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나이티드의 베트남,태국 복귀, 단순한 노선 재개가 아니다
-380억弗 시장 놓고 ‘총성없는 전쟁’
지난 10월 27일 자정을 막넘긴 시간, 베트남 호찌민 떤선녁 국제공항. 로스앤젤레스에서 홍콩을 경유하여 막 도착한 유나이티드항공 820편이 활주로에 착륙하자 공항 소방차 두 대가 양쪽에서 물줄기를 뿜어 올렸다. 비행기가 지나가는 물의 아치 아래로 들어가는 ‘워터 캐논 살루트(Water Cannon Salute)’였다. 항공업계에서 역사적인 첫 취항이나 중요한 노선 재개 때만 벌이는 최고의 환영 의식이다.
11년 만이었다. 미국 항공사가 태국과 베트남에 다시 돌아온 것은. 하지만 이날 호찌민 공항의 물 세레모니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항공 노선 하나의 부활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동남아시아 시장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하늘 패권 전쟁’이 본격화됐다는 신호탄이었다.

연 5% 성장하는 ‘황금 시장’
미국 항공사들이 10년 만에 돌아온 이유는 명확하다. 돈이 된다.
동남아시아 항공 시장은 2025년 378억 달러(약 50조원) 규모에서 2030년 479억 달러(약 64조원)로 성장할 전망이다. 연평균 성장률이 4.84%에 달한다. 이는 성숙기에 접어든 미국이나 유럽 시장과는 비교가 안 되는 속도다.
보잉은 더 과감하게 전망한다. 2044년까지 동남아 항공 여객 수요가 지금의 3배 이상으로 폭증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중산층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실제 숫자도 이를 뒷받침한다. 태국만 봐도 올해 미국인 관광객이 80만8000명을 넘어섰다. 전년 대비 5% 증가한 수치다. 연말까지 109만 명이 방문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들이 태국에 떨어뜨리고 갈 돈만 2조4000억원에 달한다.
베트남은 더 가파르다. 외국인 방문객이 매년 늘고 있고, 특히 미국인들의 증가세가 두드러진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여기에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미국인 여행객들은 ‘돈을 쓴다’. 업계에서는 “미국인 승객 한 명이 중국인 승객 세 명만큼 수익을 낸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통한다. 비즈니스석을 예약하고, 공항 라운지를 이용하고, 각종 부가 서비스를 구매하는 ‘프리미엄 고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남아 항공 시장의 급성장은 어마어마한 인프라 투자로 이어지고 있다. 2024년 471억 달러였던 항공 인프라 투자액이 2030년에는 757억 달러로 늘어날 전망이다. 연평균 8%씩 증가하는 셈이다.
싱가포르의 창이공항은 세계 최고 공항으로 꼽힌다. 캄보디아는 11억 달러를 들여 수도 프놈펜 인근에 테초 국제공항을 개항했으며, 베트남도 2026년 내년을 목표로 호찌민 남부 동나이성에 롱탄 신공항을 건설중이다.
홍콩 경유, 영리한 전략
유나이티드의 전략은 영리하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방콕이나 호찌민으로 곧장 가지 않는다. 홍콩을 경유한다.
이른바 ‘제5의 자유(Fifth Freedom)’ 운항 방식이다. 국제법상 자국 항공사가 제3국을 경유해 제4국으로 가면서 그 구간 승객도 태울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유나이티드는 로스앤젤레스-방콕 전체 구간 승객도 태우면서, 동시에 홍콩-방콕 구간만 이용하는 승객들도 태운다.
원래는 캐세이퍼시픽이나 같은 아시아 항공사를 이용했을 승객들이다. 유나이티드는 이렇게 한 번에 두 시장을 노린다. 게다가 최종목적지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비행기 정비도 한다. 효율성과 수익성을 동시에 잡은 셈이다.
더 중요한 건 독점이다. 현재 태국과 베트남에 취항하는 미국 항공사는 유나이티드가 유일하다. 미국 교통부(DOT)로부터 승인받은 이 노선 권한은 당분간 유나이티드만 갖고 있다. 경쟁사들이 깨뜨리고 싶어 안달이 난 이유다.

