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못 그리는 것처럼 보이는 화가 – 에드바르드 몽크
올해 여름 한국 서울에 뭉크의 작품들이 왔었습니다. 뭉크하면 절규, 절규하면 뭉크가 자동으로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마침 그 때 저도 서울에 있었을 때라 그의 작품들을 만나러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습니다. 전철역에서 내려서 예술의 전당으로 향하는 마을버스를 타니 그 안에는 저를 포함한 세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버스뿐만 아니라 예술의 전당 정문 앞에도, 매표소 앞에도, 전시실 앞에도 학생들이 가득했습니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자유롭게 이야기 하고 있거나 지도 선생님과 함께 전시를 본 후 각자 알아서 집에 가더군요. 너무도 여유롭게 문화 생활하는 그 광경을 보고 있으니 문득 베트남에 두고 온 제 학생들이 생각나서 마음 한구석이 찡했습니다. 요즘엔 외국에 나가지 않더라도 한국에 대형 전시들이 많이 열려서 같은 또래 친구들은 유명 작품들을 직접 볼 수가 있는데, 여기 호치민 학생들은 한국에서 당연히 누리는 문화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 같아 안쓰러웠습니다. 어디를 나가려고 해도 교통이 불편해서 힘들고, 막상 나가도 볼만한 전시도 거의 없으니 …..
자꾸 봐야 눈이 높아져서 시각적으로 발전을 할 텐데 걱정스럽기 까지 합니다.
이번 뭉크 전시에는 입장을 하기 전 소지품 수색이 있었습니다. 공항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냥 들어가는 다른 전시에 비해서는 엄격한 검사가 진행되는 것을 보니 ‘음, 진품이 많이 왔나 보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시실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그의 고전적인 자화상을 본 후 든 첫 번째 생각은 ‘몰라 봐서 죄송합니다. 엄청 잘 그리시는군요!’ 였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학교 교과서와 다른 책에서 절규를 포함한 몇 점의 뭉크 대표작들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느낌은 ‘뭐지? 뭉크는 미술의 기교적 재능이 없었나?’ ‘이게 완성된 그림인가? 아직 덜 끝나 보이는군’ 이었습니다. 형태도 뭉뚱 그려놓고, 오직 퀭한 얼굴만 있었으니까요.
물론 작품 감상에서 기교적인 부분이 항상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감정이 풍부하거나, 색감이 좋거나, 구성이 특이하거나 묘사력, 표현력이 좋거나, 의도가 잘 나타나 있거나 등등 좋은 작품이라 느껴지는 것은 한 두 개로 잘라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음식의 단 맛, 짠 맛, 쓴 맛, 신 맛, 매운 맛처럼요. 그런데 제가 죄송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못 그리는 줄 알았던 그 분 뭉크는 안 그렸던 것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은 분명 다르겠지요?
이렇게 제가 ‘뭉크는 그림을 왜이리 못 그리는 걸까?’ 하고 감히 시건방지게 느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뭉크가 ‘표현주의’의 대표적 화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잠깐 ‘표현주의’의 정의를 살펴볼까요?
< 표현주의>
미술의 기본 목적을 자연의 재현으로 보는 것을 거부하며, 르네상스 이래 유럽 미술의 전통적 규범을 떨쳐버리려 했던 20세기 미술 운동 중의 하나. 표현주의자들은 예술의 진정한 목적이 감정과 감각의 직접적인 표현이며 회화의 선, 형태, 색채 등은 그것의 표현가능성만을 위해 이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구성(구도)의 균형과 아름다움에 대한 전통적 개념은 감정을 더욱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해 무시되었으며, 왜곡은 주제나 내용을 강조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뭉크에겐 작가가 무얼 그리고 있는지, 감상자가 무얼 보고 있는지 보다 작가가 그림을 그릴 때 무얼 느꼈는지 감상자가 작품을 보면서 무얼 느끼는지가 더 중요했었나 봅니다.
이제 노르웨이의 국민 화가 뭉크의 가장 유명한 작품 ‘절규’를 볼까요? 아마도 그 유명한 ‘절규’가 전시장에 와 있어서 그토록 삼엄한 경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전시를 보기 전까지 절규가 한 작품인 줄 알았었는데 하나가 아니라 총 4점 이더군요. 교과서에 등장하는 ‘절규’는 회화 버전인데, 이번에 한국에 온 작품은 석판화 작품이더군요.
하지만 이 석판화 버전 ‘절규’는 낯익으면서도 또 다른 신선한 느낌을 주었답니다.
해가 지고 있었고, 불현듯 우울함이 엄습했다.
하늘이 갑자기 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죽을 것 같은 피로감에 멈추어 서서 난간에 기대었다.
검푸른 협만에 마치 화염 같은 핏빛 구름이 걸려 있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혼자서 불안에 떨면서
자연을 관통하는 거대하고 끝없는 절규를 느꼈다.”
여러 점의 ‘절규’ 이외에도 뭉크는 비슷한 느낌의 그림들을 제작했습니다. 제목도 비슷비슷한 ‘불안’ ‘절망’ 이라는 작품들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 중 불안, 공포를 잘 표현한 화가다운 제목들입니다. 그런데 전시를 보면서 놀란 점은 ‘생각보다 작품이 그리 어둡지 않구나’ 였습니다. ‘어떻게 표현하면 더 효과적일까? 어떻게 하면 더 강한 느낌을 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노력하는 화가의 모습이 상상되는 그림들이었습니다. 밝은 느낌의 신나서 그린 것 같은 작품도 있었고, ‘팔뼈가 보이는 자화상’ 처럼 재미있게 느껴지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그가 그린 작품의 수가 약 2만점이라고 하니, 모든 화가들이 다 대단하다지만 뭉크 역시 대단합니다.
그럼 이번 주는 가족과 함께, 친구와 함께 미술 전시를 보러 가볼까요?
추천하자면 호치민시 1군 벤탄시장 근처에 호치민시 미술관이 있습니다. 가끔 열악한 시설 때문에(에어컨이 없어요!) 또는 후진국 화가들 작품이라고 무시하시는 분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가난한 나라는 있어도 문화적으로 가난한 나라는 없다고 하니 조금 더울지라도 선입견 없이 마음을 여신다면 좋은 작품 감상이 될 것 같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이 있습니다. 호치민에서 환경 탓만 하고 불평만 할게 아니라 야무지게 여기서 누릴 건 누려 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