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천외한 비즈니스 모델까지 등장한 열풍의 이유는?
사이공강이 내려다보이는 호찌민시 D-Joy 스타디움. 오후 6시가 되자 11개 코트가 일제히 불을 밝힌다. 70세 할머니 가 12세 손자와 한 팀이 되어 30대 직장인 부부와 맞붙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에선 나이도 성별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구멍 뚫린 플라스틱 공 하나가 세대를 잇는다. 피클볼(Pickleball)이다.
테니스장 1개를 3개로 쪼개 만든 작은 코트에서 벌어지는 이 경기는 코로나19로 모든 운동이 중단됐던 베트남에서 ‘기적의 반전’을 만들어냈다. 호찌민시 2군과 7군에만 15개 이상의 전문 시설이 생겨났고, 심지어 카페와 피클볼 코트를 결합한 ‘Bad Bunny Pickleball Cafe’ 같은 기상천외한 비즈니스 모델까지 등장했다.
테니스·배드민턴·탁구가 만난 ‘완벽한 조합’
베트남 피클볼의 가장 큰 매력은 **’진입장벽 제로’**다. 배드민턴 경험자라면 5세션, 테니스 경험자라면 10세션이면 충분하다. 장비비는 50만동(약 2만5천원), 코트 사용료는 시간당 10만동(약 5천원)이면 된다.
피클볼은 1965년 미국 워싱턴주에서 탄생한 라켓 스포츠로, 테니스·배드민턴·탁구의 장점을 결합한 독특한 특성을 지닌다.
20피트×44피트(6.1m×13.4m) 크기의 작은 코트에서 구멍이 뚫린 플라스틱 볼을 패들로 치는 이 스포츠는 네트 양쪽 7피트 구역에서 공을 바운드 없이 치는 것을 금지하는 ‘논볼리 존(키친)’ 규칙으로 **’스포츠계 최고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현한다.
미국에서는 2024년 현재 1,980만 명이 참여하는 최고 성장 스포츠로 4년 연속 선정됐으며, 글로벌 시장 규모가 2023년 15억 달러에서 2033년 44억 달러로 3배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르브론 제임스, 톰 브래디 등 스포츠 스타들의 투자가 이어지면서 메이저리그 피클볼(MLP) 같은 프로 리그도 활성화되고 있다.
‘베트남식 맞춤 스포츠’로 자리잡은 이유
베트남에서 피클볼이 폭발적 인기를 끄는 이유는 베트남인들의 문화적 특성과 완벽한 궁합을 이루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배드민턴, 탁구, 테니스 등 라켓 스포츠가 인기 높은 나라로, 기존 경험자들이 5-10세션 내에 피클볼을 습득할 수 있다는 점이 핵심 성공 요인이다.
경제적 접근성도 뛰어나다. 장비비는 수십만동에서 100만동(약 5만원) 수준으로 테니스 대비 저렴하고, 코트 대여료도 시간당 10만동(약 5천원) 내외다. 특히 테니스 코트 1개를 피클볼 코트 3개로 변환하는 사업 모델이 확산되면서 시설 접근성도 크게 개선됐다.
가족 단위 참여가 활발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까우지아이 구의 Duc Quang 가족은 8명이 함께 주 3-4회 피클볼을 즐기며, 70대 조부모부터 12세 어린이까지 세대를 아우르는 스포츠로 자리잡았다. 베트남 전통 운동인 ‘듀엉 신(양생)’처럼 부드러운 운동으로 인식되면서 중장년층의 참여도가 특히 높다.
코로나19가 가속화한 새로운 스포츠 문화
코로나19 팬데믹은 베트남의 피클볼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2020년 3-4월 모든 야외 스포츠 활동이 중단된 상황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요구사항에 부합하는 스포츠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피클볼의 ‘키친’ 규칙은 자연스럽게 플레이어 간 거리를 유지하게 하고, 작은 코트 크기로 소규모 공간에서도 안전하게 즐길 수 있었다.
팬데믹 이후 베트남인들의 건강 의식도 크게 높아졌다. Manulife Asia Care Survey에 따르면 베트남 응답자의 72%가 더 규칙적인 운동을 한다고 답했으며, 피트니스 장비 시장도 2024년 6억 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베트남인의 60%가 피트니스 웨어러블을 소유하고 있어 지역 평균 46%를 크게 웃돈다.
아시아 피클볼 허브로 부상
베트남은 현재 아시아에서 피클볼 인지도 88%로 1위를 기록하며(싱가포르 70% 2위), 152% 성장률로 역시 1위를 달리고 있다. UPA Asia 조사에서 정기 플레이어 수는 1,600만 명으로 인도(1억7,800만 명), 중국(6,000만 명) 다음 3위를 차지했다.
프로 선수 Quang Duong은 “베트남은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피클볼 전용 센터와 플레이어를 보유하고 있다”며 베트남의 위상을 강조했다. 실제로 2023년 세계 피클볼 챔피언십에서 Truong Quang Vu가 금메달을 획득하고, Quang Duong이 세계 6위에 오르는 등 국제적 성과도 거두고 있다.
Quang Dương
Trương Quang Vũ
호찌민시 2군·7군, 피클볼 메카로 떠올라
호찌민시 2군과 7군은 베트남 피클볼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15개 이상의 시설에서 총 80여 개 코트를 운영하며, 다양한 수준과 예산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다음은 두 지역의 대표적인 피클볼 시설 4곳이다.
