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실에서 미술 관련 책을 읽던 학생이 갑자기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조각들은 일부러 이렇게 만든 거지요?” 무슨 조각인가 하고 보니, 훼손된 고대 그리스 조각들이었습니다. “아니, 당~연~히 깨진 거지.” 라고 대답한 후 ‘당연히? 그게 왜 당연할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색의 선입견 없애기’, ‘생각의 고정관념 깨기’ 등등을 주제로 칼럼을 쓰고 있으면서도 왜 그 조각들이 당연히 깨진 조각이라고 생각이 들었을까 반성을 해봅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 조각들은 발굴 과정에서 훼손되어 팔 다리가 하나 없거나 머리가 없거나 하는 그런 상태로 전해내려 옵니다. 그 조각들이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겠죠? 시간이 지나면서 비교적 약한 팔과 목이 부러진 것 일 것 입니다.그 조각들을 보면 인간을 조각한 것이지만 완벽한 비례로 만들어져 있고 보이는 모습이 항상 아름다워서 보통 인간 같지 않은 느낌이 듭니다. 지금처럼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도 다 얼굴이 잘생기고 완벽한 몸매를 갖고 있진 않았을 테니까요.
이렇게 고대 그리스로부터 꾸준히 내려오던 전통 조각의 역사를 산산이 깨부수며 조각사를 새로 쓴 전설의 조각가가 19세기에 나타납니다. 누군지 짐작이 가시나요?
미술에 관심이 없어도 조각을 잘 몰라도 ‘생각하는 사람’ 하면 떠오르는 조각가, 오늘의 주인공 ‘오귀스트 로댕’ 입니다.
로댕 이전의 조각 작품들은 기술적인 부분과 완벽한 미의 완성을 이루는 부분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조각’ 은 조각가라기 보단 숙련된 장인이 만든 장식품으로 여겨지고 쓰여졌습니다. 로댕 이전에는 기술적 요소(완벽한 선, 비례, 조화 등)가 중요했다면 로댕부터 조각에 감정이 더해지고, 예술가의 주관적 의도가 들어갑니다. 그의 천재성과 독창성 덕분에 조각이 장식품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끌어 올려지고 그로 인해 그는 ‘근대 조각의 아버지’ 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게 됩니다.
보통 인물을 조각한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분이 어디일까요? 아마 얼굴일 것입니다. 모든 감정을 나타내기가 쉽고, 누구인지도 쉽게 알아볼 수가 있으니까요. 그런 중요한 머리를 로댕은 과감히 없애버렸습니다. 그에게는 머리가 없어도 인체의 근육, 피부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어 인체의 어느 부분일지라도 아름답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로댕의 조각을 보면 어떤 것들은 머리가 없거나 피부가 울퉁불퉁 하거나 인체가 토막 나 있거나 합니다. 작품만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작업 방식도 새로웠습니다. 인체의 부분들을 전혀 연관성 없는 곳에 붙이기도 하고, 완성한 작품들을 다시 본떠서 토막으로 분리하기도 하구요. 지금 시점에서 보면 별 일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보수적이며 전통 조각만 고집하던 그 시대에는 아마 엄청난 파격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 시대에 로댕의 조각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화를 내거나 수군거리는 보수적인 조소과 교수님들의 모습이 상상이 됩니다.
전통을 깨고 근대 조각을 탄생시킨 로댕은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 이후 조각의 역사를 바꾼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칭송 받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4년 전쯤 로댕의 작품들이 온 적이 있었습니다. 전시실이 석고 작품 위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전시를 보고 있는데 카메라를 든 분이 전시 감상 인터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전시실에 들어간 지 얼마 안되어서 작품을 별로 본 게 없기도 하고 로댕에 대해서 잘 몰라서 당황해서 거절을 했으나 워낙 적극적으로 요청하셔서 결국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마침 ‘생각하는 사람’ 석고를 본 뒤라 “그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을 실제로 보게 되어서 신기합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크기가 크네요.” 라고 아주 평범한 대답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전시실을 돌며 감상하다가 그의 ‘손 시리즈’ 들을 보았을 때 ‘아! 지금 인터뷰하면 더 잘할 수 있는데’ 라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답니다.
로댕의 손 시리즈는 살아있는 것처럼 따뜻하면서 생생하게 느껴져 보는 내내 재미있고 흥미로웠습니다. 차가운 석고 조각에서 손이 마치 살아있는 듯한 따뜻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연인의 손’은 연인은 없고 그들의 마주잡은 두 손만 있지만 제목을 보기 전에도 ‘아, 이건 연인의 손 같다’ 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남성미가 느껴지는 손과 여성미가 느껴지는 손, 그리고 느껴지는 그들의 사랑, 손만으로도 감정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로댕은 그의 작품들을 창작과 동시에 모두 생명을 불어 넣은 것 같습니다.
‘신의 손’을 감상할 때는 그 손이 로댕의 손 또는 창작자의 손으로 느껴져서 재미있었습니다. 신이 로댕을 창조했다면 로댕은 그가 창작한 많은 작품들에게는 자신들을 창조한 신이겠죠? 그도 신처럼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담아서 작품을 창작했습니다. 그 이유가 로댕 작품들이 주목 받았던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아름다운 조각의 외형을 파괴하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작품 속에 작가의 주관을 녹여냈기 때문입니다.
로댕에게는 주문자와 관객의 요구보다 작가의 의도와 시선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작품이 완성된 후 비난을 받기도 하고 작품이 방치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도 인간의 실체와 내면이 잘 표현된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역사책 속 뻔한 삽화처럼 누가 그렸는지도 모르게 잊혀지지 않고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또한 로댕의 대다수의 정교한 인체 조각들을 봤을 때에는 ‘대단하다!’ 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피부, 근육, 핏줄까지도 섬세하게 표현된 인체 조각들은 사람이 곧 석고를 깨고선 튀어나올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로댕 시대의 사람들은 ‘로댕은 실제 사람으로 주물을 떠서 작품을 만들었다.’라는 의혹을 가졌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로댕 하면 떠올리는 ‘생각하는 사람’ 은 그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의 원작은 청동이지만 제가 본 것은 석고로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워낙 크기 자체가 크기도 하지만 어깨와 팔 부분의 비율이 다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조각되었기 때문에 보기에 상당히 크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보다는 ‘진짜 조각이 생각을 하고 있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 대신 작품 그 자체로 설명이 되는 표현력과 생동감에 작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오랜 시간 답습된 조각의 틀을 깨고 당당히 조각사에 이름을 올린 로댕은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힘겹게 살았던 것과는 달리 생전에 인정을 받고 성공을 거뒀습니다. 프랑스 뫼동에 가면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던 집과 그의 작업실, 그리고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는 수장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엔 자신의 ‘생각하는 사람’ 작품의 아래에 편안히 잠들어 있는 로뎅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로댕은 참 행복할 것 같습니다. 세계 곳곳에 그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들이 살아있고 그 역시 자신의 작품과 영원히 함께 있으니까요.
로댕처럼 살아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을 잠시 가져봅니다.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도록 지금 현재에 열심히 노력하고 살자 마음먹으며 칼럼을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