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황제 잭 니클러스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내
골프를 즐기는 자!
“내가 1967년에 농담을 한 번 했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이번에 오픈에서 우승하고 나서 똑같은 농담을 다시 하자 모두 웃었다” – Lee Trevino
즐거운 멕시칸이라는 의미를 지닌 “Merry Mex”라는 애칭으로 불린 세기의 골퍼 리 트래비노, 그의 업적이나 행적에 비해 그의 이름은 현대의 골퍼들에게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모으는 과정에 몇몇 골퍼를 만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절반 이상이 그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베트남 골프와 상당한 관련이 있음에도 말이다.
그는 베트남의 가장 전통 있는 골프장의 하나인 베트남 골프 컨트리 클럽(VGCC)의 이스트 코스를 디자인 한 사람으로 개장식에 참석하여 직접 시타를 하며 라운딩을 한 적이 있다.
오늘은 이렇게 베트남과 인연도 있을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 시작한 고상하고 심각한 골프를 흥겨운 유흥으로 만들며 진정으로 골프를 즐긴 사내, 리 트레비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한다.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 멕시칸 미국인, 리 트레비너
리 트레비노가 고상하고 심각한 골프를 유쾌한 유흥거리로 만들었다고 해서 그가 골프를 대충 친 것이 아니다. 그의 골프 실력은 그 누구도 범접하기 힘들 정도로 우수했다. 골프황제 잭 니클러스는 그를 두고 “벤 호건과 함께 골프 역사상 가장 볼을 잘 치는 사람”이라고 했다. 또한 남아공의 천재 골퍼 닉 프라이스는 “역사상 최고의 골프 일인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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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트레비노의 골프 업적
1966년 프로로 데뷔해 당시 골프 황제, 황금곰으로 불리는 잭 니클라스와 동시대를 누빈 리 트레비노는 1968년 US오픈에서 첫 메이저타이틀을 획득한 것을 비롯, 메이저대회 6회를 포함해 PGA투어와 시니어투어 통산 29승을 올렸다. 1972년 브리티시오픈을 우승했을 때는 니클로스의 4대 메이저 제패를 막았을 뿐 아니라 이어진 US오픈, 캐나다오픈 우승으로 20일간의 신들린 연승 행진하며 그의 커리어의 정점을 이루었다. 시즌 평균 최저타를 기록한 선수에게 수여하는 바든 트로피를 5차례나 받았다. 이는 빌리 캐스퍼와 함께 골프사상 최다 수상기록이다. 아놀드 파머가 4회, 톰 왓슨이 3회 수상했고 골프황제로 불리는 잭 니클러스는 한번도 받지 못했다.
필드의 파괴승
그에게 골프팬들의 사랑이 쏟아지는 것은 그는 그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기량을 발휘하면서도 끊임없는 재담으로 주위를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구도자처럼 골프에 집중하려는 다른 선수들의 긴장을 풀어주는 유머와 위트가 넘치기 때문이다. 그의 플레이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장돌뱅이 골퍼’다. 그는 누구와 라운드를 하든 격의 없는 친구가 된다. 위엄을 떨지도 않고 아첨하지도 않는다. 절정의 인기를 얻고 있는 스타든, 무명의 골퍼든 그에겐 골프를 함께 즐기는 파트너일 뿐이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그의 재담과 익살 넘치는 행동은 동반자는 물론 갤러리를 즐겁게 하고 대회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마치 도를 깨치고 하산해 중생들과 어울려 뒹굴며 자연스레 도를 전해주려는 파괴승이랄까. 그는 그런 도승의 풍모를 닮은 골퍼다.
당시 골프팬들에겐 리 트레비노가 출전하지 않는 골프대회란 맥주가 없는 파티나 마찬가지다. 정통적이지는 않지만 간명한 스윙, 어느 순간에도 웃음과 농담을 잃지 않는 태도, 철저하게 골프 그 자체를 즐기는 호방한 품성은 골프팬들에게 즐거움 그 자체였다. 요즘 골프팬들은 잭 니클러스, 아놀드 파머, 게리 플레이어 등 전설의 노장이나 타이거 우즈나 필 미켈슨, 어니 엘스 같은 스타쯤 되어야 골프의 달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트레비노는 그들과는 다른 차원의 골프 태도로 팬들을 즐겁게 하면서도 동시에 그들 못지 않게 화려하고도 요란한 전성기를 보냈던 골퍼 중 한 사람이다.
