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이 옳을까 의문이 들 때, 이렇게 걷는 것이 맞을까 혼란스러울 때에는 잠시 멈추어 뒤를 돌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뒤를 보면 앞에 놓인 길을 바로 가고 있는지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민족을 이끌고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한 후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기 직전, 노령의 지도자 모세는 따르는 이들에게 아득한 옛날을 회상하여 보라, 조상 대대로 내려온 세대를 생각하여 보라고 말합니다. 그의 조언의 마무리는 이와 같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해 줄 것이다.”
모세는 새로운 땅에 민족을 정착시키기 위해 전쟁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라면 전쟁을 두려움 없이 잘 준비하도록 독려하면서 앞만 바라보고 전진하라 했을 텐데 그는 반대로 멈추어 지난 시간을 돌아보라고 합니다.
제가 인도하는 모임이 하나 있습니다. 올해로 9년을 맞습니다. 처음 모임을 가졌을 때는 몹시 초라했습니다. 형편도 좋지 못했습니다. 이 모임이 한 해를 넘길 수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더해도 모임의 정체와 목표하는 바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길의 방향은 명료해졌고 해야 할 일은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럴 수 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모임으로부터 시작해서 매 일년이 될 때마다 모임에 속한 이들은 모두 하던 일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처음에 어떻게 모였는지를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왜 모임이 시작되었는지, 왜 지금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는지, 그것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되짚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어떤 동의와 결단으로부터 시작된 것인지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러니 이 모임이 방향을 잃지 않고 지속성의 동력을 갖게 된 이유가 바로 멈추어 돌아보는 반복된 행위에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어떤 일이건 모임이건 세월이 지나다 보면 방향을 잃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고 새로운 세대가 나타나면 이전 것은 속히 사라지거나 또는 부인됩니다. 시대와 상황이 변하고 그것을 바라보고 수용하는 사람들의 가치 척도가 변하면서 이러한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여겨졌습니다. 때때로 그것은 개혁이라는 용어로 포장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방향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새로운 길의 동행에서 소외되는 이들이 생기면 갈등기를 거치게 되고 대개의 경우에는 봉합 보다는 결별의 수를 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과정이 과연 숙명적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당장 제가 몸 담고 있는 두 개의 그룹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나뉘어지지 않고 지속성을 가지고 함께 나아갈 수 있던 이유 중 중요한 하나가 멈추어 돌아보는 일을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해외에서 일을 하다 보면 교민 단체 소식들을 피할 수 없이 듣게 됩니다. 출장으로 여러 나라를 다니던 시절, 지역 교민의 수가 늘고 단체의 발언권이 커지는 나라에 가보면 꼭 겪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분란입니다. 왜 그런 일이 생길까요? 인정하지 않아서 입니다. 전임을 안정하지 않고, 전 세대를 인정하지 않아서 입니다. 그러니 현재가 인정될 리 만무입니다. 미워도 고와도 다 공동의 역사요, 잘했거나 못했거나 우리의 일부인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기들만 옳고 자기들만 정통입니다. 그러니 쌈박 질이 끝날 리 없습니다. 자각도 없고 인정도 없으니 혼란을 바로잡을 계기를 찾기란 어렵습니다.
제가 도시로서 사이공에 매력을 느끼는 데에는 이런 경험의 연유도 있습니다. 같은 식민지를 겪었고 아픈 분단의 역사를 가졌음에도 우리와 그들이 과거의 역사를 다루는 방식은 다릅니다. 인정하는 일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사이공에서는 멈추어 생각하게 하는 건물이 많습니다. 치욕과 고난의 역사, 분란과 아픔의 시절을 보게 하는 현장을 도시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비교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남겨두는 일에 힘들어 합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것이 개인이건 단체이건 또는 국가의 그것이건 간에 부인될 수 없습니다. 생명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혁신을 외칩니다. 변해야 산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옳습니다. 변화를 두려워 말고 수용하며 적극적으로 상황의 파고와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생존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생존이 숨을 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정체를 놓치지 않는 생명력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앞만 노려보며 돌진하는 용맹 이외에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달리는 말을 멈추고 떠나온 길의 자취를 돌아보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멈추어 돌아보는 일은 뿌리를 단단히 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멈추어 뒤를 돌아보는 행위는 혁신을 가로막는 행보가 아닙니다. 진보에 장애물을 놓는 행위 역시 아닙니다. 후회의 길로 들어서자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다만 직시하는 것이며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옳은가를 한 번 더 살피는 사려 깊은 행동입니다. 돌아보는 행위는 세대를 이어주는, 또는 전임과 후임을 이어주는 중요한 가교의 역할을 합니다. 지속성을 갖게 합니다. 멈추어 돌아보는 일이 뿌리를 단단히 한다는 말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변화하는 상황에의 대응과 같은 일들이 가지 치고 열매를 맺으려면 돌아보아 추스리는 든든한 뿌리를 내리는 수고가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무릇 격랑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당연히 앞날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경제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제가 몸담은 기업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럴 때 잠시 멈춰야 할 것을 생각합니다. 목표를 세우고 달리기에 앞서 내가 서있는 자리를 살피는 일을 먼저 하기를 권합니다. 멈추어 뒤를 돌아보며 현재의 길을 걷기 위해 했던 최초의 결의들, 세월을 걸으며 쌓아온 의미들, 함께 한 사람들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그러면 지금 닥친 혼란의 상황이 새롭게 해석되어 보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기대로 저도 잠시 멈추기로 했습니다. 짜오칼럼을 쓰기 시작한지도 벌써 오년을 헤아립니다. 그동안 부실하고 변변치 못한 밥상의 글이었지만 그럼에도 맛있게 읽어준 분들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멈추어 돌아볼 마음을 굳힙니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먼 길의 방향을 바로 헤아릴 수 있을 테니까요. 이제 자리에 멈춰 서서 허리를 굽혀 ‘5년’이라고 씁니다. 그리고 ‘감사’ 라고 읽습니다.
몽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