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 Column – 나 답게 살자

요즘 한국의 형국을 보면 참 혼란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한국에서 최근 벌어지는 만화 같은 정치는 아마 인류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황당합니다. 온국민이 정치에 빠져서 허우적거립니다. 결코 올바른 상황은 아니지만 정치인들이 만들어 놓은 나라를 말아먹는 작태입니다.

그런 난장판에 등장하는 정치인, 관료, 군인들이 모습을 보면 한탄이 절로 새어납니다. 평소에 국민 다수에게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알고 있는 인물이 추악한 범죄에 연루된 범법자이고, 늘 정의를 부르짖던 젊은 정치인이 자신의 주군을 배신하는 행위를 거침없이 합니다. 용감한 군인인 줄 알았던 장성이 정치인의 호통에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을 보면, 그들의 참 모습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평소에 대중에게 보이는 모습이나 그 정체성과는 전혀 다른 실상에 국민들은 경악해합니다. 진짜 사람의 속은 모를 일입니다.
평소에는 모든 사람에게 다정하고 예의 바르던 친구가 음식점 종업원이나 골프장 캐디를 하인 부리듯이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알던 그 사람 맞나 싶어집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지요. 퉁명스럽고 거친 언사를 내 뱉던 자유분방한 친구가 부인을 만나면 졸지에 가장 예의 바르고 엄격한 가장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 이분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인지 헷갈립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늘 남들이 보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살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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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헌에 신독 愼獨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대학”과 “중용”에 나오는데, 신(愼): 조심하다, 삼가다, 경계하다. 독(獨): 혼자, 홀로 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니, 따라서, 신독이란, “혼자 있을 때 조심하다” 또는 “혼자 있을 때 삼가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즉 남들이 보고 있다고 자신의 행동이 달라져서는 안되고, 혼자 있을 때도 남이 보고 있듯이 늘 절제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윤동주 시인의 서시 중에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야 말로 진정으로 신독을 실천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미천한 내공의 범부가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늘이 주신 내 모습대로 살아가는 방식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나 답게 살자’ 입니다. 신독보다는 실천이 용이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정직하고 용기 있는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답게”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군인 답게 용감하게, 학생 답게 열심히 공부하고, 청년 답게 열의를 갖고 임하고, 어르신 답게 지혜로운 모습을 보이고 등, 자신의 자아와 정체성에 부합되는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일반적인 기대와 다른 행동을 보이면 “너 답지 않게 왜 그렇지? “하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자아와 정체성을 쌓아가며 ‘나답다’ 는 보이지 않은 형상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자아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자아에는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주관적 자아입니다. 두번째는 남들이 보는 자신의 모습으로 객관적 자아입니다. 세번째는 나의 생각이나 남의 시야 이전에 존재하는 본연의 나의 모습으로 순수자아라고 부르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을 비유한다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집을 사람이라고 보고, 집의 외관을 객관적 자아, 집의 내관을 주관적 자아, 그리고 집을 세우는데 근간을 이룬 주춧돌을 순수자아라고 보면 됩니다. 외관은 내가 보여주기 원하는 모습입니다.
내관은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입니다. 내관과 외관이 같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 어느정도 차이가 납니다.
그 집의 외관만을 본사람은 내관에 비가 새고 하수관이 막히는 것은 모릅니다. 그 외관 역시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집니다. 앞면은 화려하지만 그늘진 뒷면은 어둡고 지저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인간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자아상입니다.

집의 모습은 세월이 지나면서 변합니다. 관리를 안 하면 여기저기 비가 새고 누추해지기 마련이고, 꾸준히 관리한 집은 세월이 지나면서 더욱 창연한 빛을 발하겠지요. 객관적, 주관적 자아는 이렇게 세월에 따라, 관계에 따라 변화합니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집을 세우는 주춧돌입니다. 주춧돌은 집을 바꾸고 수리하더라도 여전히 변함없이 그 집을 지키는 근간으로 남아있겠지요. 그런 주춧돌이 인간의 순수자아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순수자아, 주춧돌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그 주춧돌에 맞는 집을 짖기 위함입니다. 주춧돌이 10층 빌딩을 지어도 될 만큼 크고 튼튼한데, 그 위에 초가집을 짖는다면 결코 자신의 자아대로 사는 삶이 아닐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춧돌이 평평하고 반듯하다면 그에 어울리는 멋진 집을 지을 수 있지만, 주춧돌이 굴곡지고 기울어 있다면, 그 위에는 아무리 좋은 집을 올려도 늘 세파에 시달리며 종국에는 무너지고 맙니다.

결국 자신의 순수자아, 집의 주춧돌이 알맞은 집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 답게” 사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답게 사는 것” 정치인이면 정치인 답게 정의롭게, 군인이면 군인 답게 군령에 목숨을 바치는 삶을 살아가야 자신 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순수자아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나 답게 사는 인생이 되겠지요. 기울어지고 굴곡진 주춧돌을 가진 사람이 정치를 하면 요즘의 한국처럼 나라를 혼란에 빠트립니다.

그대는 어떻습니까? 자신에 부합되는 삶을 살고 계신가요? 나 답게 살고 있는가? 라는 자문에 ‘예스’ 라고 대답하실 수 있나요?

한가한 주말, 자아에 대한 생각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인생의 내공을 쌓아가는 훌륭한 과정이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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