▲ 홍콩공항의 모습
델타의 반격, 아메리칸의 후퇴
델타항공도 가만있지 않는다. 유나이티드의 복귀 소식에 즉각 대응에 나섰다.
델타는 싱가포르와 마닐라, 홍콩 직항 노선을 신설하고,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 서울 인천공항으로 가는 직항편도 늘린다는 계획이다. 합작 파트너인 대한항공의 허브인 인천공항을 거점으로 동남아 전역을 공략하겠다는 전략이다.
델타의 무기는 에어버스 A350 항공기다. 특히 A350-1000 기종은 초장거리 비행에 최적화돼 있다. 연료 효율이 뛰어나고 유지비도 적게 든다. 연료비가 운항 비용의 30%에 육박하는 장거리 노선에서는 이것이 수익과 적자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가 된다.
하지만 델타에게는 약점이 있다. 유나이티드가 샌프란시스코 거점을 중심으로 탄탄하게 구축한 아시아 네트워크가 없다는 점이다. 유나이티드는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시장 점유율 45%를 차지하며 연간 1400만 명을 수송한다. 동남아와 동북아 8개 도시로 촘촘하게 연결돼 있다.
델타는 과거 디트로이트, 시애틀, 로스앤젤레스에서 홍콩 노선을 시도했다가 모두 수익을 내지 못하고 철수한 전력이 있다. 광범위한 연결망 없이 직항 수요만으로는 수익을 내기 어렵다는 게 입증된 셈이다.
양사 CEO들의 신경전도 볼만하다. 유나이티드의 커비 CEO는 최근 “델타가 홍콩 노선에서 수익을 낼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우리를 따라하려는 반응적 조치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항공업계에서 이런 공개적 비난은 이례적이다. 수백억 달러 시장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반면 아메리칸항공은 아예 전쟁에서 하차했다. 미국 3대 항공사 중 하나인 아메리칸의 아시아 노선은 초라하다. 댈러스에서 도쿄·서울·상하이로, 뉴욕에서 델리로 가는 노선이 전부다.
서부 해안에 거점이 없는 것이 치명적이다. 아시아로 가려면 무조건 미국 중부를 거쳐야 하니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메리칸항공은 이제 “아시아 노선은 적자를 감수하고 운영하는 항공사들이 너무 많다”며 사실상 포기 선언을 했다.
대신 일본항공(JAL), 캐세이퍼시픽 같은 제휴사에 승객을 넘긴다. 항공업계에서 가장 중요한 격전지 중 하나를 경쟁사에 고스란히 넘겨준 셈이다.
올해 1~9월 실적이 이를 증명한다. 델타는 38억 달러(약 5조원), 유나이티드는 23억 달러(약 3조원)의 순이익을 냈다. 아메리칸항공은? 고작 1200만 달러(약 160억원)다. 3대 항공사 합산 이익의 2%에 불과하다.

뜻밖의 변수가 항공 지도를 바꿔놓았다. 러시아의 영공 폐쇄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가 서방 항공사들의 영공 통과를 금지하면서, 유럽-아시아 노선이 대혼란에 빠졌다. 루프트한자, 에어프랑스 같은 유럽 항공사들은 러시아 영공을 피해 남쪽이나 북쪽으로 크게 우회해야 한다. 비행 시간이 2시간 이상 늘어나고, 연료비도 급증한다.
반면 중국 항공사들은? 러시아 영공을 자유롭게 통과한다. 비행 시간을 2시간 단축하고, 그만큼 비용도 절감한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경쟁 우위다.
미국 동부 항공사들도 타격을 입었다. 뉴욕이나 보스턴에서 아시아로 갈 때 러시아 영공을 이용하지 못하면서 특정 노선은 운항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그 결과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같은 서부 해안 도시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동남아시아의 전략적 가치도 덩달아 상승했다. 유럽-호주, 미국-인도, 동북아-중동을 연결하는 허브로서 싱가포르, 방콕, 쿠알라룸푸르의 입지가 강화됐다. 지리적 위치가 곧 경쟁력이 된 것이다.

