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노동 발전과 그 궤를 함께한다. 기원전 300년, 인도 뱅골연안에서 시작된 사탕수수 재배는 아랍 세계를 거쳐 유럽으로 전파됐다. 처음에는 약재로 취급됐던 설탕은 중세를 지나며 유럽 상인들의 주요 교역품으로 자리잡았고, 근대에 들어서며 설탕 산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포르투갈인들은 1425년 마데이라 제도에 사탕수수를 전파했고, 이후 아프리카 해안의 작은 섬 상 투메에서 노예제 기반의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시작했다. 열대 기후에서의 설탕 제조는 많은 물과 열을 필요로 했고, 이는 극도로 고된 노동 환경을 만들었다.
1530년 브라질로 건너간 사탕수수 재배는 유럽 자본, 아프리카 노동력, 신대륙의 비옥한 토지가 결합한 최초의 국제적 작물 생산 체계를 구축했다. 이는 대서양 노예무역을 더욱 가속화했다. 매년 약 60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들이 카리브해와 브라질의 플랜테이션으로 끌려왔다. 이중 도망치거나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은 발목이 절단되는 등 잔혹한 처벌을 받았고, 이로 인하여 연간 4~6%의 높은 사망률이 기록되었다.
19세기 산업혁명기에는 발달한 화학산업의 덕으로 사탕무에서 설탕을 수출하는 방식이 개발되면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즉각적인 에너지원으로서 노동자 계급의 주요 열량 공급원이 됐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과잉 섭취로 인한 건강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달콤한 맛 뒤에 숨겨진 설탕의 역사를 통해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벌어진 노동 착취와 인간 소외의 본질을 조명하고자 한다.
고대 문명과 설탕의 발견 (기원전 8000년 ~ 기원후 1세기)
인류와 설탕의 첫 만남은 동남아시아의 무성한 열대 우림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8000년경, 이 지역의 주민들은 높이 자란 사탕수수 줄기에서 달콤한 즙을 추출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이는 인류가 꿀 이외의 새로운 단맛을 경험한 획기적인 순간이었다.
사탕수수의 작물화는 두 개의 독립적인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첫번째는 뉴기니섬의 파푸아인들이 재배한 Saccharum officinarum이었다. 그들은 약 6000년 전부터 야생종인 Saccharum robustum을 선택적으로 육종하여 더 달콤하고 재배하기 쉬운 품종을 개발했다.
두번째는 타이완과 중국 남부의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재배한 Saccharum sinense였다. 이들은 적어도 5500년 전부터 사탕수수를 주요 작물로 재배했다.
흥미로운 점은 초기의 사탕수수 재배 목적이 인간의 식용이 아닌 가축, 특히 돼지의 사료용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탕수수의 용도는 점차 확대되었다. Saccharum officinarum은 뛰어난 당도로 인해 점차 다른 품종들을 대체해 나갔다. 오스트로네시아 상인들의 무역 네트워크를 통해 이 품종은 서쪽으로는 인도까지, 북쪽으로는 중국까지, 동쪽으로는 폴리네시아와 미크로네시아의 먼 섬들까지 전파되었다.
사탕수수의 전파 과정은 당시 해상 무역의 발달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약 3500년 전, 오스트로네시아 항해자들은 태평양을 건너 폴리네시아와 미크로네시아에 사탕수수를 전파했다. 3000년 전에는 인도와 중국에 도달했으며, 이 과정에서 현지 품종들과의 잡종 교배가 이루어져 새로운 품종들이 탄생했다. 결국 사탕수수는 유라시아 대륙 서부와 지중해 연안까지 퍼져나갔다.
설탕 제조기술의 발전과 확산 (1세기 ~ 15세기)
문명과 야만은 화학의 활용에 따라 결졍된다는 말이 있다. 설탕은 인류가 최초로 화학적으로 생산을 시작한 재료 중 하나다. 설탕이 태양열을 이용하여 증발을 활용한 자연적인 생산이면서 노동집약적인 생산이 특징이라면, 설탕은 액체를 인공적으로 가열하여 단순한 즙이 아닌 정제된 식품으로 생산한 식품이다. 설탕의 상품화된 생산은 1세기 이후 인도 북부에서 시작된다. “설탕(sugar)”이라는 단어의 어원인 산스크리트어 “sharkara”는 “자갈” 또는 “모래”를 의미했는데, 이는 당시 설탕이 결정체 형태였음을 보여준다. 중국어의 “砂糖(사탕)” 역시 “자갈 설탕”이라는 의미로, 초기 설탕의 물리적 형태를 잘 보여준다.
