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September 8,Sunday

프로 골프의 아버지, 월터 하겐 경

골프 역사상 최고의 단두대 매치 플레이로 불리며, 영화 화 된 “베가번스의 전설” 속 골퍼 중 한 명, 월터 하겐. 그는 스포츠로 돈을 버는 것을 경시하는 분위기로 아마추어보다 낮은 위치에 냉대받던 골프 프로의 역학을 바꾸는 데 일조한 풍운아이다.
커리어 동안 총 11번의 메이저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으며 백만 달러를 벌어들인 최초의 골퍼이자, 동료 프로들을 규합해 미국프로골퍼협회(PGA)를 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로 골프의 아버지’로 그 어떤 골퍼보다 자신의 직업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데 많은 공헌을 한, 대담한 성격과 쇼맨십으로 당대 가장 화려했던 스포츠인 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월터 하겐 경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월터 하겐 유년시절

월터 하겐은 1892년 12월 21일 미국 뉴욕 주 브라이튼에서 할아버지 대에 독일에서 이민 온 대장장이 윌리엄 하겐의 1남 4녀 중 둘째이자 외아들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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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 때 가까운 골프 클럽(로체스터 컨트리 클럽)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장난감용으로 짧게 만든 골프채를 선물 받으며 골프를 접했으며 10대 초반에 로체스터 컨트리 클럽에서 캐디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며 골프 실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타고난 운동선수였던 그는 어빙 로브슨, 월터 파워스, 거니 T. 커티스, J.C. 본브라이트와 같은 클럽 프로 선수들과 알 리케츠, 앤디 크리스티와 같은 전문가들을 보며 골프를 배웠다. 윌리엄 하겐은 그들의 매너와 말투, 태도를 공부하며 골프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몇 년 후 하겐은 “내가 수년 동안 터득한 온갖 스포츠맨십은 분명 이 위대했던 분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클럽의 수석 프로인 알프레드 리케츠의 도움을 받아 연습하며 점차 골프 실력을 향상시켜 10대 중반에는 프로선수 수준으로 올라섰고, 곧이어 클럽 회원들에게 레슨을 하는 프로샵에서 일하게 되었다.

월터 하겐의 스포츠 재능은 골프에만 국한되지 않아, 15살 때부터 로체스터 램블러스라는 야구팀의 선수로 활약하며 팀을 3회 연속 로체스터시의 챔피언으로 만든 재능이 있는 야구 선수이기도 했다.

그는 필라델피아 필리스 야구팀에 스카우트되기도 했으나 아들이 안정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직업을 갖길 바라는 부모의 반대로 자동차 수리, 피아노

생산 회사 등에서 견습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월터 하겐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고 팀 동료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는 골프의 길을 선택했고 또 월터 하겐과 동갑인 골퍼 존 맥더모트의

1911년 US 오픈 우승 스토리가 월터를 자극했다.

US 오픈 출전

그는 프로의 보조로 일하며 골프채를 만들거나 수리하는 기술을 배웠고, 자기가 직접 사용할 클럽 세트를 정성껏 만들어 ‘스트레인지 웨폰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클럽 세트는 US 오픈을 2번이나 차지하게 해줬고, 훗날 이 세트는 골프 명예의 전당에 기증됐다.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하겐은 다른 직장으로 옮긴 크리스티의 뒤를 이어

연봉 1,200달러와 시간당 레슨비 2달러의 클럽의 헤드 프로가 되었다.

변변한 아마추어 시합 경험도 없던 월터 하겐은 그를 보조로 채용해준 수석 프로 알프레드 리케츠의 도움으로 19세의 때인 1912년 캐나다 오픈에 출전하여 11위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두지만 그는 크게 실망했다.

월터 하겐은 그 이듬해 1913년 US 오픈에 “미국이 영국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러 왔습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출전했으나 4위로 경기를 마쳤다.

신들린 퍼트로 이끈 US OPEN 우승

1914년 스물 한 살이 된 하겐은 US오픈에 다시 출전해, 샷은 좋지 않았지만 고비마다 쇼트게임과 퍼팅으로 파를 세이브했다.

거의 모든 홀을 원 퍼트로 마무리하며 1라운드 68타의 코스 레코드로 첫 메이저

대회 우승을 차지한후 그는 그의 퍼팅 비법을 공개했다.

“내 퍼팅의 비법은 왼손의 마지막 두 손가락을 단단히 잡는 것이다.”

1918년 디트로이트의 오크랜드 힐스 컨트리 클럽으로 자리를 옮긴 하겐은 1919년 US오픈에서 우승한 후, 골프클럽의 헤드프로 자리를 사직하고, 클럽에 소속되지 않은 최초의 투어 프로 골퍼가 됐다.

