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September 8,Sunday

골프의 진정한 통달인 샘스니드

샘 스니드는 밀집 모자(straw hat)가 트레이드 마크다. 1930~1940년대 벤 호건(Ben Hogan), 바이런 넬슨(Byron Nelson)과 함께 미국의 3두마차(triumvirate)로 명성을 날렸다.
미국프로골프(PGA)투어 통산 82승 고지를 점령했고, 아직까지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이상 미국)와 함께 최다승 골퍼다. 메이저는 마스터스와 PGA챔피언십 3승씩, 디오픈에서 1승을 올렸다.

위대한 선수의 탄생
스니드 가족들은 조상 때부터 타고난 거인들이었으며 힘이 장사였다. 샘은 가족에 비해 큰 체격은 아니었지만, 180cm에 85kg을 건강하게 유지했다. 키에 비해 긴 팔은 골프 스윙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보다 척추뼈가 한 개 더 많았다. X-ray로 촬영한 사진을 본 의사는 샘이 골프 스윙을 하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중요한 대회 도중 갑자기 찾아온 허리 통증으로 플레이를 중단하기도 했다. 골프에 대한 샘의 첫 기억은 7~8세 때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샘은 자동차 안테나 같은 막대에 주워 온 헤드를 달아서 공이든 돌멩이든 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스윙으로 쳤다. 골프 스윙에서 힘보다 리듬과 타이밍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의 느낌은 그가 평생 지켜온 부드러운 스윙의 기초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홈스테드 호텔 골프장의 프로 샵에 취직했다. 프로 골퍼의 인생을 시작했다.

날개를 단 호랑이
1935년 캐스케이드 호텔은 프로골프 대회를 준비한다. 당시에는 어떤 관중도 샘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첫 라운드에서 63타를 친 샘은 3라운드가 끝났을 때 3타 차 깜짝 선두에 나섰다. 호텔의 경영진과 헤드 프로는 무명 선수인 샘의 우승을 원치 않았다. 호텔을 홍보하기 위한 대회이므로 유명한 프로가 우승하여 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를 바랐다. 호텔의 바람대로 2번 홀에서 8타를 친 샘은 80타로 라운드를 마쳐 3위로 밀려났다. 우승은 못 했지만 3등 상금으로 거금을 챙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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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nBrier 골프 리조트의 프로
샘은 아침 일찍 연습 라운드를 나갔다가 335야드 파 4홀에서 티 샷을 했는데 약간의 역풍을 탄 공이 그린까지 굴러갔다. 공교롭게도 호텔 사장 브래들리가 퍼팅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깜짝 놀란 브래들리는 불같이 화냈고, 샘을 즉시 해고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다행히도 옆에 있던 샘의 캐디가 그 샷을 샘의 티 샷이었다고 말했다. 브래들리는 그것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며 믿지 않았다. 샘은 다시 한번 티 샷이 그린을 때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완벽한 티 샷으로 그린을 때렸다. 이후 샘은 브래들리의 개인 코치가 되었고, 든든한 후원자도 얻었다.

신데렐라가 된 루키
샘은 1937년 PGA 투어에 루키로 출전하여 자기의 첫 시합인 LA오픈에서 600달러의 상금을 벌었다. 다음 시합을 캘리포니아의 오클랜드 오픈이었다. 비바람 속에서 시작된 시합이었지만 샘은 2라운드에서 65타를 치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샘은 270타로 우승하고, 1,200달러의 상금을 받았다. PGA 투어 첫 번째 우승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이루어졌다. 신문에서는 무명 촌뜨기의 깜짝 우승이라고 보도했다. 샘의 루키 시즌은 신데렐라의 성공신화와 같았다. PGA 5승을 챙겼고, 2위 세 번, 3위 다섯 번을 달성했다. 상금 랭킹 2위를 차지했고 라이더 컵 팀의 미국 대표로 선발되어 영국까지 갈 수 있었다.