▲ 러시아 영공통과가 어려워지면서, 태평양을 건너는 노선의 소요시간이 1~2시간 더 길어졌다
수익성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
미국 항공사들이 넘어야 할 산은 많다.
가장 큰 도전은 수익성이다. 유나이티드가 독점이라지만, 과연 돈을 벌 수 있느냐는 별개 문제다. 홍콩 경유로 19~20시간 걸리는 긴 여정이다. 연료비가 만만치 않다.
게다가 경쟁자가 많다. 싱가포르항공, 타이항공, 베트남항공 같은 현지 항공사들은 자국 시장을 잘 안다. 정부 지원도 받는다. 에어아시아 같은 저가 항공사(LCC)는 요금을 30~40% 낮게 책정해 승객을 끌어모은다.
유나이티드와 델타가 승산이 있는 건 프리미엄 승객 때문이다. 비즈니스석과 일등석 승객들은 요금에 덜 민감하고, 수익률이 높다. 문제는 이런 승객이 충분히 있느냐는 것이다.
공항 혼잡도 골칫거리다. 방콕, 마닐라, 자카르타 공항은 이미 포화 상태다. 연간 3000만 명 처리 용량으로 설계된 공항에서 5000만 명을 처리하려니 지연과 혼잡이 일상화됐다.
조종사 부족도 심각하다. 코로나19로 해고됐던 조종사들이 다른 직종으로 떠났고, 새로 양성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와이드바디 기종을 조종할 수 있는 기장급 조종사는 더욱 귀하다. 임금 인상 압박이 거세다.
보잉과 에어버스의 항공기 인도 지연도 변수다. 신규 항공기가 제때 들어오지 않으면 노선 확대 계획에 차질이 빚어진다.
中 항공사들의 그림자
가장 큰 변수는 중국이다.
중국은 2020년 국내 항공 시장 규모에서 미국을 제쳤다. 현재 4335대의 민항기를 보유하고, 전국 262개 공항을 운영한다. 2035년까지 공항을 400개로 늘릴 계획이다.
중국국제항공, 중국남방항공, 중국동방항공은 보유 기종 수에서 세계 최대 항공사 반열에 올랐다. 특히 동남아와 아프리카 노선을 공격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중국 항공사들의 무기는 국가의 무한 지원이다. 단기적으로 적자가 나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노선은 운항을 유지한다. 카이나오(Cainiao) 같은 중국 물류 기업들은 동남아와 유럽에 항공 화물 허브를 구축했다.
공항 건설, 노선 개설, 비자 완화, 무역 협정이 하나의 패키지로 묶여 움직인다. 민간 항공사와 국가 전략의 경계가 모호하다. 이것이 서방 항공사들이 경쟁하기 어려운 이유다.
중국상업비행기유한공사(COMAC)가 개발한 C919 여객기도 주목된다. 보잉 737, 에어버스 A320과 경쟁하는 협동체 기종이다. 아직은 핵심 부품을 서방 업체에 의존하지만, 언젠가 이 의존도를 낮추면 항공기 시장 판도가 바뀔 수 있다.
미국 항공사 입장에서 중국은 경쟁자이자 시장이며, 동시에 피할 수 없는 변수다. 미중 관계가 개선되면 동남아의 전략적 가치는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베이징과 상하이로 직항하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미중 갈등이 심화되면 동남아는 우회로로서 가치가 더 커진다.

한국 항공사에 주는 시사점
이 전쟁은 한국에도 남의 일이 아니다.
대한항공은 델타항공의 합작 파트너로서 미국 항공사들의 동남아 진출을 돕고 있다. 인천공항이 미국과 동남아를 잇는 허브 역할을 한다. 델타가 로스앤젤레스나 뉴욕에서 인천으로 와서, 인천에서 동남아로 연결되는 구조다.
하지만 유나이티드가 홍콩 경유 직항 노선을 늘리면 한국을 거치지 않는 승객이 많아질 수 있다. 환승 수요가 줄면 인천공항의 허브 지위도 약해진다.
또 다른 문제는 중국이다. 중국 항공사들이 한중 노선에서 가격 경쟁을 벌이면서 한국 항공사들이 압박받고 있다. 여기에 동남아 노선까지 중국 항공사들이 공격적으로 확대하면 한국 항공사의 입지는 더 좁아진다.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유나이티드의 호찌민 물 세레모니는 화려했다. 하지만 진짜 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올해 3분기 유나이티드의 주당 순이익은 2.78달러로 시장 예상치(2.63달러)를 웃돌았다. 프리미엄 매출은 6%, 마일리지 매출은 9% 증가했다. 고급 승객 확보에 성공하고 있다는 증거다.
유나이티드의 커비 CEO는 “우리는 태평양 노선에서 경쟁사보다 한 세대 앞서 있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역사는 경고한다. 미국 항공사들은 과거에도 아시아 진출을 시도했다가 수익성 악화로 철수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핵심은 동남아시아의 성장이 계속될 것이냐, 그리고 미국이 중국과의 경쟁에서 경제적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항공 노선은 단순히 사람을 나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경제적 연결성이고, 문화적 교류이며, 전략적 영향력의 통로다. 유나이티드가 태운 승객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미국의 동남아 재진출 프로젝트의 일부가 됐다.
진짜 시험은 이 노선이 3년, 5년, 10년 후에도 살아남아 있느냐는 것이다. 시카고에서 광저우까지, 항공업계 임원들이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