 유관한 일을 우선적으로 찾아보는 것이 시행착오를 줄이는 일입니다. 물론 새로운 일도 시도할 만하지만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는 일이니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런 어려운 과정을 거쳤지만 현재 많은 부를 이루고 편안하게
노후를 즐긴다고 알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부를 쌓았는지,
그 노하우가 무엇인지가 우리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이야기인 듯합니다.”

“사실 어떻게 돈을 벌었는 가에 대한 것이라면 별로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늘 힘든 생활을 하던 차라 돈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 재물을 부른 요인일 수는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별로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제가 이곳에서 성장한 이야기를 계속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한국 봉제 회사에 공장 관리자로 취직해서 일하면서 공장을 배우고 난 후 독립을 시도했지요. 베트남 파트너 이름으로 회사를 만들고 봉급생활을 하며 모든 돈 2만불로 공장을 임대했지만 당장 공장을 가동시킬 봉제 기계가 하나도 마련되지 않았었지요. 물론 돈에 없었지요. 사방으로 아는 이들을 찾아 다녔지만 빈털터리 사내에게 누가 기계를 내주겠습니까?
마침 제가 진출 초기 봉제 오더 중개업을 할 때 인연을 맺은 대형 베트남 공장에서 공장 규모를 줄인다는 얘기를 듣고 그 회사 사장을 무작정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여권과 같이 제가 받을 수 있는 오더에 대한 서류를 내밀며, 정리하는 라인에 있는 기계의 인수를 요청했습니다. 기계 값은 매달 일정액으로 갚는 것으로 하고 보증금 없는 인수를 요청했습니다.


그동안 그와 진행했던 중개사업에서 쌓은 신용을 자산으로 내민 것입니다. 그리고 추가로 이 회사에서도 언제라도 오더를 소화할 공장이 필요할 경우 최우선적으로 책임지고 소화하겠다는 제안을 덧붙였습니다. 그쪽 입장에서는 안 쓰는 기계를 빌려주고 자신의 오더를 저렴한 가격에 소화하는 전담 공장을 가진 것이라 생각하게 만들었지요. 그리고 기계 값을 안 갚으면 임가공 비에서 그만큼 제하면 되니 너에게는 손해될 것이 없다는 논리로 그를 설득시켰지요.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안전인수격 요청이지만, 제 설득이 먹혔는지 그는 고심 끝에 나에게 기계를 내주었습니다. 무려 봉제 6개 라인의 기계 설비를 보증금도 없이 받았습니다. 그날 진짜 감사하다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느꼈습니다. 앞이 안 보이는 암흑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후로는 크고 작은 부침이 있긴 했지만 결국 사업을 키우고 약속한 기일에 기계 대금도 다 갚고 그 회사로 부터 오더도 받아서 처리하며 귀한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베트남에서는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하는지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요.”

오호 대단하군요. 마치 정주영씨가 한국 지폐에 새겨진 거북선을 보여주면 조선소를 세운 일화와 비슷합니다.
이 사장님 배짱도 대단하지만 6개 라인 기계를 조건 없이 내어준 그 분의 결단이 참으로 감탄 스럽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돈을 벌 수 있는 기본 틀을 마련하셨군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공장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사람은 별로 못 봤습니다.
이 사장님은 순수하게 사업을 통해서 돈을 버셨나요?

“봉제 공장을 통해 큰 돈을 벌 수는 없습니다. 워낙 경쟁이 심한 사업이라 회사 운영만 사고 없이 돌아가도 감사할 일입니다. 회사는 돈을 벌 발판은 만들어 준 것이지 그것으로 돈을 벌지는 못했습니다. 초기에는 최우선 적으로 사업을 확장시키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지요.
5년 동안 임대 공장을 반환하고 3개의 공장을 지었는데 가능하면 부동산 투자가 될만한 곳을 찾았지요. 어차피 임가공을 주업으로 하는 공장이라 큰 공장 하나 보다는 작은 공장 3개를 만드는 게 유리하다고 봤습니다. 부동산 투자도 겸할 수 있었지만 지역내에서 인원수급이 가능할 정도의 규모의 공장을 3개 정도 지었습니다. 결국 그런 분산 정책이 나중에 토지 가격 상승으로 큰 돈으로 돌아온 결과를 낳았습니다.
제 경우는 사실 베트남의 발전 시기에 덕을 본 셈입니다. 돈이 들어올 때마다 관심있게 봐 둔 자투리 땅이나 저렴한 아파트를 구입했습니다. 물론 파트너 이름이죠. 일부 공장으로 전용한 것도 있지만 운 좋게 빠른 시일에 가격이 상승한 것은 팔아서 다른 토지를 매입했지요. 주로 제 파트너가 투자할 만한 땅을 물색하고 다니곤 했지요. 저는 사업을 키우면서 그를 통해 부동산 투자를 한 셈입니다.
개발 도상국의 부동산 가격은 그 나라 GDP와 함께 갑니다. 베트남은 특히 국민소득보다 더 빠르게 부동산이 상승합니다. 어떤 곳이라도 부동산 가격은 세월이 지나고 경제가 발전하면 무조건 상승합니다. 잘 만나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몇 배가 뛰는 경우도 생깁니다.
운도 좋았지만, 현실에서는 수많은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지요. 제가 무일푼으로 시작한 베트남에 이런 저런 투자를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베트남 파트너를 잘 만난 덕분이기도 합니다만, 그 행운의 만남이 가져다 준 만만찮은 부침도 있었습니다.”