천국과 지옥의 1938년
1938년 두 번째 시즌에서 샘은 PGA 8승, 2위 여섯 번, 3위 세 번을 차지했다. 상금 19,000달러를 벌어들이고 상금 랭킹 1위에 올랐다. PGA 최저 평균 타수 상인 바든 트로피까지 받았다. 샘은 1938년 펜실베이니아주의 쇼니 컨트리 클럽에서 열린 PGA 챔피언십 대회에서 결승에 올랐다. 36홀 패치 플레이 결승의 상대는 숏게임의 달인 폴 런얀이었고, 미디어와 팬들은 10대 1의 확률로 샘의 낙승을 예상했다. 런얀은 170cm에 59kg의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1934년 상금왕을 차지했고, PGA 챔피언십을 우승한 강자였다. 시합이 시작되자 샘의 드라이버 샷은 런얀보다 거의 100야드씩이나 멀리 나갔다. 그러나 런얀은 정확한 아이언 샷과 쇼트게임으로 샘의 공격을 철통같이 막아냈다. 결과는 샘이 8대 7로( 7홀을 남기고 8홀을 이겨서 승부가 난 게임) 대패하고 말았다. 런얀의 두 번째 메이저 우승이었다. 샘은 언제나 최고의 웨지 플레이어로 인정받았지만 런얀의 쇼트게임 실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첫 번째 메이저 우승 기회를 놓친 샘은 쇼트게임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배웠다.

1942년 PGA 우승
1942년 PGA 챔피언십은 뉴저지의 시뷰 컨트리 클럽에서 열렸다. 샘이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는 짐 터네사였다. 그는 8강전에서 벤 호건을 이기고, 4강전에서는 바이런 넬슨을 격파한 파란을 일으킨 주인공이었다. 터네사와의 승부는 17번 홀에서 끝났다. 1홀을 앞서고 있던 샘이 20미터짜리 칩 샷을 그대로 성공시키면서 2대 1로 이겼다. 생에 첫 번째 메이저 우승이었다. 이 우승으로 메이저 대회 준우승의 징크스에서 해방됐다. 샘이 이룩한 메이저 7승의 기초라고도 볼 수 있다. 1949년 PGA에서는 전년도 챔피언 벤 호건이 자동차 사고로 불참하게 됐다. 샘은 비교적 쉽게 두 번째 우승컵을 안았다. 1951년에는 세 번째 PGA 챔피언십 우승을 달성했다.

1946년 브리티시 오픈 챔피언
1942년부터 1944년까지 해군에서 근무한 샘은 조종사들에게 골프를 가르쳤다. 덕분에 기량이 녹슬지 않은 상태로 전역했다. 제대 후 1945년에 참가한 첫 6개 대회에서 5번 우승을 했을 정도로 최고의 기량을 보였다. 1946년 디 오픈 게임을 위해 세이트 앤드루스에 도착한 샘은 폐허가 된 골프장처럼 보이는 올드 코스를 보며 실망했다. 예선을 가볍게 통과한 후 첫 라운드를 71타로 무난하게 출발했다. 두 번째 라운드에서 70타로 선두를 1타 차이로 추격했다. 세 번째 라운드에서 74타를 쳐 공동 선두가 되었다. 마지막 라운드 때에는 비바람이 강하게 몰아치면서 언더 파의 스코어를 내기가 어려웠다. 전반 9홀을 40타로 끝낸 샘은 나쁜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실망하지 않았다. 인내 끝에 도달한 10번, 12번, 14번 홀에서 버디를 잡은 샘은 선두가 되었다. 대회에서 가장 중요한 올드 코스의 악명높은 17번 로드 홀을 마주했다. 장타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 샘은 OB 지역을 넘기는 티 샷을 성공시킨 후 기적적인 버디를 잡으며 우승을 확정 지었다. 71-70-74-75 총 290타로 함께 원정간 샘의 절친한 친구 조니 불라를 4타 차이로 누르는 여유 있는 우승이었다. 이것은 샘의 두 번째 메이저 우승이었다.

마스터스 챔피언
1949년 마스터스 대회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벤 호건이 자동차 사고로 불참했다. 그것이 샘의 우승 가능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73-75 타로 부진한 출발을 한 샘은 선두 맹그럼에게 5타를 뒤지고 있었지만, 3라운드에서 67타를 쳐 공동 선두가 된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다시 57타의 맹타를 이어갔다. 2위와는 3타 차이가 나는 마스터스 대회 첫 우승을 차지한다. 1952년 마스터스는 3, 4라운드 때 기온이 떨어지고 바람이 세게 불면서 플레이가 어려워졌다. 첫 두 라운드를 70-67 타로 출발한 샘은 벤 호건을 3타 차로 앞서는 선두를 잡았다. 3라운드에서는 77타로 부진해 호건에게 공동 선두를 허용했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79타를 친 호건은 우승 경쟁에서 멀어진다. 72타를 친 샘이 2위와 4타 차 우승을 하며 두 번째 마스터스 우승을 신고한다.

