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조림과 전투식량, 인류의 식생활을 바꾸다
인류 역사에서 음식 보존 기술은 단순한 생존 수단을 넘어 문명의 발전과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통조림과 즉석식품의 배경에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과 인류의 창의적 대응이 숨어있다. 불과 200여 년 전 나폴레옹의 고민에서 시작된 통조림의 발명부터 현대 군대의 첨단 전투식량까지, 식품 보존 기술의 발전사는 인류 문명의 또 다른 기록이다.
불의 발견에서 염장까지, 인류 최초의 식품 보존 기술
인류가 식품 보존과 처음 만난 것은 불의 발견과 함께였다. 하버드대 교수 가이크로스비의 저서 ‘Cook, Taste, Learn’에 따르면, 불을 이용한 요리는 병원성 미생물을 죽여 음식을 더 안전하게 만들었고, 이는 초기 인류의 생존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신석기 시대 농업혁명과 함께 인류는 한 곳에 정착하며 계획적인 식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발생한 잉여 식량을 보존하기 위한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인류 인구는 불과 2000년 사이에 300만 명에서 1억 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 식품 저장의 역사도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충청남도 부여의 저장혈이나 ‘삼국지’ 위지 고구려전에 곡물창고가 있었다는 구절은 고대부터 식품 저장 기술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가장 오래된 저장 기술인 건조법과 염장법은 지금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특히 염장법은 소금의 삼투작용을 이용해 식품의 수분을 제거하고 미생물의 생육을 억제하는 원리로, 김치와 젓갈 같은 전통식품의 기반이 되었다.
(염장식 생산과, 몽골 건조음식인 보르치의 모습)
나폴레옹의 고민이 탄생시킨 통조림, 식품 보존의 혁명
“군대는 배로 행군한다”라는 나폴레옹의 말처럼, 전쟁에서 식량은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소였다. 18세기 말, 유럽 전역에서 전쟁을 치르던 나폴레옹은 병사들이 신선한 음식 부족으로 괴혈병 등 질병에 시달리는 것을 보며 새로운 식품 보존 방법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795년, 나폴레옹은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해 “음식을 상하지 않고 오래 보관하는 방법”을 개발한 사람에게 1만 2000프랑의 상금을 내걸었다. 이에, 1804년 프랑스의 과자점 주인 니콜라 아페르가 ‘병조림’ 기술을 발명했다. 그는 샴페인 유리병에 음식을 넣고 코르크 마개를 느슨하게 막은 뒤 끓는 물에 가열한 후 밀봉하는 방식을 고안했다.
이 발명은 1810년 영국에서 더욱 발전했다. 프랑스인 필립 드 기라르와 영국 기계공 피터 듀란드가 유리병 대신 양철 통을 사용한 ‘통조림’을 개발한 것이다. 1812년 템스강 우측 버몬드 지구에 세계 최초의 통조림 공장이 설립되었고, 이는 곧 영국 해군의 군수품이 되었다.
통조림은 나폴레옹 군대의 전투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취사에 필요한 시간을 절약하고 식량 보급체계를 단순화함으로써 부대의 행군 속도를 빠르게 했다. 또한 병사들이 더 이상 무거운 취사도구를 휴대할 필요가 없어 기동성도 크게 향상되었다.
세계대전, 통조림 진화의 전환점이 되다
제1차 세계대전과 참치 통조림의 부상
제1차 세계대전은 통조림 산업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각국은 영양가 높고 오래 보존할 수 있는 식량을 대량으로 확보해야 했고, 통조림은 그 해답이었다.
1903년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의 ‘앨버트 P. 핼프힐(Albert P. Halfhill)’은 정어리 어획량 감소로 이를 대체할 방안을 모색하던 중 우연히 참치 통조림 제조에 성공했다. 당시 참치는 스포츠 낚시용 어종으로만 여겨졌고 식용으로는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핼프힐은 ‘화이트 미트 참치(white meat tuna)’라는 마케팅 전략으로 참치를 ‘바다의 닭고기’로 포지셔닝했으나, 초기에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전쟁으로 식량 공급이 불안정해지자 미국 정부는 군대와 동맹국에 단백질이 풍부한 식품을 공급해야 했고, 참치 통조림이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100g당 단백질 함량이 25g에 달하는 참치는 쇠고기(26g)와 맞먹는 단백질 공급원이면서도 가격은 훨씬 저렴했다.
