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화실 학생들의 그림 전시회 개막식 때 일어난 일 입니다. 한 해 동안 열심히 배우고 자유로이 창작에 매진한 저희 화실의 어린 작가들을 위해 개막식 중에 특별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바로 미술 재료 럭키 드로우 였습니다. 전시 참가 학생 수에 맞게 여러 가지 재료들을 비공개로 준비해놓고 번호를 뽑아서 받아가는 형식이었습니다. 이벤트 전에 “저는 파스텔을 받고 싶어요.” 했었던 어떤 중학생은 신기하게도 정말 그 ‘파스텔’을 뽑았고, 다른 학생들도 대부분 자기가 원했던 재료나 아직 없었던 재료들을 뽑아가며 즐겁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거의 끝나갈 무렵 한 중학생이 올라와서 자신이 뽑은 번호를 외치는 순간, 선물을 확인 했더니… 아뿔사 ‘크레파스’ 였습니다. 그것도 분홍 플라스틱 가방 속에 담긴 아동용 크레파스. 선물을 주는 저도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고, 순식간에 전시회 개막식 장이 웃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울상이 되어 있던 그 학생에게 마음씨 좋은 초등학생이 흔쾌히 자신의 선물과 바꿔주면서 훈훈히 그 날의 이벤트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즐거웠던 에피소드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과연 웃을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미술 전공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는 ‘크레파스’ 라는 재료는 아동이 쓰는 재료라는 인식과 편견이 강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크레파스는 수채화를 그리기 전에 잠시 거쳐가는 재료라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등 고학년임에도 불구하고 크레파스를 사용하여 멋진 그림을 잘 그리곤 하는 한 아이의 어머님은 마치 미술실력이 안 늘어서 아이가 물감 사용하는 것을 꺼리고 크레파스만 좋아하는 것 같아 걱정이라는 상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크레파스’ 의 정식 명칭은 ‘오일 파스텔, 유성 파스텔(Oil Pastel)’ 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크레파스(Cray-Pas)’는 일본의 사쿠라사에서 처음 만들 때 ‘크레용’과 ‘파스텔’의 앞부분을 따서 만든 상표명입니다. 마치 반창고 살 때 ‘대일 밴드 주세요’ 하고 ‘대일 밴드’ 가 밴드의 고유 명사로 쓰이는 것처럼 정식 명칭인 ‘오일 파스텔’ 보다 ‘크레파스’ 가 훨씬 더 친숙합니다.
이렇게 대표적인 아동용 재료로 유명한 ‘크레파스’ 이지만 의외로 막상 수업을 하다 보면 유치부와 초등 저학년이 사용하기에 그리 적합한 재료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을 쓰지 않는 재료라 붓을 쓸 필요도 없고, 물의 양을 조절할 필요도 없어서 수채화보다 간편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상상하거나 그리고 싶은 것을 섬세한 선으로 표현하는 아이들에게 뭉툭하고 두꺼운 ‘크레파스’ 는 채색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그들이 그려놓은 작은 형태와 선들을 거침없이 뭉개버립니다.
그래서 이번엔 중고등학생들에게 ‘크레파스’를 쓰게 해보았습니다. 어릴 적 말고는 써본 적이 거의 없다는 학생들이 주어진 재료를 보고 처음에는 갸우뚱합니다. ‘이런 유치한 재료를 왜 써야 되지?’ 하는 표정들이 역력합니다. 그러나 막상 써보고 난 후에는 ‘크레파스’ 가 이렇게 좋고 편할 줄 몰랐다며 금새 사랑에 빠진 표정으로 변합니다.
그려 놓은 스케치에 맞춰서 색칠하기 급급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이미 기초도 어느 정도 쌓여 있고 물 조절, 기름 조절 등 이것 저것 계산할 필요 없는 이 매력적인 재료를 가지고 놀면서 자유 자재로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럼 전문 작가들의 경우에는 어떨까요?
일반인들에게는 낯설지만 ‘오일 파스텔’은 전문 작가들에게도 매우 인기 있는 재료입니다. 특히, 전문가용일수록 기름의 함유량이 높아서 더욱 더 부드럽게 그려집니다.
‘오일 파스텔’과 함께 유화에 쓰이는 ‘테레핀유’ 를 이용해서 종이 위에 녹여서 더욱 더 부드럽게 표현할 수도 있고, 라이터나 양초의 불을 이용해서 ‘오일 파스텔’을 녹이며 마치 ‘유화’ 처럼 질감을 내며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공연을 보러 갔을 때, ‘멜로디언’ 연주를 하고 있는 음악가를 보고 당황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릴 적 학교 준비물로 가지고 다니던 그 ‘멜로디언’ 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연주를 듣는 순간 그 멜로디언은 더 이상 초등학생의 멜로디언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악기 못지 않은 당당한 음악가의 악기였습니다.
이처럼 ‘크레파스’ 로 그림을 그리느냐, ‘유화’ 로 그림을 그리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재료의 성질과 장점을 알고 자신 있게 그리는 ‘크레파스’ 는 어쩌면 기름을 잘 사용할 줄 몰라 엉터리로 헤메면서 그리는 ‘유화’ 보다 더욱 더 가치 있을 수 있겠죠?
우리는 자주 고정관념과 편견에 사로잡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고정된 주위 시선의 평가에 새로운 시도는 움츠러들곤 합니다.
이번 주는 이것 저것 다 무시하고 아이와 함께 아이의 크레파스를 사용하여 나만의 그림을 한 장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오일 파스텔의 매력에 푹 빠지는 한 주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