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2,Friday

사마천의 사기 – 치욕을 이겨내는 더 큰 용기

서해 클래식 006 -사기열전 참고

동양 고전이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논어>, <맹자>, <장자>, <노자>, <사서삼경> 등등등… 디지털 시대, AI의 시대에 동양 고전이라니요. 뭔가 답답합니다. 차라리 <그리스 로마 신화 >나 <세익스피어 4대 비극> 등 서양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서양 고전이 더 권장 도서로, 필독 도서로 선정이 되고, 나아가 만화, 영화, 요약본 등으로 다양하게 재생산 되며 읽혀지고 있는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21세기의 동양인들이 자기네 나라에서 평소에 한복이나 기모노, 치파오 등 전통 의상을 일상복으로 입지 않고, ‘양복’을 일상복으로 입고 있는 현실과 같은 맥락의 현상이라고 느껴집니다.

실제로 동양 고전을 읽어보면 생각보다 고리타분하지 않고, 의외로 ‘현실적’인 내용이 많아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배워야’ 하는 <서양 고전>에 비해, 동양 고전의 내용은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시스템이나 사고방식으로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논어>를 읽다보면 우리가 왜 이렇게 ‘공부’를 숭상하며 살고 있는지, <장자>를 읽다보면 왜 사람들이 취미에 빠지고, 공상에 빠지고, 산에 다니는지 ‘우리’의 모습이 보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의 집단 무의식을 이해하는 도구로서 동양고전의 가치를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이 바쁜 세상에 논어, 맹자, 장자, 노자를 읽는다는 것을 흥미나 실용적인 면에서 망설이게 되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책을 좋아하다 보면, 인생의 어떤 단계에서 위에서 나열한 동양 고전들을 통해 위로 받고 영감을 받는 순간이 온다는 약속을 드릴수는 있지만, 저 역시 위 책들을 읽어보라고 권하기에는 부담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위 동양 고전들의 유익함을 경험할 수 있는 데다가 재미까지 있는 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2,100년 전에 중국에서 ‘사마천’이란 사람에 의해 쓰여진 ‘사기’라는 책입니다. 만병통치약을 선전하는 5일장의 약장수나, 한 알만 먹으면 비타민 A,B,C,D,E 를 동시에 섭취할 수 있는 종합 비타민제의 광고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지만 이 책은 진짜 고전 중의 고전이라 꼽을 수 있습니다.

일단 등장인물들이 방대하고 스케일이 장난이 아닙니다. 기원전 100년 경 쓰여진 이 역사책은 ‘기원전 2070년부터 기원전 101년’까지 1969년간의 기간을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4,000여명의 등장인물이 나오고, 등장하는 직업은 왕, 승상, 장군, 병사, 자객에 이르기까지 1,300개나 됩니다. 춘추전국 시대와 진나라의 통일 및 분열, 한나라의 재통일 시기가 주된 역사적 배경이라 공자, 맹자, 노자, 장자, 한비자, 손자, 진시황제, 항우, 유방, 한신 등 살면서 한 번쯤 들어본 이름들이 한 챕터의 주인공들로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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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으로써 사기의 가장 큰 특징은 최초의 ‘기전체’ 역사책이라는 것입니다. 그 전의 역사책들이 ‘편년체’ 방식으로 연도별로 기록을 남기는 데 치중했다면, 사기는 연도별 기록인 ‘기’와 특정 인물에 대한 기록인 ‘전’을 기본 축으로 하여 구성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열’전’은 오자서 열전, 여불위 열전처럼 특정 인물의 이름으로 구분하거나 역사적 가치가 있는 폭력배들의 이야기를 다룬 자객 열전, 이름난 부자들의 사연을 담은 ‘화식열전’ 등으로 주제별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왕을 중심으로 역사적 사건 등을 다룬 역사책이 그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건조하고 지루한 반면, 한 시대를 배경으로 어떤 인물의 성장, 출세, 파멸 또는 영달을 그린 열전 형식의 역사책은 드라마나 무협지 같은 재미와 함께 처세의 교훈을 줍니다.
조국인 초나라 왕에게 아버지와 형을 잃고, 자신도 죽음의 위기에서 탈출하여 도망자의 삶을 살다가 오나라에서 왕의 측근이 되어 초나라에 대한 복수를 성공하나, 결국 자신도 정적의 음모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되는 ‘오자서 열전’은 몇번을 읽어도 스릴있고, 재미있고, 안타깝고, 비정한 권력의 속성을 느끼게 해줍니다. 영화 ‘도망자’, ‘벤허’, ‘더 킹’, ‘달콤한 인생’ 을 한꺼번에 보는 느낌입니다. 오자서 스토리에 나오는 ‘일모도원(할 일은 많으나 시간이 없음)’, ‘와신상담(복수나 목표 달성을 위해 어떠한 고난도 이겨냄)’ 등 사자성어의 탄생 배경을 보는 재미는 보너스입니다.

큰 상인이었던 여불위는 조나라에 볼모로 와있던 진나라 왕자 ‘자초’에게 일생 일대의 투자를 합니다. 자신의 전 재산은 물론 당시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던 아끼던 첩까지 자초에게 투자한 여불위 덕분에 자초는 결국 진나라의 왕이 되고, 자초와 여불위의 첩 사이에서 낳은 아들 ‘정’은 훗날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가 됩니다. 자초와 정이 왕이던 시절에 승상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여불위는 결국 자신의 아들이었던 진시황제의 협박에 의해 자결을 택하게 됩니다. 사상 최고의 투자를 성공시킨 ‘차이나 드림’ 스토리와 함께, 아들이 부친을 해한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비극이 어우러진 드라마입니다.

사마천은 당시 왕이었던 한무제에게 잘못 간언을 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이에 궁형(고자가 되어 사형을 면제 받는 형벌)의 치욕을 견디며 목숨을 부지한 사마천은, 울분과 비통함 속에서도 중국 역사상 최고의 역사서로 꼽히는 <사기>를 끝내 완성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깁니다. 그래서인지 사마천은 사기속 인물들을 평가할 때 작은 명분이나 치욕에 얽매이지 않고 참아내어 큰 업적을 이룬 복수의 화신 ‘오자서’, 적의 밑에서 종살이하며 훗날 춘추시대의 마지막 패자(당시 국가간에 최고 권력자)가 된 월나라 왕 ‘구천’, 시장에서 동네 깡패의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을 감내하고 훗날 한나라 개국 공신이 된 ‘한신’ 등의 행동에 높은 평가를 합니다. 살다 보면 이런 저런 억울한 일, 분통 터지는 일을 겪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가족’이나 ‘꿈’같은 지켜야 할 더 큰 가치와 목표가 있다면 사마천의 커다란 용기를 생각하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사기가 주는 최고의 교훈이 아닐까 합니다.

장연 금강공업 영업팀장 / (전) 남양유업 대표사무소장 / 베트남 거주 17년차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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