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뜨거운 날이 계속된다. 5월 중순경 비가 좀 내리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최근에는 뜨거운 햇살에 구름이 마른 듯 비가 뜸해졌다. 기온은 늘 30도 선을 훌쩍 넘어 있고, 습도는 우기라는 이유로 70도 이상을 기록하며 여름철의 전형적인 짜증스러운 습도 높은 날이 지속되고 있다.
구삼봉 대한노인회 베트남 지회장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든 것은 지난 달 한국학교에 1억 동을 기부한 구 회장의 사진을 보면서 생긴 가벼운 의문 때문이지만, 필자가 기억하기로는 구 회장은 한국학교 및 기타 단체 등에 심심찮은 기부활동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에, 이 기회에 직접 만나 노인회에 대한 소식을 포함하여 구 회장 개인사에 대하여도 뭔가 들어봄 직한 풍부한 스토리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러한 기대를 안고 불쑥 찾아 나섰다.
빈증 송탄 공단을 지나서 현지 주거지 안쪽에 자리한 삼인나염이라는 이름의 그의 회사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주어진 주소대로 구글맵을 사용해서 찾아간 곳이 엉뚱한 자리였다. 결국 전화를 해서 현지인 간의 소통으로 구 회장이 기다리고 있는 송탄공장 10 번로를 찾아가 그를 만났다. 그의 차를 따라 좁은 골목길을 조심스럽게 지나고 난 후에야 그의 회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차 돌릴 곳이 있나 싶게 좁은 골목이었다.
그의 회사 삼인나염이 자리한 이 좁은 골목길이 현지화된 삼인나염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고전적인 베트남 주택의 2층, 허름한 소파에 앉아 대화를 시작한다.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대한노인회 베트남 지회의 상황
먼저 대한노인회 베트남 지회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요즘 노인회가 어찌 돌아가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호찌민 노인회는 기본적으로 회원 신청을 받고 가입한 회원만을 대상으로 하는 모임이다. 현재 65세 이상 베트남에 거주하는 한국 국적의 교민을 대상으로 회원을 모집하는데, 현재 가입된 회원 수가 62명이라고 한다.
호찌민 한인사회는 비교적 장년층이 많은 편이라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면 엄청난 규모가 될 터이지만 현실적으로는 큰 모양새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이유를 찾아보자면, 노인회의 전신인 원로회라는 이름의 모임이 일부 장년층 교민의 친목 모임이었던 탓일 수 있다. 그 모임이 한국의 대한노인회와 협의를 거쳐 대한노인회 베트남 지회로 이름을 바꾼 형태가 되다 보니 여전히 노인회가 일부 장년층의 친목 단체처럼 인식되는 잔상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 태생적 한계에 더해, 노인이라는 이름 자체에 대한 거부감도 가입을 꺼리는 이유가 되는 듯하다. 실제로 이 글을 쓰는 인간도 내가 젊은이가 아닌 것은 맞지만 굳이 내가 노인이요 하며 노인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
아무튼 비록 소규모 모임이긴 하지만 교민단체 중 가장 큰 어른들의 모임인 노인회 회장을 맡고 있는 구삼봉회장의 임기가 이미 1년 반이 지났다. 그간의 회장 노릇이 어떠하신가 하는 질문에 별로 가벼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어려움이 많다는 얘기다. 그가 토로하는 어려움은 노인회원들의 신분이 불완전하다는 점이다. 62명의 회원 중 많은 회원이 직업을 갖고 있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비자를 유지하고 베트남에 체류하는 문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이미 한국의 대한노인회에 건의도 해보았지만, 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기에 더욱 답답하다는 얘기를 털어놓는다. 국내 거주자에 한하여 지급하고 있는 노령연금이라도 해외거주자에게도 지급되기를 건의해 보지만 될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 이국에서 변고라도 당할 경우 한국의 가족과 연결이 안 되는 무연고 사례가 상당하다며, 이런 회원들을 돌봐야 하는 입장에서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현실적으로 찾기 힘들다는 얘기다. 최근에는 무연고 사망 케이스가 노인회원 중에서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여 현재 호찌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베트남 재난상조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노인회 주관 장례를 진행하는 데 필요한 협조를 논의했다고 한다.
지난 팬데믹 사태 전에는 노인회 회원 수가 100여 명에 달했지만, 팬데믹을 거치며 많은 회원이 한국으로 돌아가 현재 60여 명의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팬데믹 당시 한국으로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그나마 나은 형편이라고 한다. 현재 남은 회원 중에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도 있고, 이들은 불투명한 신분으로 베트남에 남아 지내고 있는 노인이라는 얘기다. 이런 분들을 위한 법적인 지원책이 현실적으로 무망하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토로한다.
