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어둡고 낮이 밝은 것은 본시 그러함이다. 자식이 아비를 정성으로 섬겨야 하고 백성이 임금을 충으로 섬겨야 함도 본래 그러함이다. 조선의 땅과 하늘의 주인이 하나인 것도 본래 그러함인데 어찌하여 사학을 섬기고 그를 아버지라 하는가.. 내가 명하고 또 명하여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죽기를 청하는 사학의 종자는 박멸하여 씨를 말려야 할 것이며 이의 수괴를 잡아 찌끄러기가 남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급박하고 앙칼진 대비의 교지를 싣고 가는 말의 목에는 방울이 세 개씩이나 달려 있었고 방울이 세 개가 달린 말 위에 타고 가는 마부는 그의 말에서 나는 ‘딸랑 딸랑’ 소리 때문에 더욱 바빴다. 대비의 교지는 사방으로 출발하였고 밤을 새워 달린 말들은 다음날 관청에 닿았으며 관청의 말들은 다시 방울 세 개를 달고 밤을 새워 ‘딸랑 딸랑’ 거리며 더욱 깊은 산골까지 대비의 교지를 전했다.
대비는 어린 왕 순조와는 피 한방울 티기지 않았고, 산모의 고통 또한 한번도 느껴 보지 못했지만 대비가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어린 왕의 할마마마였기에 왕의 권력을 대신 가질 수 있었다. 대비는 가진 권력을 더욱 오랫동안 혼자만 가지고 싶었기에 다섯 가구를 한 가구로 묶어 신자들을 색출하는 ‘오가작통법’을 명하였으며, 백성들은 오가작통법이란 올가미에서 살아 남기 위해 이웃을 먼저 밀고 하였고, 관아의 명을 받은 젖 장수는 이 동네, 저 동네를 염탐하며 밀고 하였다. 밀고 당한 이웃은 신자임을 포기하지 않아 순교하였지만, 순교한 자의 이웃은 오가작통법 때문에 순교자의 옆집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곤장에 살이 찧여 죽어 나갔다.
‘황사영’은 토굴 속에서 황사경이란 자가 황사영과 이름이 비슷하여 곤장을 맞아 몸뚱아리가 흩어져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고 황사경을 황사영으로 잘못 알고 잡아죽인 함경도 장진의 사또는 대비를 농락한 죄로 사약을 받아 죽었다는 소식도 토굴에 숨어서 인편으로 들었다.
대비는 사학의 수괴로 지목된 황사영의 목을 갈망했다. 대비는 그를 찾아 찧어 죽이지 않으면 사학의 찌끄러기가 영원히 조선땅에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사학의 찌끄러기가 있는 한 절대적 권력이 불가능하리라 믿었다. 황사영은 누가 자기를 사학의 우두머리로 지목했는지 정확하게 몰랐다.
다만 둘째 처삼촌인 정약종이 천주의 자식으로 남아 서대문에서 참수를 당할 때 또 다른 처삼촌인 ‘정약용’은 고문 한번 당하지 않고 귀향만 갔다고 했고, 둘째 삼촌인 정약전은 참수되지 않고 흑산도로 귀향만 갔다고도 했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의 사위가 되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였기에 16세에 소년장원급제를 하였고, 임금이 잡아준 그의 손을 비단으로 감싸고 처가에 인사를 가서 그의 처삼촌들을 만났다. 처삼촌들은 그에게 천주의 사학을 설파하였고, 그가 천주의 논리에 깊이 녹아내렸기에 정약용이 실토하였던, 정약전이 실토하였던, 천주가 실토자를 벌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다만 천주의 형제들을 살리고 싶었고, 이런 살육을 천주의 힘으로 마무리하고 싶었기에 비단에 적은 밀서를 북경까지 전해줄 마부 요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부 요한은 사행을 따라 철마다 북경을 넘어갔다가 넘어왔기에 북경에서 구베아주교에게 요한이라는 세레명까지 받았다. 요한이 요단강을 건너듯이 마부요한은 너무나 쉽게 압록강을 건너갈 수도 있었고 건너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사영의 부름을 받은 요한의 말들은 황사영이 기다리는 토굴까지 닿지 못했다. 그는 황사영에게 가는 길 우포에서 밀고 되었으며, 밀고된 우포청에서 후려치는 곤장을 맞아 온몸이 찧어졌다. 찧기어진 요한의 입에서 황사영이 은신한 토굴이 숨이 넘어가듯 새어 나와 버렸기에 요한을 기다리던 황사영은 요한 때문에 조선의 도성에서 참수를 당하였고, 토굴로 가던 요한은 황사영 때문에, 황사영과 같은 곳에서 참수를 당하였기에 둘은 함께 천주가 있는 길로 같은 날 같이 갔다. 이것은 조선의 23대 임금과는 피 한 방울 티기지 않은 할머니가 권력 때문에 저지른 처절한 살육이었다. 우리는 이 사건을 국사책에서 그 유명한 ‘신유박해’라고 배웠고, 그 할머니를 정순왕후라고 배웠다.
