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사에서 300년 앞선 ‘근대적 실험’
– 문맹 퇴치 위해 창제된 유일 문자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1446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기념해 국경일로 정한 이 날은 단순한 문자 기념일이 아니다. 세계 문자사(文字史)에서 유례없는 ‘근대적 실험’이 시작된 날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국가 자산을 꼽으라면 단연 한글이 첫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세계에서 드물게 창시자와 창시 일자가 명확히 기록된 문자이자, 국민과의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근대적 소통 문자가 바로 한글이다.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고, 개발 방법이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과학적 문자. 한민족이 세계에 제공한 최고의 업적이라 평가할 수 있는 유산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한글의 의미를 언어학적 우수성에만 집중해왔다. 소리의 과학성, 문자 체계의 완결성만을 강조했을 뿐, 한글 창제가 갖는 세계사적 의미는 상대적으로 등한시해온 경향이 있다. 이에 본지는 한글날을 맞아 한글날의 세계사적 의미를 담은 특집 기사를 준비했다.
유네스코가 세종을 선택한 이유
유엔 산하 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유네스코)는 문맹 퇴치 분야에 두 개의 상을 수여한다. 한국 정부가 후원하는 ‘세종대왕상’과 중국 정부가 후원하는 ‘공자상’이다. 세계 역사에서 교육을 중요시하고 국가 발전의 기회로 삼은 위인은 많다. 그런데 왜 유네스코는 하필 이 두 인물을 선정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세종대왕은 애민정신(愛民精神)에 기반해 모든 백성에게 문자를 보급하고자, 즉 직접적으로 문맹을 퇴치하고자 한글을 창제했다. 공자는 “가르침은 있으나 분류하지 않는다(有敎無類)”는 기치 아래 고대 인물 중 드물게 누구나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대중 교육을 통해 이상 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다.

한글의 진정한 공헌은 ‘과학성’보다 ‘대중성’에 있다. 언어학적으로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문자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한글이 인류에 미친 가장 큰 공헌은 따로 있다. 특권층의 기록과 정보 독점을 위한 글이 아니라, 일반 대중이 사용하도록 디자인된 세계 역사상 드문 ‘문맹 퇴치용 문자’라는 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어려운 문자 창제 프로젝트가 민중 개념조차 희박했던 전근대(중세) 시대에 시도됐다는 사실이다. 한글의 근대성, 즉 일반 대중에게 문자를 보급하고 특권층의 정보 독점권이었던 문자를 일반 백성에게 알리면서 동시에 국가 역량을 강화시키려는 시도는 전근대 시대에는 파격적인 진보였다. 당시로서는 질서를 깨뜨리고 반란의 씨앗을 만드는 것으로 여겨지던 위험천만한 행위였다.

근대와 전근대, 그 결정적 차이
근대와 중세의 구분은 서양 역사학 전통에서 나온 개념이다. 근대를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현대 바로 직전의 시대를 말한다. 전근대란 근대에 이르기 전의 시기, 즉 중세를 의미한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는 각각 그 시대를 규정하는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고대는 노예제 경제에 기반한 사회였고, 중세는 영지(토지) 소유를 중심으로 신분과 지위가 엄격히 나뉘었던 봉건제 사회였다. 근대는 자본주의 태동을 특징으로 하며, 신분 구별이 천부적 구분에서 경제적 기반으로 전환되는 시민사회 형성이 시작된 시기다.