굽타 제국(350년경) 시기의 인도인들은 설탕 결정화 기술을 발전시켰다. 타밀 지역의 문학 작품들은 당시의 설탕 산업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푸라나누루, 아인쿠루누루 등의 문헌에는 거대한 기계를 사용한 사탕수수 착즙 과정이 코끼리의 소리에 비유되어 있으며, 설탕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연기는 산 위의 구름과 같다고 표현되었다.
설탕 제조 기술은 불교 승려들을 통해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특히 당 태종(재위: 626년~649년) 시기에 인도 사절들이 중국인들에게 사탕수수 재배법을 전수했고, 7세기부터 중국에서도 본격적인 사탕수수 재배가 시작되었다. 중국은 더 나은 제조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647년부터 두 차례에 걸쳐 인도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아랍 상인들은 인도의 설탕 제조 기술을 습득하여 더욱 발전시켰다. 그들은 인공 관개시설을 이용해 중세 아랍 세계 전역에 사탕수수 재배를 보급했다. 9세기에는 시칠리아에서, 10세기 초에는 알안달루스(현 스페인 남부)에서 대규모 설탕 생산이 이루어졌다. 아랍 세계의 확장은 설탕 생산 기술의 전파를 더욱 가속화했다.
당시 아랍의 설탕 산업은 상당한 수준의 조직화와 기술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운영했고, 현장에 제당소를 설치하여 생산 효율을 높였다. 이집트산 설탕은 최고급품으로 인정받았으며, 유럽으로 수출되는 주요 상품이 되었다.
신대륙 발견과 설탕 산업의 혁명 (15세기 ~ 17세기)
15세기 말, 대항해시대의 시작은 설탕 산업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1425년 포르투갈의 엔히크 항해왕자가 마데이라 제도에 사탕수수를 전파한 것을 시작으로, 1493년 콜럼버스의 두 번째 항해에서는 히스파니올라섬에 사탕수수 묘목이 전달되었다. 이는 신대륙에서의 설탕 산업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신대륙에서의 설탕 생산은 그 규모와 효율성 면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1550년 이전에 이미 약 3,000개의 제당소가 설립되었는데, 이들 시설은 주철 기어, 레버, 축 등 새로운 기계 장치에 대한 전례 없는 수요를 창출했다. 이러한 기술적 혁신은 후일 산업혁명의 토대가 되었다. 제당소의 설계와 운영 방식은 점차 체계화되었고, 이는 근대적 공장 시스템의 원형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설탕 산업 확장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노동 착취의 역사와 맞물린다. 처음에는 유럽의 계약 노동자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노동력으로 투입되었으나, 천연두와 같은 유럽의 질병, 말라리아와 황열과 같은 아프리카의 질병으로 원주민 인구가 급감했다. 유럽인들 역시 열대성 질병에 취약했고, 계약 노동자의 공급도 제한적이었다.
해결책으로 선택된 것이 아프리카 노예들이었다. 그들은 말라리아와 황열병에 대한 저항력이 강했고, 아프리카 해안에서의 “공급”이 용이했다. 이렇게 시작된 대서양 노예무역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강제 이주를 야기했다. 매년 수십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대서양을 건넜고, 그들 중 상당수가 항해 도중 목숨을 잃었다.
설탕의 대중화와 산업혁명 (18세기 ~ 19세기)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설탕은 유럽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으로 부상했다. 영국의 설탕 소비량은 1710년에서 1770년 사이에 5배나 증가했으며, 전체 유럽 수입품의 5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다. 18세기 후반에는 서인도 제도의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가 유럽 설탕 공급량의 80%를 담당했다.