리 트레비노의 행로
이렇게 재치 넘치는 리 트레비노는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냈다. 1939년 12월 1일 텍사스 주 달라스에서 멕시코 이민자의 손자로 태어난 Lee Trevino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족을 떠나 탓에 홀어머니와 외조부모 품에서 자랐다. 그는 겨우 다섯 살 때 목화밭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가 8살이 되었을 때, 삼촌이 그에게 낡은 골프채와 공 몇 개를 선물하면서 그의 인생은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골프에 매료된 어린 트레비노는 근처 운동장에서 연습을 시작했고, 종종 해가 질 때까지 몇 시간 동안 공을 치며 골프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10대가 되었을 때 Trevino는 Glen Lakes 컨트리 클럽에서 캐디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지 부유한 선수들의 클럽을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술을 관찰하고 자신의 기술을 연마하며 나중에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로우 페이드 스윙을 독학적인 실험을 통해 탄생시켰다.
17세에 Trevino는 학교를 떠나 미국 해병대에 입대하여 4년 동안 복무했다. 복무하는 동안 그는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골프를 치거나 비공식 토너먼트에 참가하며 실력을 키웠다.
골프 허슬러에서 라이징 스타로 등장
군대를 떠난 후 Trevino는 골프 내기꾼이 되어 돈을 벌었다. 그의 독특한 스윙은 내기게임에 적합했다. 그의 독특한 스윙을 비웃는 모든 사람을 누르며 내기 돈을 챙겼다. 그는 내기 압박감 속에서도 긴장하지 않은 능력을 개발했으며, 어려운 상황에 적응하는 방법을 배우고 항상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허슬링 골프 게임은 위험하기는 했지만 그에게 골프 게임의 압박감을 이기는 능력과 방법을 일깨워주었고 결국 프로 골프에 입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1967년 프로로 전향한 그는 그해 루키로 U.S오픈에서 5위를 기록하며 놀라게 했다. 그의 두려움 없는 플레이 스타일, 정확성, 코스에 대한 자신감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며 본격적인 투어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 1968년 골프황제 잭 니클라스를 누르고 US OPEN 우승컵을 들며 그의 실력을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유머의 달인
1968년 US OPEN에서 우승컵을 차지하고 우승한 소감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내가 1967년에 농담을 한 번 했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이번에 오픈에서 우승하고 나서 똑같은 농담을 다시 하자 모두 웃었다”라고. 이 말을 듣고 다들 배꼽을 잡았다. 유명해지니 모두가 관심을 갖더라는 말을 이렇게 재치 있게 한 것이다. 그때부터 대중은 그의 범상치 않은 기질을 확인한 셈이다.
또한 리 트레비노는 경기 중 번개를 맞은 적도 있다. 지난 1975년 일이다. 갑자기 번개가 떨어져 리 트레비노와 주변에 있던 여러 사람이 쓰러졌다. 다행히 모두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트레비노는 허리에 심각한 상처를 남겼다.
인터뷰 때 그 일을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번개가 치면 1번 아이언을 들고 밖으로 나가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외칠 것이다. 神도 1번 아이언을 잘 치지 못한다” 라고. 요즘 유행하는 아재 개그보다 훨씬 현학적이다. 이 개그를 이해하려면 두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1번 아이언은 그 누구도 잘 치지 못한다는 것과 “친다” 라는 단어가 각각 다르게 쓰였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토크 쇼를 진행해도 될 수준이다.
또한 리 트레비노는 잭 니클라우스에게 고무 뱀을 던져서 화제가 된 적도 있다. 1971년 US오픈 연장전을 시작하기 직전에 그랬다. 연장전 상대는 잭 니클라우스였다. 리 트레비노가 뱀처럼 생긴 것을 백에서 꺼내 잭 니클라우스에게 던졌다. 갤러리는 깜짝 놀랐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잭 니클라우스만 깔깔대며 웃었다. 잭 니클라우스가 대범하다고 감탄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훗날 리 트레비노가 밝힌 전모는 이랬다. 리 트레비노의 아들이 아버지를 놀라게 하려고 고무 뱀을 가방에 넣어두었다. 그가 깜짝 놀랐다고 이야기하자 잭 니클라우스가 한 번 보여달라고 한 것이다.
엉청난 압박감이 밀려들만한 US OPEN 연장전마저 그에게는 한낱 즐거운 라운드의 하나일 뿐이다. 그는 그날 연장전에서 리 트레비노는 68타를 쳐 잭 니클라우스를 3타차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공자의 말씀을 실천했다.