파트너와의 결별에 따른 대가.

“마지막 언급이 뭔가를 말해주는 듯합니다.
파트너를 잘 만나서 축제를 했지만 그에 버금가는 부침이 있었다는 말은 무엇인가요?”

“함께 고생할 때는 서로의 소망이 같은데, 돈이 많아지니 자신의 소망이 우선되는 듯합니다. 이권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하고 관계에도 금이 갑니다. 아예 처음부터 선을 긋고 나눠야 했습니다. 한국처럼 가족 개념으로 인식했는데 역시 간극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파트너이자 베트남 아내와 헤어질 때 재산의 많은 부분을 떼어 주어야 했습니다. 재산을 분할하는 것보다 그 과정 자체가 정말 힘들었지만 평생을 함께 하지 못하는 인연에 대한 대가인 듯합니다. 그 일이 있은 후 펜데믹 시절을 거치면서 일찍 사업을 정리하고 공장을 팔고 남은 돈으로 한국 지방에 구입한 작은 건물로 지금 노후 자금을 충당하고 있습니다.”

“여러 과정이 있으셨지만 결국 건물주가 되셨군요, 요즘 건물주는 조물주로 불리우죠.
이제 노후 염려는 없겠지만, 평생 일을 해오신 분이 일을 안 하시며 지내시는 것에 대하여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서 상가를 임대하여 조그만 공동 사무실 회사를 두개 정도 운영합니다. 회사라기에도 작은 소규모지만 관리인을 두고 운영하면 한국에서의 생활비 정도는 충당됩니다. 그리고 베트남에는 푸미흥에 사둔 아파트에 머물며 지내니 많은 돈이 필요하지는 않지요.”

“베트남에서 제법 부를 쌓아서 노후생활까지 안정적으로 마련한 셈입니다.
베트남에 온 것이 행운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베트남에 대한 생각은 어떻습니까?”

“베트남에 오겠다는 결정은 제 인생에 가장 잘 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베트남에서 만나 인연으로 제 삶의 황금기를 보냈으니 참으로 고마운 곳이 베트남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살면서 사람들과의 많은 연이 있었지만 이상하게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참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국사람에게는 도움보다는 갈등이 많았던 듯합니다. 이상하지요. 전생에 베트남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트남 사람을 도와줄 일을 많이 찾습니다. 정기적으로 고아원 지원도 하고 베트남 봉사활동을 하는 교민단체에 지원도 하고 지냅니다. 앞으로도 제가 베트남에 있는 동안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입니다.”

“팬데믹 시절에 사업을 접고 노후 생활에 들어섰다면 비교적 일찍
시작한 편입니다. 사업을 접은 후 다시 사업을 하시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나요?”

어떤 책에 보니 진정한 부를 쌓기 위해 가능한 빨리 은퇴를 하라고 권하는 말이 있더군요. 은퇴후에는 투자에 관심을 쏟는 것이 부를 쌓는 방법이다 라고 말하는 거죠. 그래서 저도 큰 금액은 아니지만 약간의 여유 자금으로 투자를 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투자환경이야 말로 급변하는 세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인 듯 합니다. 그런 공부를 통해 요즘 돌아가는 세상을 배웁니다.

고독을 즐기는 독거인의 자유로운 삶

“개인사라 조심스럽긴 한데, 앞에서 언급하셨으니 질문을 이어갑니다. 베트남에 들어오시면서 한국의 부인과 별거를 시작했다고 하셨는데, 다시 화합을 하셨나요?”

“세상에 어떤 부인이 그런 남편을 용인하겠습니까?
별거 10년쯤 지난 후에 결국 이혼을 하고, 베트남 파트너와 결혼을 했는데 그마저 사업이 함께 엮여 있으니 지속이 어렵더군요. 결국 재산 정리를 하고 다시 이혼을 한 후 지금은 베트남이나 한국이나 함께 살 가족은 없는 독거노인인 셈입니다. 지금이야 재정적으로 자유로워지긴 했지만, 남편으로, 아비로서의 역할은 많이 부족한 인생입니다.”

“가족과 함께 지내지는 않아도 자녀들과 교류를 하고 계시니 아주 남남은 아니겠지요. 올해 기억하기로는 칠순으로 아는데, 외롭다든가 누군가 필요하다든가 하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이제는 혼자 있는 고독도 즐길만한 나이가 되었지요. 자주 자식들 소식을 듣고 또 제가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곤 하는데, 그렇게 엮여 사는 덕분에 혼자라는 생각을 안하고 살고 있습니다. 같이 살지는 않지만 가족의 정은 나누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베트남에서 매일 아침 운동을 하고 가끔 골프를 즐기며 만나는 친구들 덕분에 불만 없는 노후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죠.”

혼자 있는 고독을 즐기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노후생활, 비록 함께 하는 가족이 없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스스로가 키운 자신의 삶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행복을 추구할 줄 아는 연륜의 목소리다.
이강춘 사장은 성공과 실패, 만남과 이별을 모두 경험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인생의 굴곡이 아니라 ‘운명의 과정’ 으로 받아들인다. 이제 그는 혼자이지만, 결코 외롭지 않다. 스스로 선택한 삶 속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며, 원하는 생활을 즐긴다는 것이다. 그의 삶은 성공을 넘어 스스로의 인생을 만들어간 한 인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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