1. 002 Pickleball Club (2군 타오디엔)
타오디엔 지역 중심부에 위치한 프리미엄 시설로, 4개의 에어컨 완비 실내 코트를 보유하고 있다. 시간당 20만-35만동(약 1만-1만8천원)의 합리적 가격에 이용할 수 있으며, 베트남어와 영어가 가능한 전문 코치진이 상주한다. 외국인 거주자가 많은 타오디엔 특성상 국제적 분위기를 자랑하며, 초급자부터 고급자까지 맞춤형 레슨을 제공한다. 주말에는 정기 토너먼트가 열려 커뮤니티 교류가 활발하다.
● 주소: 28 Duyen Hai, Thao Dien Ward, Thu Duc City, Ho Chi Minh City
● 전화: 0764 002 002
● 운영시간: 매일 06:00-22:00
● 웹사이트: Facebook @002pickleballclub
2. D-Joy Pickleball Stadium (호찌민시 최대 규모)
11개 야외 코트를 보유한 호찌민시 최대 피클볼 전용 스타디움으로, 사이공강과 도심을 조망할 수 있는 뛰어난 입지를 자랑한다. 최신 LED 조명 시설로 야간 경기도 가능하며, 각 코트마다 관중석을 설치해 대회 개최에 최적화되어 있다. 시간당 15만-25만동의 경쟁력 있는 가격과 함께 장비 대여 서비스도 제공한다. 주말마다 오픈 토너먼트를 개최해 베트남 피클볼 커뮤니티의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 주소: 15/1B Luong Dinh Cua, An Khanh, District 2, Ho Chi Minh City (Thu Thiem Park 근처)
● 전화: 98 556 19 83
● 웹사이트: Facebook @Pickleball-D-Joy
3. ESE Academy Tennis-Pickleball-Foam Tennis (7군)
8개 실내 코트와 청소년 특화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종합 라켓 스포츠 아카데미다. 9-14세 어린이를 위한 전문 피클볼 훈련 과정을 운영하며, 테니스와 피클볼을 연계한 독특한 커리큘럼을 제공한다. 완전 실내 환경으로 연중 안정적인 훈련이 가능하고, 학부모 대기실과 카페테리아도 갖춰져 있다. 월 정기 회원제(200만-300만동)와 일일 이용(시간당 30만동) 모두 가능하다.
● 주소: Cityview Tennis Court, 9-11 Tan Phu, Phu My Hung, District 7, Ho Chi Minh City
● 전화: 0903 990 167 ● 웹사이트: www.eseacademy.com | Facebook: @eseacademy
4. Bad Bunny Pickleball Cafe (7군)
베트남 최초의 카페-피클볼 복합 시설로, ‘Play & Chill’ 컨셉을 실현한 독특한 공간이다. 2개의 야외 코트(1개는 고정 지붕, 1개는 그물 차양)와 본격적인 커피숍을 결합해 경기 후 휴식과 사교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특히 여성 고객과 가족 단위 이용객들에게 인기가 높으며, 베트남 전통 커피와 서구식 브런치 메뉴를 제공한다. 시간당 12만5천-23만동으로 합리적이며, 장비 대여 서비스도 제공한다.
● 주소: 174 Pham Huu Lau, P. Phu My,Q.7, Ho Chi Minh City
● 운영시간: 매일 06:00-21:00
● Google Maps: Bad Bunny Pickleball Cafe로 검색
이들 시설은 모두 초보자 레슨부터 전문가 훈련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정기 토너먼트와 커뮤니티 이벤트도 활발히 개최하고 있다. ‘Pickleball Saigon’ 페이스북 그룹은 2,900명 회원을 보유하며 지역 피클볼 커뮤니티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정부 차원 지원으로 제도화 추진
베트남 정부도 피클볼 열풍에 주목하고 있다. 베트남 체육청(GDS)이 공식적으로 피클볼을 관리하기 시작했으며, 2025년 4월 문화체육관광부에 ‘베트남 피클볼 연맹’ 설립 제안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아시아 피클볼 연맹(AFP)과의 협력도 강화되고 있다. 2024년 9월 Dang Ha Viet 스포츠청장과 Hogan Lai AFP 회장이 회담을 갖고 “베트남이 아시아 피클볼 개발에서 선두”라는 점을 공식 인정했다. 일본과의 협력 방안도 논의되고 있어, 장비 지원과 코치 교육, 대회 조직 경험 공유가 예상된다.
급성장의 그림자, 체계화 과제 남아
하지만 급속한 성장에 따른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심판 부족과 판정 시스템 미비가 주요 문제로 지적되며, 일부 젊은 참가자들의 ‘SNS용 복장’ 논란도 제기되고 있다. 조직 관리 체계의 부족으로 인한 운영상 혼란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베트남의 피클볼 열풍은 단순한 스포츠 유행을 벗어나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베트남인들의 라켓 스포츠 기반과 가족 중심 문화, 경제적 실용성이 결합되어 폭발적 성장을 이뤘으며, 코로나19가 가져온 스포츠 문화 변화의 수혜를 받았다. 2025년 국가 연맹 설립과 함께 더욱 체계적인 발전 단계에 진입할 것으로 전망되며, 아시아 피클볼의 허브로서 베트남의 위상은 계속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