1920년대 세운 눈부신 업적, 9번의메이저 우승, 34경기 중 32번 우승

그 후 1920년대에는 9개의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다. 오픈 챔피언십에서 네 번, PGA 챔피언십에서 다섯 번 우승했는데, 그 중 네 번은 연속 우승이었다. 하겐의 커리어가 미국 무대에서 재능 있는 골퍼들이 대거 등장하던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단한 업적이었다.

1916년부터 1928년까지 그는 PGA에서 22연승을 포함해 34경기 중 32경기에서 우승했고 1912년 프로 경력을 시작한 이래 1939년 은퇴할 때까지 총 75개 대회에서 우승하고 3,000회 이상 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00만 달러의 상금을 받은 최초의 골퍼이자 200만 달러의 상금을 받은 최초의 골퍼이기도 하다.

바비 존스와의 세기의 대결

그러나 그는 존스가 출전한 브리티시 오픈이나 US 오픈에서 우승한 적이 없었고

1926년 초, 당시 33세였던 하겐과 23세였던 존스의 프로와 아마추어의 맞짱 승부인 골프 역사상 최고의 단두대 매치 플레이로 불리는 맞대결이 펼쳐진다.

수많은 갤러리들이 모인 가운데 시작된 경기에서 첫 홀부터 하겐의 드라이브가 흔들리면서 볼은 왼쪽 숲으로 날랐다. 반면 존스의 볼은 페어웨이에 사뿐하게 안착됐지만 버디 욕심이 났던 존스의 세컨샷이 너무 길어 그린 뒤로 넘어가 결국 보기를 범했다. 그에 반해 하겐은 침착하게 3온 1퍼트로 파를 세이브한다. 기회의 첫 홀을 어이없이 헌납한 존스는 흔들렸고 노련한 프로 하겐의 플레이에 끌려다니다 패하고 만다.

일주일 뒤 열린 2번째 대결 또한 패하며 골프의 구성이라 불리던 바비존스가 아마추어의 한계를 드러내며 프로의 쓴맛을 제대로 경험하게 된다.

1922, 1924, 1928, 1929년 디 오픈 우승

월터 하겐은 미국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디 오픈 챔피언십에서 우승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었다.

1920년 디 오픈에 첫 출전을 하게 된 하겐에게 영국 선수들이 바닷바람과 항아리 벙커를 조심하라고 충고해 주지만 하겐은 “바람이 아무리 강해도 나의 샷은 바람을 뚫고 나갈 것이다. 항아리 벙커도 넘기면 되니까 문제없다. 하늘에는 벙커가 없다.” 며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러나 첫 출전 성적은 예선 통과자 54명 중 53등으로 치욕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하겐은 “다시 돌아오겠다”며 자신감만은 잃지 않았다.

바람을 피하는 낮은 샷들을 준비해 간 1922년 디 오픈에서 하겐은 세 번째 출전 만에 첫 우승을 한다. 미국 태생 골퍼로서는 처음이었고 외국인으로서는 두 번째 디 오픈 우승자였다. 우승상금으로 받은 수표를 캐디에게 주는 통 큰 아량을 베푼 하겐의 모습은 미국 골프의 풍운아였다.

하겐의 디 오픈 우승으로 미국 골프가 영국에 역전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고, 그 이후 영국은 다시는 골프 최강국의 위치로 돌아오지 못했다.

1924년 하겐이 두 번째 우승을 한 후 1933년까지 10년 연속 미국 선수들이 우승을 휩쓸며 영국의 자존심을 상처받게 했고, US오픈 초창기에 영국으로부터 받았던 수모를 깨끗이 갚아주었다.

하겐은 디 오픈에서 4회 우승을 달성했다. 영국에 가려면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야 했고, 편도 항해만도 일주일이 걸렸던 당시의 여행 환경을 감안하면 그의 4승은 오늘날의 4승보다 훨씬 큰 업적이었다.

PGA 챔피언십 5회 우승, 최강의 매치플레이어

대회 초기에 매치플레이 방식으로 치러지는 PGA 챔피언십에서 하겐은 심리학을 골프에 적용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자신의 이점을 십분 활용하며 매치플레이에 유독 강했다.

하겐은 경기에서 실제로는 숏 아이언 샷인데 4번 우드를 사용해 상대방이 하겐을 따라 우드를 사용하게 해 그린을 오버하게 하는 등 상대와의 심리전을 잘 이용했고, 관중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전략에 능했다.