12월이 되면 예쁘고 품격 있는 연하장을 고르기 위해 서점을 뒤적인 기억이 난다. 필체가 나빠 몇십 장의 연하장을 여분으로 더 산 기억도 난다. 나에게 몇 장의 연하장이 왔는지 세어본 기억도 나고 누가 보내지 않았는지 철저한 응징까지 다짐해 본 뒤끝 작렬인 시절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 한국에 있을 때 일들이다.
베트남에 온 후 언제부턴가 연하장을 사본 기억이 없다. 다만 연말쯤부터 연초까지 스마트폰이 유난히 ‘까툭 까툭’ 거렸고, 스마트폰이 ‘까툭 까툭’ 거릴 때마다 멋진 디자인의 연하장이 한국에서도 날아오고 베트남에서도 날아 왔기에, 나는 손가락 한 개만을 이용하여 스마트폰 속에 있는 또 다른 연하장을 눌러 보낸 이에게 다시 배달시켰다.
마부가 방울이 세 개나 달린 말을 ‘딸랑 딸랑’ 거리며 교지 들고 달려 가는 것도 아니기에 내가 복사해서 보낸 연하장이 어떤 연유로 상대방이 받지 못하지는 않았는지, 언제쯤 발송을 해야 적당한 시기에 도착하는지 등의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내가 보낸 연하장은 보낸 즉시 갈 것이고, 상대방이 확인하는 순간을 나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50년 전 순조시대의 소통 방법은 단일한 것이 멀고 불확실했지만, 지금의 소통은 다변적이기도 하면서 짧고 명확하다. 나는 자전거와 오토바이로 연하장을 보내는 시대에도 살아 보았고 손가락 하나로 연하장을 받아보고 보낼 수 있는 시대도 같이 살아 보고 있다.
SNS의 발달은 인간의 소통에 새로운 혁명을 가져 오고 있다. 이것은 빌게이츠가 ‘마이크로 오피스’ 란 프로그램을 만들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에서 주판과 전자계산기 등을 일순간에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고 수많은 은행원과 관리직을 할일 없게 만든 만큼이나 혁명적이다. SNS의 발달은 꼭 만나서 해결해야 할 일들을 급격하게 줄여 버렸고, 수천 명에게 동시에 각종 정보를 옆에 있는 듯 전달할 수도 있고, 답변할 수도 있도록 만들어 버렸다.
이것들이 머지않아 수많은 이동통신사 직원을 실업자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지만, 소통의 혁명은 이미 진행형이 되었고, 베트남에 있는 우리 옆에도 이미 와 있는 듯하다.
교민 사회에 이미 오래 전 일명 ‘단툭방’이라 불리우는 카툭방이 여러 개 생겨 교민 간 소통의 혁명을 주도하고 있다. 교민 간의 정보 교류가 천명단위로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기에 교민의 안전 관리 부분에서 현지 영사관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간편한 정보 전달 기능으로는 교민잡지에 경쟁적으로 기념사진이나 올려 대는 한인 단체 수십 개 이상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 하는 듯 하다.
난 이 단툭방에서 단 10분만에 잃어버린 지갑을 찾아 주는 것을 보았고, 스카이가든에서 부모를 잃은 애기가 있다고 단툭방에 오픈된 지 몇분도 되지 않아 보모를 찾아주는 위력을 보기도 했다.
이러한 교민사회의 단툭방들은 교민의 정보력과 각종 베트남 생활에 대한 상식과 지식을 상향 평준화시켜 주는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며, 머지않아 단순한 현지정보만으로는 더 이상 수입을 창출 할 수 없을 정도로 교민사회를 깨끗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라는 것도 예상이 된다.
물론 일부 몰지각한 사용자로 인하여 정보의 바다가 오염되는 경우도 발생하는 부작용도 간혹 목격하지만 이것은 정보를 받고 활용하는 교민 스스로 불매, 또는 충고 등으로 자연스럽게 정리 되어질 것이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단툭방의 법칙과 질서가 만들어 지면서 소통의 혁명은 더욱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단툭방을 이용하는 교민과는 상관없이, 교민들의 소통을 엄밀하게 듣고, 보고 싶은 충동에 빠진 집단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는 것인지, 교민 스스로가 단툭방의 단어를 검열하거나 또는 단어를 자가 검열하여 올리고 있는 현실은 SNS의 취약한 보안 환경을 잘 말해주고 있는 듯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오가작통법 같은 감시에 있지는 않은가 싶기도 하다.
밀서를 전해줄 마부요한이 밀고되어 황사영이 참수되었듯이 교민이 사용하고 있는 단톡방을 어떤 기관이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는 가정이 성립된다면 조금은 소름이 돋을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얼마 전 어떤 기관에서 SNS를 운영하는 회사에다 개별적 메신저에 대한 내용을 쉽고, 간편하게 자기들 기관에 제공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가, 나라가 잠시 시끄러운 적이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이것은 SNS운영회사에게 조선시대 젖갈 장수같이 여기저기 메신저 방들을 두리번거리다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밀고라도 하라는 말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