▲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문자, 훈민정음
특히 근대는 ‘시민사회’라는 개념이 강조된다. 사회 구성원의 경제활동, 특히 상공업 참여가 늘어나면서 평등과 대중성이 강조되는 특징이 있다. 전근대 사회와 근대 사회의 차이점은 바로 국가 내부 대중의 광범위한 참여와 생산성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일반인의 삶은 고단했다. 대부분의 백성은 고강도 노동이 필요하지만 생산성은 낮은 일에 종사했다. 노동시간도 길었고, 이로 인해 교육은 귀족 및 지배층의 사치에 불과했다. 아울러 대부분의 지식은 구두(口頭)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근대가 시작되면서 바뀌었다. 일반 대중의 공업 및 상업 활동 참가로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기계를 통한 노동으로 상대적으로 노동 강도가 약해졌고, 일반 시민들이 경제활동에 참가하면서 대중 교육이 필수가 됐다.
문자가 일반 대중에게 보급되기 시작했고, 근대국가라 불리는 나라들에서는 문맹률이 20% 이내로 하락했다. 이로써 인류는 근대로 들어서면서 5000년간 인류를 괴롭혔던 무지와 절대적 빈곤, 악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게 됐다. 글을 알게 되면서 인류는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물질적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자 창제의 본래 목적 통치와 지배
문자를 만드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문자가 갖는 기능부터 살펴보자. 문자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인간의 언어를 적는 데 사용하는 시각적인 기호 체계”로 정의된다. 즉 말을 기호를 통해 시각화하고 보존함으로써, 문자의 발명과 함께 지식을 형태가 있는 방식으로 전할 수 있게 됐다. 단순한 기록부터 통치, 행정령의 전파 등의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구전(口傳)보다 효과적으로 지식 전달(교육)이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문자가 모든 인류에게 쓰이게 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세계적으로 한글 외에 인공적으로 창시된 문자들을 보면, 문자의 기능이 국가의 행정과 기록을 용이하게 만들었고, 그 목적 역시 민중에 대한 지배력 강화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러시아어 및 슬라브 계열 언어에 주로 쓰이는 키릴 문자는 당시 동로마제국이 슬라브인들을 개종시키고 영토를 개척하기 위해 만들었다. 기초 지역 행정을 담당했던 교회를 중심으로 쓰이게 되는 언어가 되면서 행정용으로 사용이 우선시된 후에야 일반 민간에 보급됐다.
크메르 문자를 개수(改修)해 13세기 말 람캄행 대왕이 창제한 것으로 알려진 태국 문자도 일반 백성 보급용이라기보다는 산스크리트어를 더 잘 배우고 싶다는 왕의 개인적 욕구와 종교, 행정적 필요에 의해 창시된 문자다. 거란, 서하 등 몽골계 북방 민족들이 사용했던 한자 개수 문자도 행정과 집권층의 교육을 위해 만든 문자였다.
따라서 인간이 창조한 모든 문자는 행정 체계 확립, 교육 등의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일부 민족의식 고취용으로 만들어진 인공 알파벳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창시자가 있는 문자는 국가 통치를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과 행정의 표준화, 그리고 상류층의 교육용으로 창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글은 처음부터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창시됐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세종의 파격적 선언 – “백성을 가르치겠다”
이러한 점에서 훈민정음은 역사 기록에서 인공적으로 창제된 문자 중 가장 특이한 프로젝트로 볼 수 있다. 세종대왕이 이 글을 창시한 목적은 백성을 교육시켜 앞으로 나아가게 하겠다는 것이었고, 세종은 창제 전부터 이러한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세종의 글자 창조에 계몽주의적 욕구가 있었다는 것은 최만리, 하위지, 정창손 등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을 때 매우 크게 분노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세종실록 26년 2월 20일 기록을 보자.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느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하는 것 아니냐.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글 창제 후에도 이러한 백성 교육에 대한 의지를 훈민정음 언해본 서문에 명시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문·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러한 백성 계몽의 의지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말 자체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문 의미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처음부터 교육과 문맹 퇴치용이라는 점을 제목에서부터 분명히 한 것이다.
15세기 훈민정음이 창시되던 봉건 시대의 사상에 비한다면 세종대왕이 글을 만든 의도 자체는 파격이었다. 특히 당시 문자 사용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 행정 및 상업, 그리고 상류층 교육으로 창제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백성들 간의 소통용으로 만드는 선례는 아예 없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세종대왕의 애민 정신은 시대를 앞선 희귀한 사례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 의미를 ‘우리에게 맞는 쉬운 문자를 모든 이가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니 널리 사용하라’고 선언했다. 현대적 의미로 비유하자면, 국가 전용 네트워크를 일반 백성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전용선을 만들어 개방하여 많은 백성을 교육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이런 사고는 18세기 이후 근대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개념임에도, 세종대왕은 이런 앞선 개념을 조선 땅에서 인류 역사의 흐름보다 3세기나 앞서서 시도한 것이다.
▲ 훈민정음 해례본 목판