이 시기에 유럽인들의 식생활은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잼, 사탕, 차, 커피, 코코아 등 설탕이 들어간 식품의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일부 카리브해 섬들은 다른 작물을 포기하고 설탕 생산에 전념했는데, 바베이도스와 영국령 리워드 제도의 경우 설탕이 전체 수출의 93%와 97%를 차지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술 혁신도 계속되었다. 농장주들은 새로운 품종의 사탕수수를 도입하고, 관개시설을 개선했으며, 보다 효율적인 가공 설비를 도입했다. 특히 프랑스령 생도맹그는 가장 성공적인 설탕 생산지로 발전했는데, 이는 새로운 품종 도입과 함께 수력 및 기계 장치의 혁신적 활용 덕분이었다.
현대 설탕 산업의 변화 (19세기 말 ~ 현재)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설탕 산업은 두 가지 큰 변화를 맞이했다. 첫째는 노동 형태의 근본적인 변화였다. 노예제 폐지 이후, 전 세계 각지에서 계약 노동자들이 유입되었다. 45만 명 이상의 인도인들이 영국령 서인도 제도로 이주했고, 다른 인도 노동자들은 나탈, 모리셔스, 피지 등으로 이주했다. 하와이에는 중국과 일본의 노동자들이 유입되었으며, 네덜란드는 자와섬의 노동자들을 수리남으로 이주시켰다.
둘째는 사탕무를 통한 설탕 생산의 혁신이었다. 1747년 독일의 화학자 안드레아스 마르크그라프가 사탕무에서 수크로스를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유럽의 설탕 공급이 차단되면서 사탕무 설탕 산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현재 사탕무는 전 세계 설탕 생산량의 약 30%를 차지하며, 이는 열대 지역에 의존하지 않는 설탕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산업의 기계화도 가속화되었다. 1768년 자메이카에서 처음으로 증기기관이 제당소에 도입된 이후, 다중효용 증발기, 원심분리기 등 새로운 기술이 지속적으로 개발되었다.
1813년에는 에드워드 찰스 하워드가 진공 상태에서의 설탕 정제 방법을 발명했고, 이는 연료 효율을 크게 향상시켰다.
옥수수가 대체한 설탕
20세기 중반 이후 설탕 산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세계 각국의 설탕 생산량이 증가하며 가격은 하락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경쟁자인 대체 감미료가 등장했다. 그중에서도 고과당 옥수수 시럽은 설탕의 지위를 가장 강력하게 위협한 도전자였다.
고과당 옥수수 시럽의 개발은 1957년 리처드 O. 마셜과 얼 R. 쿠이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산업적 생산 공정이 본격화된 것은 1965년부터 1970년 사이 일본 경제산업성 산하 산업과학기술원의 타카사키 박사에 의해서였다. 이 새로운 감미료는 1975년부터 1985년까지 불과 10년 만에 미국의 가공식품과 청량음료 시장을 급속도로 장악했다.
코카콜라와 펩시 같은 거대 청량음료 제조사들은 1984년 미국 시장에서 설탕 대신 고과당 옥수수 시럽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이들 회사는 다른 국가에서는 여전히 설탕을 사용했지만, 미국에서만큼은 원가 절감을 위해 고과당 옥수수 시럽으로 전환했다. 이는 미국 내 설탕 정책이 식품 산업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인류문명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재료 설탕
설탕은 인류 역사에서 단순한 식품을 넘어 문명의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였다. 고대 인도에서 시작된 설탕의 여정은 아랍 세계와 유럽을 거쳐 신대륙에 이르렀고, 그 과정에서 국제 무역과 노동 형태, 산업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후반 고과당 옥수수 시럽의 등장은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설탕의 독점적 지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오늘날 설탕은 건강에 대한 우려와 대체 감미료의 도전 속에서도 여전히 식품 산업의 중요한 원료로 남아있다. 그러나 소비자들의 건강 인식 변화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설탕 산업은 지속적인 변화와 적응을 요구받고 있다.
옥수수에서 설탕을 수출하는 시대로 들어간 지금도 설탕의 미래는 어떤 형태로 진화할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