해결책이 없는 주제의 이야기를 길게 끌고 가기가 괴롭다. 그래도 현실은 알고 지내자는 의도로 좀 더 캐물어 본다. 노인회가 하는 활동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연중행사로 어버이날 여성회의 주관으로 열리는 경로잔치와 단체 생일잔치가 있고 월례회가 한솔식당에서 매월 열리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 하는 활동은 없는 셈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 정부에서 해외동포청의 탄생으로 새로운 예산이 배정되었는지 한국의 대한노인회 중앙회에서 사업 계획서를 제시하라는 연락이 왔다며 서류를 보여준다. 그동안 대한노인회에서 베트남지회에 연 3천 불의 지원금이 있었는데 너무 미미한 금액이라 전혀 도움도 안 되었는데, 이번에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예산을 주려나 하는 기대로 회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사업 계획을 작성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노인회는 사무실을 임대로 사용하고 있고, 일을 보는 총무에게 약간의 급료를 지불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약 4천만 동의 금액이 매월 소요되고 있으나 특별한 활동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소요되는 금액도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다행스럽게도 노인회는 현재 15억 동의 자금이 모아져 있다고 한다.
교민사회의 가장 큰 어른들의 모임인 노인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임인 이상, 교민 사회의 관심이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공적인 활동이 없는 상황에서는 여전히 일부 노인들의 친목모임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힘든 상황으로 보인다. 하지만 최근 대한노인회에서 사업 계획서를 제출하라고 하니, 앞으로는 그런 지원 자금을 바탕으로 노인회라는 이름에 걸맞은 공적 활동을 보여주길 기대해 본다.
많은 어려움이 산재한 이 모임을 의연하게 이끌어가고 있는 구삼봉 회장 개인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난다. 그의 베트남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하자.
베트남에서 제2의 인생을 꽃피운 사업가.
구 회장이 베트남을 찾은 것은 한국과 베트남의 수교가 이루어진 1992년이다. 베트남 진출이 30년이나 된 셈이다. 서울 구의동의 작은 무역회사에서 베트남에서 나염한 원단을 해외로 수출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보낸 나염전문가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3년여를 그 회사에서 일하면서 시장 개척에 매진했으나 세상일이 기대한 대로 된 적이 있는가? 아직 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베트남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발판을 마련하던 중 회사에서는 더 이상 사업을 진행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리고 3명의 직원 전원의 철수를 명령했다.
그동안 쌓아온 것이 아까운 구 회장, 부인과 사별하고 적적한 베트남 생활 중에 새로운 반려자를 만나 결혼을 한다. 그 결혼이 그의 인생에 중요한 변곡점으로 작용한다. 부인의 이름으로 지금의 회사 삼인나염을 만들고 지금도 소유하고 있는 이 주소의 허름한 집을 그동안 봉급생활을 하며 모든 돈으로 구입하고 베트남에서의 사업을 시작한다.
처음 시작할 때는 고작 150㎡의 작은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2,000㎡가 넘는다.
공장을 돌아봤다. 나염에 필요한 모든 설비가 구석구석에 들어가 있다. 이 큰 기계를 어떻게 이 좁은 공간에 넣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기계들 그리고 2층은 컴퓨터 도안실이 마련되어 있고 고급 인력이 컴퓨터를 앞에 두고 디자인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매출을 물었다. 코로나 시절에도 월 매출이 약 45억 동이었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3분의 1로 줄었다고 한다. 가격도 처음 시작할 때의 반 이하로 줄었다며 예전 시절이 좋았다며 헛웃음을 짓는다. 지금은 많은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나염 시설을 갖추고 있어 오더가 많이 줄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삼인나염은 베트남 내수를 주로 하는 곳이라 큰 충격은 없었다 하지만, 최근 시장 상황이 더욱 악화되면서 오다가 줄었다며 한숨을 짓는다.
이젠 베트남에서 뼈를 묻어야 할 판이군요, 하는 질문에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젓는다. 한국으로 돌아가야지요. 남해에 이미 돌아갈 곳을 마련해 두었고 베트남 부인과 사이에 생긴 2남 1녀 중 큰아들이 한국에서 군 복부를 마치고 외국어 대학에서 수학하고 있다고 한다.
베트남 부인을 둔 덕분에 베트남 사업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며 자신의 성공을 베트남 부인의 공으로 돌린다.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상황이 개인적으로 크게 반가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회원보다 여유가 있는 관계로 어려운 회원을 돕는다는 생각에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고 소감을 피력한다.
그는 노인회원을 돕는 일뿐만이 아니라 틈틈이 여러 단체와 불우이웃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한국학교만 해도 여러 차례 기부했고 여성회에도 기부금을 남겼다고 한다. 기회가 닿는 대로 주변의 이웃을 위한 봉사를 아끼지 않는 구 회장을 보며 진정한 현지화를 이룬 기업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 회장과 만나 두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그에게는 아무런 근심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어찌 사람 사는 곳에 근심이 없겠는가? 나름대로 다 근심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만 76세 그의 얼굴은 생활의 근심조차 삶의 증거로 삼고 그것과 함께 더불어 즐기며 살아가는 느낌을 던져준다.
어쩌면 베트남에서 성공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한 가지 방안을 알려주는 듯한 그의 모습이다.
마당에서 놀던 강아지가 짖어대는 소리에 2층 창문을 열고 바오베를 부르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오지랖 넓은 이웃집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이 동네에서 30년을 살아왔으니 이제 베트남 사람이 다 되었다며 입가를 올리는 자조적인 미소가 그의 안락한 베트남 생활을 보여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