보비 존스와 맞붙었던 두 번에 걸친 72홀 매치 플레이에서 승리를 거둔 것도 그가 얼마나 강한 매치플레이어인지를 증명한다.

하겐은 티박스에서 정밀한 골퍼는 아니었으나 자신의 문제를 고치려고 하지 않았고,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음 샷이나 라운드에 집중했다. 하겐을 차별화시킨 것은 뛰어난 회복 능력과 뛰어난 퍼팅 실력이었다.

그의 쇼트 게임은 종종 감각적인 샷을 만들어낼 만큼 훌륭했다. 그는 탁월한 퍼팅 실력으로 30년 가까운 프로골퍼 경력 동안 마지막 홀에서 쓰리 퍼트를 한 적이 없었다. 하겐은 1924년부터 1927년까지 4년 연속 PGA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20세기 이후 메이저 대회 4회 연속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긴다.

풍운아의 생활방식

하겐은 프로 골퍼의 위상을 높이고 수입도 늘려준 당차고 독단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선수 생활 내내 미국과 전 세계에서 수백 차례의 시범 경기를 치렀으며, 이러한 투어를 통해 골프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하겐은 선수 시절 화려한 옷차림으로도 널리 알려졌는데, 밝은 색상과 고급스러운 천으로 만든 값비싼 맞춤 양복이 특징이었다.

하겐은 또한 골프 장비를 홍보하며 상당한 돈을 벌었고, 자신의 이름을 딴 윌슨 스포츠의 클럽(‘월터 하겐’ 또는 ‘하이그 울트라’)을 디자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비 개선은 골프의 매력을 확대하고 더 많은 플레이어가 고품질의 클럽을 합리적인 가격대에 구입할 수 있게 했으며, 플레이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이런 화려한 의상으로 ‘베스트 드레싱 아메리칸’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최초의 선수이기도 하다. 그는 종종 리무진을 타고 토너먼트에 나타나기도 했고, 때로는 첫 번째 티에 바로 차를 세우기도 했다. 하겐은 때때로 디너 코트나 턱시도를 입고 티박스에 도착해 마치 밤새 파티를 즐긴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의 화려한 스타일과 개성으로 인해 그는 최고의 슈퍼스타 중 한 명 이자 골프의 홍보대사가 되었다. 그의 사진들을 살펴보면 얼마나 멋쟁이였는지 실감할 수 있다.

하겐은 미국 골프계를 완전히 장악한 킹이었다. 1914년 US오픈의 우승 상금은 300달러에 불과했지만 시범 경기와 광고 수입으로 벌어들이는 금액은 해가 갈수록 커졌다. 그 많은 수입을 아끼지 않고 마음껏 쓰면서 평생을 풍족하게 살았던 하겐이 남긴 말에서 그의 인생관을 알 수 있다.

“나는 백만장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백만장자처럼 살고 싶었을 뿐이다.”

하겐의 수입은 당시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던 야구의 베이브 루스나 복싱의 헤비급 챔피언인 잭 뎀퍼시를 능가했다. 프로 스포츠 최초로 총 수입 100만 달러를 넘긴 선수가 야구나 복싱이 아닌 골프에서 나왔으니 하겐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하겐은 라이더컵 초창기에 미국 대표팀의 주장을 맡아 첫 6번의 라이더컵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6년 인버네스 인비테이셔널 포볼에서 PGA 투어 마지막 우승을 차지한 하겐의 화려한 경력은 193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막을 내리기 시작했고 1942년 PGA 챔피언십이 그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에 출전이었다.

하겐은 1969년 미시간주 트래버스 시티에서 인후암으로 투병하다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그의 유산과 골프계에 미친 영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후배 진 사라센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모든 프로골퍼들은 상금을 받으며 하겐에게 감사해야 한다. 하겐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프로골퍼도 없었다.”

“월터 경(Sir Walter)”으로 불린 이유

Hagen은 골프 게임에 대한 뛰어난 공헌과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으로 인해 “Sir Walter”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화려한 스타일은 스포츠에서의 중요한 성취와 결합되어 그를 미국과 국제적으로 사랑받는 인물로 만들었다.

총 11번의 메이저 챔피언십 우승, 미국인 최초의 The Open Championship 우승 등 Hagen은 골프 전설로서 위상을 확고히 한 인물로 각인되며 “월터 경(Sir Walter)” 으로 종종 불렸다.

하지만 이 칭호는 영국 왕실이 수여하는 공식 기사 작위가 아니고 일반 대중에 정한 더욱 명예롭고 애정 어린 존경이 담긴 작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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