그가 남긴 말을 돌아보면 그의 골프 행로가 보인다.
그는 최고의 압박을 받는 게임은, 주머니에 2달러밖에 없는데 홀당 5달러 내기를 할 때이다 라고 했고, 자신의 인생에 골프 코치를 둔 적은 없지만 나를 이긴 승자를 만나면 그에게서 무언가를 배웠다고 술회했다.
슬로우 플레이가 싫어서 기권한 사내
리 트레비노는 늘 플레이를 빨리 하는 편이었다. 아주 빠르다. 공이 있는 곳으로 가면 그냥 친다. 그는 자신만 빠른 것이 아니고 다른 이도 빠르기를 원했지만 될 리가 없다. 한번은 늑장 플레이에 질린 나머지 사하라 인비테이셔널에서는 기다리다 지쳐 중간에 기권을 했을 정도인데, 그로 인해 850달러의 벌금을 내야 했다. 그는 빨리 칠 뿐만 아니라 말을 하면서 치기도 한다. 지나친 집중이 주는 긴장을 막으려는 듯하다.
1972년 브리티시오픈에서 니클로스, 트레비노와 함께 많은 주목을 받았던 토니 재클린은 “그는 얘기를 하면서 샷을 할 때가 많다”며 “예를 들면 티박스에서 ‘여기서 버디를 하면 이길 수 있어’ 등의 말을 하면서 스윙하는 식이다.” 트레비노의 놀라운 플레이 속도가 가능한 것도 무의식의 능력이다. 볼 앞에 서서 지체 없이 샷을 하면 그 샷에 대해 지나친 생각을 할 수가 없다.
황금곰을 밀어내고 영국의 영웅을 은퇴시킨 세기의 대결, 1972년 뮤어필드 브리티시 오픈
1972년 브리티시 오픈은 아직도 골프 역사에 회자되는 세기의 대결이었다. 이날의 대결은 단연 트레미노가 주연이었고 황금곰 잭 니클라스와 영국의 영웅 재클린이 조연이었다. 재클린은 1969년에 브리티시 오픈에서 18년만에 우승한 영국 선수였고 1970년 US오픈에서도 우승하며 영국골프의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황금곰은 그해 이미 두개의 메이저 대회에 우승하고 한해 그랜드 슬럼을 위한 세번째 메이저 대회에 출사표를 던지며 우승을 예약한 상태였다.
뮤어필드에 열린 이 대회에서는 리 트레비노와 재클린이 선두권을 형성하며 3라운드까지 69-72-67타로 6언더파를 기록하고 있었다. 잭은 3라운드까지 70-72-71타로 트레비노(71-70-66)에게 6타나 뒤졌다. 트레비노는 선두와 1타 차이인 재클린에게 말했다. “우리 둘 중 누가 이기든 잭의 그랜드슬램을 막은 사람으로 비난을 받을 거예요.”
그의 말은 조금 성급했다. 갈색 바지와 연노랑 셔츠를 입은 니클로스는 5언더파 66타로 순항했다. 그랜드슬램에 대한 기대감이 되살아났다. 그는 스코어카드에 사인을 한 후 66타가 트레비노와 재클린을 넘어설 수 있는지 그들의 결과를 지켜봐야 했다. 재클린과 트레비노가 17번 홀 (파 5) 티그라운드에 섰을 때 그들은 잭보다 1타 앞서가고 있었다.
아마도 트레비노에게는 그날의 17번홀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홀이 될 듯하다. 페어웨이 오른쪽에 줄지어 선 관람객들은 재클린과 트레비노가 그랜드슬램의 희생양이 될지, 아니면 자신들만의 역사를 기록할지 지켜보고 있었다. 트래비노가 티샷을 하려는 순간 영국 카메라 기자가 갑자기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바람에 샷을 멈춰야 했다. 그리고 다시 자세를 잡는데 앞의 카메라 맨을 따라서 또 다른 사내가 들어오는 것을 봤다. 다시 샷을 멈추고 일그러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채 날린 샷은 심한 훅이 나면서 아주 작은 벙커에 들어갔다. 발을 디딜 여유도 없는 벙커에서 샷이 잘될 리 없다. 캐디는 선수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지만 트레비노는 울화가 치밀었고, 이어진 세 번의 샷이 전부 페어웨이와 그린을 빗나갔다.
재클린은 그때 “그가 나가는 문을 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스코어카드 제출 테이블 근처에 있었던 니클로스의 캐디 디킨슨이 그에게 소리를 쳤다. “트레비노의 타수가 부풀고 있어요!” 그는 네 번째 샷을 했는데 그린을 못 올랐다. 보기이거나 더 심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트레비노의 볼은 그린 뒤에 있었다.