‘반 캠프(Van Camp)’ 사와 ‘버블 비(Bumble Bee)’ 사 같은 회사들이 참치 통조림 생산에 뛰어들었고,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생산 첫해 700개에 불과했던 참치 통조림은 1914년 미국에서만 32만 개가 생산됐으며, 1917년에는 70만 개, 1920년에는 무려 2100만 개까지 급증했다. 전쟁 후에도 참치 통조림의 인기는 계속되어 미국인의 식탁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콘비프에서 과일 통조림까지, 전쟁이 만든 다양한 통조림
세계대전은 육류 통조림 외에도 다양한 통조림의 발전을 촉진했다. ‘콘비프(Corned Beef)’ 통조림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의 주요 식량이었다. 소고기를 소금물에 절인 후 통조림으로 제조한 이 제품은 영양가가 높고 맛이 좋아 ‘비프 해시(Beef Hash)’라는 군대식 요리의 주 재료가 되었다.
또한 전쟁 중 비타민 결핍을 방지하기 위해 과일 통조림도 널리 보급됐다. 파인애플, 복숭아, 배 등을 설탕 시럽에 담근 과일 통조림은 병사들에게 귀중한 비타민 C와 단순당을 공급했다. 특히 1943년 영국 정부는 비타민 C 확보를 위해 자국민보다 군인들에게 과일 통조림을 우선 배급했다.
생선 통조림도 중요한 단백질원이었다. 참치 외에도 연어, 정어리, 고등어 통조림이 전쟁 중 널리 소비됐다. 특히 노르웨이산 정어리 통조림은 오메가-3 지방산이 풍부해 ‘뇌 식품’으로 불리며 영국과 미국 해군에게 중요한 식량이었다.
채소 통조림은 영양소 균형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완두콩, 당근, 옥수수 통조림이 대표적이었으며, 특히 토마토 통조림은 스튜나 파스타 소스의 기본 재료로 활용됐다. 그 외에도 수프 통조림, 전투용 비스킷, 초콜릿 등 다양한 통조림과 보존식품이 개발되어 현대 식품산업의 기반을 마련했다.
현대 통조림 산업의 글로벌 확장
세계대전을 통해 확립된 통조림 기술과 인프라는 전후 글로벌 식품 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연간 2000억 개 이상의 통조림이 생산되고 있으며, 약 1200종의 원재료가 사용되는 거대 산업으로 성장했다. 캠벨(Campbell), 하인즈(Heinz), 델몬트(Del Monte) 같은 거대 식품 기업들은 통조림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통조림 기술도 크게 발전했다. 1959년 미국의 에르멀 클레온 프레이즈(Ermal Cleon Fraze)가 발명한 ‘이지-오픈 엔드(Easy-Open End)’ 기술은 별도의 도구 없이 손쉽게 통조림을 열 수 있게 했다. 또한 ‘두-피스 캔(Two-Piece Can)’ 기술은 통조림 제조 과정을 단순화하고 비용을 절감했다.
식품 안전성 측면에서도 큰 진전이 있었다. 1960년대부터 ‘보툴리즘(Botulism)’ 중독 방지를 위한 가열 살균 프로세스가 표준화되었고, BPA(비스페놀 A) 없는 안전한 내부 코팅 기술이 개발되어 통조림의 안전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최근에는 프리미엄 통조림 시장도 성장하고 있다. 최고급 올리브 오일에 담긴 참치, 고급 소스로 맛을 낸 홍합, 유기농 인증 채소 등 고급 식재료를 활용한 프리미엄 통조림이 미식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해산물 통조림은 세계적인 미식 상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통조림은 또한 식량 안보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자연재해나 전염병 대유행 같은 위기 상황에서 통조림은 필수 비상식량으로 여전히 중요하다.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많은 국가에서 통조림 비축 현상이 나타났던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200여 년 전 나폴레옹 군대를 위한 실용적 해결책으로 시작된 통조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진화했고, 이제는 글로벌 식품 문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전쟁의 필요가 만들어낸 통조림은 인류의 식생활을 영원히 바꾸어 놓은 혁명적 발명이었다.
