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코로나를 거치면서 한국에서는 MZ세대로 일컫는 젊은 친구들이 골프에 입문 러쉬를 이뤄골프계에 희망을 안겨준 일이 있었지요. 그런데 고작 2년여가 지나자 이제는 그 많은 MZ세대들이 골프를 그만두거나 거리를 두며 골프계에 들어간 바람을 빼 버립니다. 김이 빠졌지요. 잘하면 골프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 골프업계가 활성화를 이룰 수 있다는 기대가 사그라진 것입니다.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들이 남긴 흔적은 무엇일까요?
먼저 MZ세대는 골프라는 운동의 특징을 간과한 점이 있습니다. 흔히들 얘기하듯이 골프를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유로운 시간과 경제적 여유로움이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젊은 나이에 이미 경제적인 여유를 장만하고 시간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MZ세대들도 있겠지만, 그들조차 실제로 골프를 즐기기에는 만만치 않은 현실을 마주합니다.
여기서 골프의 또 다른 조건이 등장합니다.
골프는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닙니다. 골프 룰에서도 혼자 하는 플레이어는 필드에서 팀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다른 팀의 플레이에 방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홀인원을 해도 클럽에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골프는 반드시 팀을 이루어야 하는데, 바로 그 점이 MZ세대와 같은 젊은이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나이든 골퍼들의 모임에 가끔 함께 하는 유독 젊은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우리 늙은이 팀이 끼어서 평균 연령을 낮춰주고 우리에게 젊은 기운을 전파하니 좋기는 한데, 자네 또래들과 함께 하는 것이 더 즐겁지 않은가? 하고 물었더니 그 친구 답이 바로 그것입니다. 함께 시간을 맞춰 라운드를 할 골프 친구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골프를 하는 친구도 많지 않지만, 설사 몇몇이 마음을 맞춰 일주일 전쯤 약속을 해도 그 사이 이런 저런 일이 자꾸 생겨나서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 결국 친구들과 필드에 나오는 것이 힘들다고 토로합니다.
여기서 MZ세대가 남기고 간 흔적 중에 하나가 보입니다. 바로 골프 약속의 무게를 가볍게 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골프 약속이란 본인 장례가 아니면 반드시 지켜야 할 최 우선 약속이라는 엄격한 관행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그 약속의 무게가 형편없이 가벼워졌습니다. 젊은 나이에 골프보다 중요한 일이 많기 때문에 쉽게 약속이 깨지는 일이 자주 일어나며 골프약속이 별거인가 하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처음 골프를 배울 때 선배에게 물었습니다. 왜 골프 약속은 그렇게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것인가? “세상을 살면서 약속이 이루어졌다면 반드시 지키는 게 당연하지만 특히 골프약속은 혼자만의 약속이 아니라, 다자간의 약속이기에 더욱 무게가 나간다는 것”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1인에게만이 아니라 다수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일이니 그 무게가 다른 약속에 비해 무거울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어쩌면 골프약속은 적어도 골퍼에게는 모든 약속의 최후의 보루입니다. 골프약속도 안 지키는 사람이 다른 약속을 제대로 지킬 리가 없다는 양보할 수 없는 방어선입니다. 예전에는 골프 약속을 쉽게 어기는 양반과는 사업이나 중요한 일을 함께 도모해서는 안된다는 사회적 묵계가 있었습니다.
골프 약속은 다자간의 약속이라는 면에서 가벼운 일이 아니기도 하지만 또한 그 약속을 수행하기 위한 다수의 부수적인 약속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도 안됩니다.
여기서 한 번의 골프 약속에 얼마나 많은 약속이 포함되는지 골프 라운드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살펴볼까요?
그대가 이번 주말 라운드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적어도 3-4일이나 일주일 전부터 준비에 착수해야 합니다. 먼저 그날 함께 필드를 나갈 의향이 있는 사람을 구해야지요. 그것도 자신 외에 최소 2-3명을 구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 복수의 친구가 하루를 함께 보낼 만큼 친분이 있어야 하고, 또 정해진 날에 별 다른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각각의 생활이 다른 성인 3-4명이 한 날 한 곳에 모여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생각처럼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인생에서 제일 바쁜 시기인 젊은 시절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아무튼 수차례 타진을 한 결과로 다수의 인원과 라운드에 대한 기본적인 약속을 정하며 어렵사리 팀을 이루었으면 부킹을 해야 합니다. 누군가 팀을 대신해서 노력 봉사를 하며 골프장과의 티오프 타임 약속을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일 날 의복과 신발, 각종 골프 용품 등을 면밀하게 챙기고 시원한 음료를 담은 물통도 준비하고 차를 타고는 차편이 원활하지 않은 동반자를 픽업하러 그와 정한 약속 장소를 들립니다. 그리고 라운드 전에 식사를 클럽 근처 식당에서 하기로 했으니 그 시간에 맞춰 식당에 들려서 식사를 하고, 클럽에 도착하여 옷을 갈아입고 티 오프 시작 20분 전쯤 스타트 포인트에 나가서 동반자 모두 약속대로 나와서 준비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정해진 시간에 대망의 플레이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늘 인생만큼이나 꼬이고 꼬이는 라운드에 아쉬움을 삼키고 18홀을 마칩니다. 라운드 후 몸을 씻고 미리 약속한 식당으로 옮겨 동료들과 무용담을 나누며 뒷풀이를 한 후 어둑한 저녁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다음 라운드에 대한 약속을 위해 또 전화통을 잡아봅니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약속이 골프 라운드를 위해 이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골프라운드는 약속으로 시작하여 약속으로 끝나는 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골프약속 수행에서 중요한 것은 복수의 인원이 함께 움직이는 일이니 자신으로 인해 다른 동반자에게 불편을 주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해도 다른 동반자가 모두 자신을 기다렸다면 약속은 간신히 지켰지만 예의 있는 약속을 수행한 것은 못됩니다. 타인의 입장을 존중하는 마음이 예의입니다. 그런 예의를 제대로 지킬 입장이 아니라면 골프 약속을 맺기 전에 충분한 숙고해야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도 약속을 어기면 한 사람은 잊을 수 있지만 모두 다 잊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살아보면 압니다. 골프 약속을 지키지 못할만한 어쩔 수 없는 일이 하필이면 매번 같은 사람에게만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골퍼의 자격은 참으로 까다롭습니다. 그래도 한가지, 골프 약속을 하면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항상 제 시간에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면, 골프의 실력과 관계없이 일단 골퍼로서 기본자세는 갖추고 있는 괜찮은 인성의 골퍼라는 것을 입증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