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5,Monday

한주필 칼럼 – 글을 쓰다가 골프채를 휘두르는 이유

한 주일을 분주하게 보내고 주말에 한가한 시간이 생기면 가끔 인생에 대한 생각이 스며듭니다. 좀 늦었죠. 젊은 시절에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문제를 거의 다 살고 나서야 이제 끄집어내는 것은 그만큼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일인가 하는, 답 없는 주제을 꺼내 봅니다.

잘산다는 것은 재정적인 문제나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사회가 말하는 일반적인 ‘잘사는 조건’을 채우지 못해도 정신적 기쁨을 느끼는 삶을 살고 있다면 충분히 잘사는 사람입니다. 정신적 기쁨이나 만족을 행복이라고 표현한다면 잘 산다는 것은 스스로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는데, 과연 그럴까요?

잘산다고 늘 행복할 수만은 없는 것처럼, 행 불행과 관계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잘사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인마다 상황이 다르겠지요. 남을 도와주는데 생의 보람을 느낀다면 봉사활동에 매진하는 것이 잘 사는 일일 테고, 평생 공부하며 지식을 익하는데 보람을 느낀다면 학자 생활을 하는 것이 잘 사는 길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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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며 스스로 잘 산다고 주문을 외어도 인간은 늘 불안과 두려움에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간이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루고자 하는 일에 관한 고뇌를 시작으로, 욕구가 큰 만큼 그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걱정과 불안, 두려움도 커집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라며 봉사활동을 하고 학자 노릇을 해도 염려, 불안, 두려움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결국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호사스러운 삶이란 바로 그런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상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늘 평화로운 마음으로 사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불안과 염려, 두려움 등은 신이 아닌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긴 세월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신의 아들 예수조차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마가복음 14:33) 하며 기도 드렸습니다. 예수조차 인간의 몸을 지녔기에 십자가의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의 몸을 지닌 존재라면 그 누구도 불안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완전한 평화를 누를 수는 없는 듯합니다.

그럼, 자신도 모르게 밀려오는 불안을 떨칠 방안은 없을까요? 명상도 한 가지 방법이긴 합니다. 그런데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좀 더 용이한 방안을 권합니다. 행동하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나이키 광고 카피처럼 ‘Just do it’ 입니다.  

소크라데스는 사약을 받기 전날 감옥에서 피리를 배웁니다. 누가 봐도 부질없어 보이는 일을 그는 왜 할까요? 어쩌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 역시 종말의 불안을 덜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행동함으로 불안이 사라진다는 것을 무의식으로 알고 있는 듯합니다.

뇌에는 탐색 부분과 행동 부분이 있는데 이 두 가지가 따로 작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불안 공포 두려움 등으로 탐색에 빠져있을 때는 행동 부분의 뇌도 탐색에 집중하고, 행동할 때는 탐색 부분의 뇌도 함께 행동을 위해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안의 사고에 빠져 있을 때는 행동함으로 뇌의 전 부분을 행동모드로 전환시켜 탐색 부분에 남아있는 불안을 씻어낸다고 합니다.

불안을 느끼시나요? 그럼 엉덩이를 들고 일어서세요. 그리고 무엇이든지 행동을 합니다. 요리를 하던가, 밖에 나가 가벼운 달리기라도 하던가 하며 행동 모드로 두뇌를 돌립니다. 그렇게 기분을 전환하여 불안이 사라지고 나면, 한발 물러나 불안을 부른 일에 대한 객관적 시각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해결책도 보이고, 어쩌면 애초부터 걱정하며 불안에 떨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신이 저에게 한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면 저는 ‘마음의 평화’를 달라고 할 것입니다. 어떤 삶을 살든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행복하든지 불행하든지 관계없이 늘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면 어떠한 소망도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행동함으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는 우리의 삶에서 흔히 느끼는 불안을 떨쳐 낼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던져 줍니다. 부처와 같이 깊은 명상을 통한 깨달음으로 평화를 얻지는 못해도, 단지 행동함으로 불안과 염려,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요긴한 지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자주 글을 쓰는 편입니다. 비록 졸문이긴 하지만 늘 그렇듯이 잘 안되죠. 그럴 때 일어섭니다. 그리고 거실 한편에서 거울을 바라보고 골프채를 휘둘러 봅니다. 잠시 글 쓰는 생각을 잊어버립니다. 이마에 송글 오른 땀을 닦고 자리에 돌아와 쓰던 글을 다시 읽어보면 편하게 다음 줄기가 잡혀갑니다.  

그러고 보니 골프를 칠 만한 이유가 따로 있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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