현대 전투식량과 즉석식품의 과학: 첨단 기술의 집약체
끈 한 번 당기면 따뜻한 식사가, 자체 발열 전투식량의 원리
현대의 전투식량은 단순한 식품을 넘어 첨단 과학기술의 결정체다. 특히 최근 개발된 자체 발열 전투식량은 군사 작전 중에도 따뜻한 식사를 가능하게 하는 혁신적 제품이다. 이는 더 이상 뜨거운 물이나 불이 필요 없어 작전 중 노출 위험을 최소화하고 병사들의 전투력을 극대화한다.
자체 발열 원리는 화학반응을 이용한 ‘발열 반응’을 활용한다. 전투식량 내부의 발열체인 산화칼슘(CaO)과 물(H₂O)이 만나면 Ca(OH)₂가 생성되면서 강한 발열 반응이 일어난다. 이 반응으로 최대 90°C까지 온도가 상승하며, 5~8분 이내에 음식을 데울 수 있다.
또 다른 방식으로는 마그네슘(Mg)과 철(Fe) 분말이 섞인 발열체에 소량의 물이나 염화나트륨 용액을 넣어 Mg + 2H₂O → Mg(OH)₂ + H₂ 반응을 일으키는 방식도 사용된다. 이 반응은 최대 15분간 지속되어 음식을 완벽하게 데울 수 있다.
이러한 자체 발열 기술은 군사적 용도를 넘어 민간 분야에서도 캠핑용 식품, 재난 대비 비상식량 등으로 활용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동결건조기술이 사용된 제품의 예)
우주식품의 어머니, 동결건조 기술의 놀라운 발전
현대 전투식량과 즉석식품의 또 다른 핵심 기술은 동결건조(Freeze-Drying) 기술이다. 원래 의약품 보존을 위해 개발된 이 기술은 1960년대 NASA 우주 프로그램에서 우주식품 개발에 적용되면서 식품 산업에 혁명을 가져왔다.
동결건조는 영하 60℃의 초저온에서 식품을 급속 동결한 후, 0.006atm 이하의 고진공 상태에서 승화(고체에서 직접 기체로 변환) 과정을 통해 수분을 제거하는 첨단 기술이다. 이 과정에서 식품 내부 세포 구조가 파괴되지 않고 수분만 제거되기 때문에, 물을 다시 부으면 원래의 식감과 맛, 영양소를 거의 그대로 복원할 수 있다.
일반적인 건조 방식이 식품의 수분 함량을 15~25% 정도로 낮추는 데 비해, 동결건조는 수분 함량을 2~5%까지 낮춰 미생물 번식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그 결과 냉장 보관 없이도 10~25년까지 보존이 가능한 식품이 탄생했다.
동결건조 기술이 적용된 현대 전투식량은 가볍고 부피가 작아 휴대성이 뛰어나며, 다양한 메뉴 구성이 가능해 병사들의 전투 의욕과 사기를 높이는 데도 기여한다. 미군의 MRE(Meals, Ready-to-Eat), 한국군의 전투식량 등이 이 기술을 활용한 대표적 사례다.
즉석식품 유통기한의 비밀, 무균화 기술과 스마트 포장
즉석식품의 놀라운 보존성은 무균화 기술(Aseptic Technology)과 지능형 포장재의 발전 덕분이다. 무균화 기술은 식품과 포장재를 각각 살균한 후 무균 환경에서 충전·포장하는 방식으로, 즉석밥의 경우 121℃의 고압 증기로 완벽히 살균해 상온에서도 최대 12개월까지 보관이 가능하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헤드스페이스(Headspace)’ 기술이다. 포장 내 공간에 질소나 이산화탄소 같은 불활성 기체를 주입해 산소를 대체함으로써 산화와 미생물 성장을 억제한다. 이를 MAP(Modified Atmosphere Packaging) 기술이라고도 하며, 즉석식품의 유통기한을 2~3배 연장시킨다.
