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성인식은 열 두어 살이 되는 해,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정글 속에 아이를 혼자 남겨두고 모두가 떠나버린다. 밤이 오면, 아이는 하얗게 질리고 공포는 극에 달한다. 날이 희부옇게 밝아질 때 즈음, 아이가 맨 처음 보게 되는 것은 아버지의 얼굴이다. 밤새 떨고 있는 아이 곁을 아빠는 한시도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산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생각하다 계시처럼 받아든 얘기다. 세상의 두려움에 떨어진 나를 멀리서 아버지의 눈으로 응시하며 지켜보다가 피투성이가 된 내가 맨 처음 안기는 곳이 산이었다. 산은 늘, 왜 이제야 왔냐며 안아주었는데 어린 아이는 그렇게 산에서 통과제의를 거치며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어 산에 가면 성인식의 그 산과 다를 것인가. 나는 내가 어른이 되었는지도 궁금하고 그때의 산과 지금의 산이 어떻게 다른지도 궁금하다. 그러나, 갈 수 없다. 그렇게 오르던 산을 갈 수 없으니 책으로, 글로, 마음으로 오를 수 있는 산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
‘대개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의 매혹의 근거를 명확히 밝힐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 객관화되었을 때다. 사랑의 객관화는 사랑의 박제화의 길목이다. 사랑은 언제나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요인들을 넘어서 존재한다.’ 산은 나에게 무엇인가? 왜 오르는가? 에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다. 혹여 답한다 하더라도 말하는 중에 이내 말문은 막힌다. 어떤 류의 대답을 하더라도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여전히 산 밖의 시선이 아니라, 산 안에 있기 때문이라 여긴다. 시인이 말하듯 대상에서 떨어져 객관화되었을 때만 근거, 이유, 합리 같은 단어들을 써서 대상을 설명할 수 있듯이 나는 여전히 산에 관해 객관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나아가면, 나는 산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산에 집착한다. 산을 오르는 일, 목숨을 내놓고 또 올라가려는 욕망, 산을 향한 열정 같은 것들은 적어도 나에게는 객관적일 수 없고, 세계의 합리성과 이러저러한 결정론 너머에 있음에 분명하다. 나라는 존재가 사는 방식, 즉 내 삶이 미끄러져 들어간 곳이 그곳이고, 삶의 의미 안쪽과 바깥쪽에서 모여들고 흘러나간 곳이 바로 산이다.
산의 역사나 등반의 역사에 내 시선이 가기 보다 산에 기댄 인간의 내면이 말하는 생생함을 드러내는 언어, 말에 마음이 끌린다. 나는 산이 하는 말을 직접 듣고 싶지만, 산은 말을 할 수 없으므로 인간의 말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데 산의 말을 인간에게서 간구하려면 산을 치열하게 오른 자들의 말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데 이른 것이다. 그들은 아마 산과 닮은, 몇 안되는 인간이지 않았겠는가. 나는 그런 그들의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피와 같은 말들을 흩어지지 않게 갈무리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일상은 지루하고 삶은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 차있다. 지루함을 벗어나고 싶지만 영락없이 지루해야 하니 감옥이다. 감옥이라 느끼지만 벗어날 수 없으니 갇힌 것이다. 벗어날 수 있는데도 이후의 삶이 두려워 다른 문을 열 수 없으니 닫힌 것이다. 울퉁불퉁했던 세계가 돈 앞에 평평해지고, 갇히고 닫혀 삶은 더는 저쪽으로 가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는 다짐한 것이 있는데,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살아서 이 세계의 무의미와 싸워야 한다는 믿음이다. 그 믿음의 듬직한 배후가 나에겐 산이다. 산에 대한 무수히 많은 은유가 인간의 삶을 말한다. 산은 인간을 닮았고 인간은 복잡하다. 인간의 복잡함은 우주를 닮았다. 한데 뭉치면서 떨어내고 서로 당기면서도 튕겨내며 새로운 원소를 만든다. 융합하고 섞이며 별을 만들고 당기고 밀어내고 돌고 회전하며 은하를 만든다. 태어나고 변화하고 마침내 죽는다. 죽은 것만이 부조리가 없다. 오직 죽은 것만이 모순으로 살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죽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그때 그때 죽어야 하는 역설 자체다. 죽은 자, 실수하지 않는다. 죽어 있는 것들은 오르지 않고 도전하지 않는다.
저 도저한 무를 향한 돌진은 산을 오르는 인간의 마음과 닮았다 여긴다. 적막, 시커멓고 까마득하게 뻗은 검은 벽을 새벽에 홀로 오를 때, 이 세계의 고요에 흠집을 내는 아이젠 소리, 얼음짝에 피켈을 찍어내는 소리는 순백의 소리 없는 몸짓이다. 귀청을 때리는 고요, 적막의 메아리다. 까마득한 아래 저곳은 오늘이 수요일이지만, 그곳에는 문자도 있고 빵도 있겠지만, 오로지 무를 향해 미끌려 들어가는 수직의 벽에는 살아있다는 존재의 한 종자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 오름의 방향이 세계의 무의미와 어떻게 섞이는지, 죽는 줄 알면서도 달려드는 처절한 경험이 각인된 인간의 몸은 어떻게 산에 다시 각인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것은 낭만과 로망의 언어로는 설명될 수 없을 것이고, 사유나 논리의 언어 위에 있는 몸의 언어일 터인데, 그 고압전류가 흐르는 언어를 잡고 삶 전체와 맞서는 그 언어의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기를 나는 소망한다.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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