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사는 것은 혀에 달렸으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 잠언 18:21)
혀의 열매란 말의 대가를 의미하는 듯합니다. 말의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성경 잠언에서 직설적으로 밝혔지만, 그전에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추방도 말, 혀의 놀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사탄으로 묘사된 뱀의 유혹도 말로 시작됩니다. 뱀의 혀가 두 가닥인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혀의 열매는 인류의 시작과 함께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파장이 얼마나 무겁고 무서운지 성경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어찌보면 말을 어떻게 하며 사느냐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행동과 말이 일치되는 사람은 믿음이 가고,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은 신뢰를 잃습니다. 그러니 살면서 최우선적으로 훈련하고 익혀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말하는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말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냅니다. 자신의 인성부터 시작해서 교육수준, 가치관, 지식수준, 사고방식 그리고 상대에 대한 자신의 마음까지 다 드러냅니다. 결국 말을 잘하는 것은 세상을 잘 사는 것과 같다고 봐도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말을 잘 하며 살 수 있나요? 그것만 깨우칠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걱정이 다 사라질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늘 말실수를 하고 그로 인해 오해를 부르고 불화를 만들곤 합니다. 관계의 모든 갈등은 말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침묵은 금이다’라고 배웠지만, 그 실행은 금 얻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처세술의 책들은 말을 잘하는 방법에 대하여 ‘묻지 않은 말을 하지 말라. 자신에 대한 얘기를 먼저 늘어놓지 말라고 합니다’. 즉,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말을 잘하는 것처럼 서술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과연 충분한가요?
속마음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경우라면, 속마음과 표현해야 할 말이 서로 다른 상황을 의미합니다.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말은 저렇게 해야 실수가 안 되는 경우입니다. 그렇죠, 그런 경우 속마음이 들키지 않게 억지 미소를 지으며 장단을 맞춰야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이 말을 잘하고 현명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작위적이란 생각이 들지 않나요? 자기 모습대로 살기 위하여는 다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결국 근원적인 문제는 마음입니다.
마음으로 품고 있는 생각이 부끄럽지 않다면, 그 생각을 그대로 말로 나타내도 문제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 훈련을 한다는 것은 드러내는 말을 조심스럽게 가려가며 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표현되어야 하는 속마음을 정제하는 것이 올바른 훈련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상을 겪으며 일어나는 마음의 반응을 늘 정직하고, 당당하고, 품위있게, 부끄럽지 않게 가져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길에서 운전을 하다가 급하게 끼어드는 오토바이를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욕지기가 올라옵니다. 설사 창문을 열고 나무라지는 않아도 이미 마음속으로 욕을 했다면 겉으로 뱉은 것과 다를바 없습니다. 진짜 훈련된 사람은 그런 일로 마음이 흔들리지도 않지만, 설사 잠시 흔들린다 해도 곧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관용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사건에 반응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말을 잘하기위해 수행할 훈련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속으로는 분노하면서 겉으로만 정제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엄청난 고역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분노하지 않도록 마음을 관리해야합니다.
즉, 말을 잘 한다는 것은 말 자체를 조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말의 근원이 되는 마음 씀씀이를 다스려야 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런 훈련을 거쳐 이르게 되는 수준을 공자는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칠십이종심소유불유구 라고 표현했지요.
나이 일흔에는 마음이 따르는 대로 행하여도 세상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사회의 법도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이런 해방의 삶은 부단한 마음의 훈련을 거쳐야 오를 수 있는 경지입니다.
바로 그 경지, 속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말을 해도 사회적으로 하등의 실수가 안 되는 평화의 삶, 이것이야말로 성숙한 어른이 맛볼 수 있는 진정한 혀의 열매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