포장재 분야에서는 다층 구조 필름(Multilayer Films)이 혁신을 가져왔다. 폴리에틸렌(PE), 폴리프로필렌(PP), 나일론, 에틸렌비닐알코올(EVOH) 등 다양한 소재를 결합해 산소와 수분 차단성을 극대화한 포장재가 개발되었다. 특히 EVOH 층은 산소 투과율을 일반 플라스틱의 1/1000 수준으로 낮추어 식품의 산화를 획기적으로 방지한다.
최근에는 나노 기술을 적용한 ‘액티브 패키징(Active Packaging)’도 등장했다. 포장재 내부에 산소 제거제, 에틸렌 흡수제, 항균 물질 등을 내장해 식품의 신선도를 능동적으로 유지하는 기술이다. 또한 온도나 시간에 따라 색이 변하는 ‘인텔리전트 패키징(Intelligent Packaging)’은 식품의 신선도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천연 보존제의 진화, 안전성과 효과성의 균형
현대 식품 보존 기술에서 보존제의 역할도 진화하고 있다. 기존의 화학 합성 보존제에서 벗어나 천연 유래 보존제의 활용이 늘고 있다. 벤조산과 소르빈산은 각각 크랜베리와 로완베리에서 자연적으로 발견되는 성분으로, 이를 식품에 첨가해 곰팡이와 효모의 생장을 억제한다.
특히 유기산은 pH를 낮춰 미생물의 성장을 억제하는 원리를 활용한다. 구연산(Citric acid)은 감귤류에서 추출되며 pH 3.0~3.5에서 최적의 항균 효과를 보인다. 젖산(Lactic acid)은 김치나 요구르트 같은 발효식품에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성분으로, 병원성 미생물에 대한 강한 억제 효과가 있다.
무기물 보존제 중에서는 아황산염(Sulfites)이 주목받고 있다. 이는 와인 제조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천연 보존제로, 항산화 및 항균 효과가 뛰어나다. 또한 나트륨, 칼륨, 칼슘 등의 질산염과 아질산염은 육가공품에서 클로스트리디움 보툴리눔(Clostridium botulinum) 같은 위험한 세균의 성장을 억제하는 데 효과적이다.
최신 연구에서는 로즈마리, 오레가노, 타임 등의 허브에서 추출한 천연 항산화제와 에센셜 오일이 합성 보존제를 대체할 가능성이 입증되고 있다. 이들은 미생물 세포막을 파괴하고 효소 활성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식품의 보존성을 높인다.
이처럼 현대의 전투식량과 즉석식품은 화학, 식품공학, 재료공학, 미생물학 등 다양한 과학 분야의 첨단 기술이 집약된 결정체이다. 군사적 필요에서 시작된 이 기술들은 이제 일상 식생활의 편의성을 높이고, 우주탐사와 극지 탐험, 재난 대비 등 극한 환경에서의 식량 문제 해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식품 보존 기술의 미래는?
전쟁의 필요에 의해 발전한 식품 보존 기술은 이제 일상생활의 편의를 넘어 식량안보, 우주식품, 재난대비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 특히 COVID-19 팬데믹을 겪으며 장기 보존이 가능한 식품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했다.
최근에는 연어, 닭 가슴살, 죽순 등 고급 식재료를 활용한 프리미엄 통조림도 등장하고 있으며, 캠핑이나 등산 같은 야외활동용 식품으로 전투식량이 인기를 끌고 있다.
또한 식품 보존 기술은 환경 문제와 결합하여 새로운 과제에 직면해 있다. 플라스틱 포장재로 인한 환경오염을 줄이면서도 식품의 안전성과 보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생분해성 포장재 개발 등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나폴레옹의 군대를 위한 단순한 식량 보존 방법에서 시작된 통조림 기술은 200여 년 동안 인류의 식생활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앞으로도 식품 보존 기술은 지속 가능한 미래 식품산업의 핵심 요소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