동타인 상황에서 재클린은 5.4m 버디 퍼팅을 앞뒀고, 트레비노는 큰 숫자를 적게 될 전망이었다. 트레비노는 이제 다 끝났다는 식의 말을 중얼거렸다. 재클린에게 축하의 의미에서 악수를 권했다. 그러더니 9번 아이언을 꺼내들고 약 9m 거리에 있는 홀을 바라본 후 볼을 맞혔다.
OMG! 그가 무심히 홀을 보고 친 공은 그린에 떨어져 한참을 구르더니 홀안으로 사라진다. 와우! 5타로 파를 기록한 것이다. 이에 당황한 토니 재클린, 첫번째 공격적인 퍼팅이 빗나가고 이어진 짧은 퍼팅을 실수하며 보기를 기록한다. 승부추가 순식간에 바꿔버린 것이다. 이것으로 승부를 더 요동치지 않았다. 결국 리트레미노의 승리.
이 게임은 토니 재클린에서 치명적 상처를 남겼고 결국 그는 차후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나중에 “어느 사내가 아무렇지 않게 친 무심한 샷이 내 골프를 앗아갔다”고 술회했다.
댄 젠킨스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기사에 이렇게 썼다. “트레비노에 대해서 뭐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는 어떻게 우승할 수 있었던 걸까?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트레비노가 대회장에 늦게 도착한 반면, 니클로스는 일주일 넘게 뮤어필드에서 실력을 가다듬었다. 그는 농부 같은 모자를 쓰고 농담을 하며 단 이틀을 연습하는 데 그쳤다.” 이 게임으로 그는 잭 니클라스를 넘어선 골퍼가 되었다.
트레비노는 화려한 은퇴를 거부했다고 한다. 아무 이벤트가 없는 조용한 은퇴는 그의 인생을 압축한 것처럼 보인다. 2004년에는 아놀드 파머가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2005년에는 잭 니클러스가 세인트앤드루스에서 화려한 은퇴무대를 가진 것에 미뤄보면 트레비노도 이들 못지않은 은퇴무대가 기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화려한 은퇴식을 거절하고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길을 선택했다. “아놀드는 투어의 중심에 있었고 잭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였습니다. 화려한 은퇴식을 할 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나는 처음 시작했을 때도 별로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어요. 그러니 끝날 때도 그냥 조용히 가야지요.”
술은 늘 그와 함께 했다. 위스키에 만취한 상태로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고 대회에서도 자주 술 냄새를 풍기며 라운드를 하기도 했다. 결혼도 세 번이나 할 정도로 자유분방했다. 이런 생활은 1975년 시카고 근교에서 열린 웨스턴오픈에서 번개에 맞는 일을 계기로 달라졌다. 정말 번개를 맞은 트레비노가 데굴데굴 구르며 “나 번개 맞았어!”하고 소리치는 데도 갤러리들은 장난인 줄 알고 웃고만 있었다. 번개를 맞아 척추를 심하게 다치기도 했지만 심리적으로도 충격이 더 컸던지 그는 술과 결별하고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전 석양 속으로 사라져 갈 겁니다. 하와이 파인애플 힐에서 50센트짜리 음료를 14달러씩이나 내고 마시면서 옛 추억을 더듬으며 감상하는 바로 그 풍경처럼요. 전 화장될 거고 재는 골프코스에 뿌릴 겁니다. 어느 골프장이든 상관없어요. 마누라에게 꼭 재속을 더듬어 확인하라고 해 놨습니다. 강철롤러 두 개와 금속판 한 개가 안 나오면 그건 내 재가 아니라구요.” 세 번의 디스크 수술을 받은 트레비노는 화려한 은퇴식을 거부하는 대신 2001년 조용히 시니어투어인 챔피언투어에 다시 합류하여 투어 생활을 이어갔지만 건강문제로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은퇴했다. 지금은 강연 등의 활동으로 골프 멘토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한다.
리 트레비노는 우리에게 단순한 골프선수로 남지 않는다. 그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어. 수많은 어려움과 부상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간 끈기와 인내,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긍정적인 태도, 전통적인 스윙 스타일을 벗어나 자신만의 독창적 스윙으로도 세계를 제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리 트레비노의 생애와 메시지는 단순히 골프에 국한되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치와 태도를 전하며 많은 이에게 영감을 남길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