신분제의 벽 – 사대부들의 저항
백성 계몽을 위한 세종의 의도에는 시대의 한계도 분명히 존재했다. 우선 당시 시대상에서는 신분제로 인해 사회 내 평등의식이나 연대의식보다는 위아래를 나누는 수직적 신분 의식이 강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사대부들은 세종이 명분으로 내세웠던 백성 계몽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정창손은 《삼강행실도》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성인군자는 타고나는 것이고, 백성들에게 번역씩이나 해주면서 교육시켜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말을 하여 세종의 분노를 샀다. 파면을 감수할 정도로 신분 의식에 대한 관념이 확고했던 것이다.

이러한 당시 사대부들의 차별의식은 국가관에서도 드러난다. 최만리의 유명한 상소가 대표적인 예다.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遵行)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예부터 구주(九州)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蒙古)·서하(西夏)·여진(女眞)·일본(日本)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최만리는 사대주의와 화이론(華夷論)적 명분에 따라 한글 창제를 반대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정창손의 백성과 사대부를 천부적으로 다른 존재로 보는 관점을 국가적 스케일로 옮겨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40년 만에 노비까지
그러나 이러한 저항 속에서도 훈민정음은 반포됐고, 문맹률을 낮추고자 하는 세종의 프로젝트는 가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글은 1446년 반포 이후 빠른 결실을 보게 된다.
초기에는 여성들이 많이 한글을 썼기 때문에 ‘암클’ 등으로 낮춰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궁중과 일부 양반층, 백성들 사이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고, 훈민정음이 반포된 뒤에는 일부 관리를 뽑을 때 훈민정음을 시험하도록 했다. 이후로 민간과 조정의 일부 문서에서 훈민정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한글 보급 정책에 따라 한글은 빠르게 퍼졌다. 반포된 지 40년이 조금 넘은 1500년대에는 지방의 노비 수준 신분인 도공(陶工)에게까지 퍼지게 됐다. 높은 분들은 한문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백성들끼리는 최소한 널리 읽힐 수 있는 글이 탄생한 것이다. 이는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닦는 계기가 됐고, 최소한 조선이 지배하는 영토의 사람들이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의식을 지니게 되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그리고 우리는 개화기 이후 일제강점기와 분단 및 한국전쟁 등 국토가 파탄되는 위기를 겪게 되지만, 한글이 있었기에 모든 이가 글을 빠르게 배울 수 있었다. 교육과 행정을 다른 개발도상국보다 더 효율적으로 빨리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돼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루게 되는 기반이 된 것이다.
유럽보다 300년 앞선 계몽군주
그동안 우리는 한글을 돌아보면서 한글의 의미를 언어학적 미학만 바라보았을 뿐, 글의 창제가 주는 세계사적 의미를 상대적으로 등한시한 경향이 있다. 이번 특집 리포트에서는 그런 점에 관점을 두고 한글이 갖는 역사적 의의에 초점을 맞췄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글이 창제된 문자 중 특이하고, 가장 근대적인 의도로 창설된 문자라는 것을 살펴봤다. 또한 한글과 다른 나라에서 창제된 글의 의도와 과정을 보면, 세종대왕의 의도가 그 시대에서는 생각지도 못하던 ‘모든 국민을 교육시킨다’는 민주적 사고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한민족에게는 근대적인 계몽군주가 존재했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보다 더 위대한 근대 계몽군주가 있었다.
인류 역사가 중세 어둠에 허덕이고 있을 때, 그들보다 300년을 앞서 자신의 나라에 사는 모든 이를 위한 ‘백성의 나라’를 꿈꾸었던 진정한 근대 계몽군주, 세종대왕이다.
10월 9일 한글날, 우리가 기념하는 것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앞선 ‘대중 계몽의 꿈’이자, 시대를 뛰어넘은 근대적 실험의 시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