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시작된 지 한달이 지났지만, 을사년이라는 육십갑자의 동물이 정해지는 기준일은 양력과는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음력설을 기준으로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입춘을 기준으로 한다고 합니다. 올해 2025년 입춘은 지난 2월 3일입니다. 그래서 엄격하게 따지면 을사년이 시작된 날은 구정 연휴가 지나고 일상의 업무가 시작된 2월 3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을사년의 동물은 뱀입니다. 천간(天干)을 나타내는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중 ‘을’은 목(木)에 해당하며, 색깔은 청색입니다. 그래서 청색 뱀의 해입니다. 청색 뱀은 강한 독을 지닌 뱀인데 올해는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합니다.
지난 TET 연휴로 한가했던 베트남 거리가 다시 일상을 찾아가며 분주한 모습을 보입니다. 베트남의 TET 연휴는 베트남인의 정서를 나타내는 행사이기도 합니다. 명절의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따뜻한 미소가 공감을 일으키고,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 이웃들과 나누는 정감 어린 대화는 살아가는 이유와 가치를 알려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베트남의 가장 소중한 명절인 TET 연휴는 단순한 휴식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난 해를 정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아 가족과 이웃, 친지들과 함께 새해의 복을 빌어주고 공유하는 축제의 자리이자,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존재를 재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또한 바쁜 일상을 살아가다 맞이하는 열흘 간의 긴 연휴는 평소에 잊혀진 작은 기쁨들과 다시 연결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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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이 타향일 수밖에 없는 한국인은 이번 TET 기간 동안 고국을 찾았습니다. 시끄러운 고국을 굳세게 지키고 있는 형제 자매와 그 가족들을 만나고 새해인사를 나누며 그들과 함께 보낸 귀중한 시간은 새삼스럽게 삶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되새겨주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내가 속한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존재와 그 안에서 담긴 자신의 모습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소속감에 안주하고 또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역시 베트남 사람들이 TET연휴를 보내며 느낀 감정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렇게 오랜만에 찾아온 긴 연휴는 단순한 일상의 멈춤이 아닌, 어김없이 찾아오는 마감일과 끝없이 이어지는 할 일 목록 속에 묻혀 있던 감사와 기쁨의 본질을 재발견할 수 있는 창이 되기도 합니다. 연휴에도 티브이를 통해 쏟아지는 뉴스에서는 여전히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달려가고 있다고 알려주지만 잠시 돌아온 고향에서 갖는 마음의 시간은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느리게 흘러갑니다.
느린 시간의 리듬은 그동안 잊었던 것들을 일깨워줍니다. 바쁜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던 시간의 소중함을 일러주고 매 순간을 온전히 음미하라고 속삭여줍니다. 아침 커피 한 잔에서 여유로움을 찾고, 가벼운 복장으로 나선 한가한 동네 산책은 잊고 지내던 주위의 풍경과 마음의 소리를 다시 찾아가는 귀한 여정이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끊임없는 울리는 업무 알림의 일상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면 삽니다. 당연하게 존재하는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한 가치를 잊고 삽니다. 그러다 기대치 않은 느린 시간을 만나면 그런 당연함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떠오르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 중에 가장 공감이 가는 구절을 하나만 뽑으라면 “범사에 감사하라” 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가 숨 쉬고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가족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항상 따뜻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이웃, 나의 취향을 기억하는 식당 주인, 아침마다 늘 손들어 인사를 전하는 빌딩 관리직원들, 바쁜 와중에도 안부를 묻는 친구—이 모든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이야기 속에서 소중한 장면이 되어줍니다. 그리고 그런 장면들이 모여 우리 삶의 서사를 채워갑니다.
어느 탈북 여대생이 한국에 와서 하는 인터뷰를 봤습니다. 그녀는 한국에 와서 한국민이 당연히 여기는 것들, 자신의 형편에 맞게 식사를 즐기고, 자유롭게 일자리를 선택하고, 언제든지 친구를 만나고, 추위를 이기도록 집안 온도를 자유로이 조절할 수 있고, 어디서나 편하게 인터넷을 서핑 하는 이 모든 것들이 북한에서 온 자신에게는 넘치도록 감사할 일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가 누리는 이 당연함이 얼마나 값진 일이라는 것을 잊고 살아왔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당연함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대한국민은 대통령마저 나가라 말라 하며 외치는 자유를 당연히 누리고 있지만 그 자유를 위해 피 흘린 어른들의 노고는 잊고 삽니다. 당연한 자유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은 그 소중한 자유를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는 각오로 발전될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은 사랑을 바탕으로 합니다. 사랑의 장터에는 미음이나 증오가 설 자리가 없고 혼란은 사라집니다.
연휴 일탈의 즐거움
TET 연휴기간의 지루하도록 한가한 시간은 제 마음에 작은 깨우침과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는 종종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 속에 묻힌 삶의 풍요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사 두고는 쳐다보지도 않은 책을 마음 편하게 읽어보고, 유튜브에서 알려주던 레시피 대로 요리도 만들어 봤습니다. 마음 컷 눈물을 흘려도 좋을 아름다운 영화도 천천히 감상했습니다. 그런 일탈의 시간을 통해 내가 살아있다는 존재의 기쁨을 느낍니다.
기쁨은 거창한 모험이나 대단한 성취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가만히 앉아 세상을 바라보며 온전히 현재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아있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시간들이 자신의 마음을 돌보는 소중한 순간이라는 것을 더불어 깨닫습니다.
이렇게 가끔 만나는 느린 시간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하며 우리 삶에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일러줍니다. 그것은 끝없는 성공의 추구가 아닌, 잠시 멈춰서 현재를 음미하고,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며, 그런 감사를 통해 삶의 기쁨을 되찾는 지혜입니다.
모든 순간에 일어나는 범사에, 내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 TET 연휴가 전해준 축제의 여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