1945년 마스터스 우승은 샘이 1942년 PGA 우승 다음으로 감격했던 순간이었다. 1953년에만 마스터스를 포함하여 메이저 3승을 올렸던 벤 호건을 연장전에서 누르고 차지한 우승이었기 때문이다. 전반 8홀이 끝났을 때 두 선수 모두 1언더 파로 팽팽했다. 벤 호건은 16번 홀에서 보기를 범한다. 선두를 유지한 샘은 결국 70-71 1타 차이로 세 번째 마스터스 우승을 챙기게 된다. 이 우승은 샘의 7번째 메이저이자 마지막 메이저 우승이었다.

US Open의 불운
샘은 메이저 대회 7승을 올리면서도 US Open에서는 번번이 우승을 놓쳤다. 커리어 그랜드 슬램의 달성도 불발로 끝난다. 미디어에서는 그의 불운을 ‘스니드 징크스’라고 불렀다. 샘은 마스터스에서 10번 이상의 우승 기회를 놓친 후 6년 동안 3번의 우승을 했다. 그러나 US Open의 우승컵은 끝내 그를 외면했다. 샘은 US Open을 우승하지 못한 가장 위대한 선수다.

샘 스니드의 스윙

샘은 골프 스윙의 가장 중요한 기본이 그립에 있다고 강조했다. 손에 의해서 클럽 페이스가 닫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립을 잡는 손의 압력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손안에 있는 비둘기가 죽지 않게 그러나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립을 잡으라고 했다.
스윙의 시작부터 끝까지 동일한 그립의 압력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두 손의 V 모양이 오른쪽 어깨를 가르치는 뉴트럴 그립을 사용해야 임팩트 순간에 클럽 헤드가 쉽고 자유롭게 공을 때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샘은 골프 스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리듬과 타이밍이며 그것이 힘보다 중요하다고 믿었다. 스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는 리듬, 템포, 타이밍이고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밸런스라고 강조했다. 샘은 밸런스를 연습하기 위해 가끔 맨발로 연습 라운드를 했다. 스윙 때 엄지발가락을 땅에 박는 느낌으로 누르며 밸런스를 잡기도 했다. 스니드가 타고난 리듬과 완벽한 타이밍으로 무려 270m를 날렸다는 게 흥미롭다. 당시에는 200m만 쳐도 장타자로 분류됐다. ‘스니드 스쿼트(Snead Squat)’라는 독특한 동작이 화제가 됐다. 다운 스윙을 시작할 때 왼쪽 다리는 타깃 방향, 오른쪽 다리는 그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자세다. 아름다운 스윙으로 장타를 쳤지만 퍼팅은 약했다(great swing, poor putt). 어깨와 팔로 스트로크 해야 하는데 손목을 많이 사용해 짧은 거리를 자주 놓쳤다. 아마도 그가 퍼트마저 잘 했다면 불세출의 골프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역시 인간은 완벽할 수 없는 모양이다.

스니드가 이용한 파워의 핵심 비밀

사람들은 샘 스니드를 ‘장타자 새미’라고 불렀다. 그가 드라이버샷을 놀랄 정도로 멀리 때려냈기 때문이다. 그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매끄럽고 자연스런 방향 전환이다. 스니드는 톱 단계에서 헤드를 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다운스윙을 천천히 시작했으며 점진적으로 가속해 임팩트 때 최고 스피드에 이르렀다. 이렇게 파워의 폭발을 ‘지연시키는’ 동작을 익히기 위해 샤프트의 가운데 사과가 꿰어져 있다고 상상하도록 한다. 이제 목표는 사과를 볼의 바로 앞쪽 지면으로 내던지는 것이다. 톱 단계에서 다운스윙을 시작할 때 사과가 천천히 샤프트의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헤드 방향으로 움직이다가 임팩트 직후 샤프트 끝을 빠져나가는 장면을 상상하도록 한다. 이러한 기술은 다운스윙의 시작 단계를 충분히 길게 지연시켜 헤드가 양손 뒤쪽으로 쳐지게 해주며, 그 결과 타격 구간을 통과할 때 풀어놓을 수 있는 채찍의 움직임과 같은 빠른 스피드가 구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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